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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神州)의 큰 재난(3): 보기 드믄 청렴한 공무원이 참혹한 박해를 당하다

[밍후이왕] (밍후이왕 통신원 종합보도) 장팡량(張方良)은 충칭시(重慶市) 룽창현(榮昌縣)의 부현장으로 청렴하게 공무원 직에 종사했다. 2001년 10월에 둥량현(銅梁縣)으로 회의를 하러 외출했다가 업무 이외의 시간을 이용해 나가서 파룬궁 진상자료를 배포하다 납치돼, 8개월 동안 고문학대를 당했는데 사지에 부종이 생겨 서있을 수 없게 됐고 손으로 글을 쓸 수 없게 됐다. 결국 2002년 7월 9일에 박해로 사망했는데 당시 나이 겨우 48세였다.

张方良
장팡량(張方良)

荣昌县人民医院开具的死亡证明
룽창현 인민병원에서 발급한 사망 증명서

현지 주민들은 의견이 분분했다. 한 행정 부서에서 승용차를 모는 기사가 말했다. “아니! 룽창현에서 유일하게 청렴한 관리가 살해되고 그들 탐관은 오히려 별일 없다니.”

1992년, 파룬따파가 중국에 널리 전해져 ‘진선인(眞善忍)’의 법리는 5천년 문화 근기가 있는 중화민족의 후손을 깨우쳐주었고, 인생을 탐색하는 많은 인사들은 생명의 의의와 타락한 세상을 치료하는 좋은 약을 찾았으며 세상 사람이 구도 받을 희망을 보았다. 장팡량은 1997년 말에 창룽현 부현장을 맡았고, 1998년 초에 파룬따파를 수련하기 시작해 몸이 정화됐다. 수년간 앓던 B형 간염은 치료를 받지 않고도 완쾌되어 마침내 23년 동안 그를 괴롭히던 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났다. 파룬따파 ‘진선인(眞善忍)’은 그를 본질적으로 개변, 승화하게 하고 그의 심신은 건강해지고 도덕도 고상해졌다. 그는 명리를 담담하게 보았고 청렴결백하게 자신의 모든 능력을 전 현의 주민을 위해 사심 없이 공헌했다.

장팡량은 요직에 있었지만 뇌물을 받지 않았고 식사 초대를 거부했다. 밖에서 밥을 먹으면 스스로 돈을 꺼냈고, 국가의 이익을 탐하지 않은 사적은 현지에서 널리 전해졌으며 칭송이 자자했다. 이것은 지금 중국 대륙에서는 아주 보기 드믄 일이다. 그 후 창룽현 기관부문에서 불법적으로 장팡량의 집을 수색했는데 장씨의 집에 단지 몇천 위안의 저축밖에 없음을 발견했다.

1. 장팡량이 박해로 사망한 과정

그러나 마침 그가 전 현의 주민을 위해 더욱 많은 공헌을 하려고 할 때, 1999년 7월 20일에 파룬궁은 중국에서 온 천지를 뒤덮을 듯한 극심한 박해를 당했다. 강압 앞에서 그는 다만 몰래 수련할 수밖에 없어 내심은 몹시 괴로웠다. 장쩌민 정치깡패집단이 대법과 파룬궁수련생에 대한 한 가지 한 가지의 박해한 사실을 직접 귀로 듣고 눈으로 보았다. 특히 장쩌민 집단은 스스로 감독하고 스스로 연출한 ‘톈안먼 분신자살사건’으로 파룬궁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모함했는데, ‘진선인(眞善忍)’을 준칙으로 하는 수련자로서 그는 죄악이 더는 지속되게 할 수 없음을 느꼈다. 장팡량은 의연히 걸어나와 파룬궁 진상자료를 배포했으며, 거짓말의 해독을 입은 세상 사람들에게 파룬궁이 박해를 당한 사실을 이야기했다.

2001년 10월 6일에 퉁량현으로 회의를 하러 외출했다가 장팡량은 업무 이외의 시간을 이용해 나가서 파룬궁 진상자료를 배포하다가 납치당했다. 처음에는 충칭시공안국에 갇혔다가 이후에는 퉁량현구치소로 이송됐다. 불법 감금기간에 그는 강압 박해에 직면해 사악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비록 그가 심신에 심한 박해를 당한 상황이었을 지라도 그는 여전히 접촉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진상을 알리고 장쩌민 무리의 사악함을 폭로했으며 ‘진선인(眞善忍)’의 믿음을 굳게 지켰다.

2002년 6월 한 달 넘는 기간 동안 중공 악도는 그를 끊임없이 심하게 박해해 몸에 심각한 손상을 입혔다. 결국 손은 글을 쓸 수 없게 됐다. 그가 사람에게 부탁해 가족에게 맨 마지막 편지를 대필해 써서 넘겨주었을 때, 가족은 그가 박해로 사망할 가능성이 있음을 발견했다. 7월 3일에 가족은 퉁량현구치소로 급히 가서 강력하게 요구해서야 불법 감금당한지 8개월 넘는 장팡량을 만날 수 있었다.

당시 장팡량은 구치소 죄수 4명에게 들려나와 면회를 했는데, 그는 사지에 부종이 생겨 설 수 없었고 움직이기도 불편했으며, 손으로 글을 쓸 수도 없게 됐다. 그러나 사유는 아주 똑똑하여 큰 소리로 말할 수 있었다. 가족은 병보석 요구를 제출했다. 이치에 근거하고 강력한 논쟁을 거쳐서 퉁량현 정법위(정치법률위원회) 부서기 류안쉐(劉安學)는 “우리는 이미 전화로 시정부에 이 일을 보고해 올렸으며, 시에서는 우리가 서면자료를 올리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고 말했다. 가족의 재촉 하에서 류안쉐는 그날 저녁에 서면자료를 시 정부위원회에 팩스로 보냈으며 가족에게 통지를 기다리라고 요구했다.

7월 8일, 장팡량의 가족이 다시 한 번 퉁량현 정법위로 가서 대답을 기다릴 때, 미리 음모를 꾸민 중공 인원은장팡량을 퉁량현 병원으로 이송했으며 몸이 이미 심각한 손상을 입은 그에게 수갑을 채워서 강제로 독극물을 주사했다. 가족이 병원으로 급히 갔을 때 장팡량은 이미 의식이 똑똑하지 못했고 흐리멍덩해져 그 자리에 있는 가족도 식별하지 못했으며 아내마저도 알아보지 못했다.

酷刑演示:注射不明药物

고문 시연: 독극물 주사

이런 참상을 본 그의 아내는 비분해서 퉁량현 정법위 ‘610’ 인원에게 말했다. “우리 집 사람에게 문제가 생기면 당신들이 책임져요!” 그 자리에 있은 퉁량현정법위 부서기 류안쉐는 마음이 켕겨 해석했다. “당신들이 처방을 검사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한 것은 ‘가장 좋은 약’입니다.” 약물이 아직 다 끝까지 주입하지 않은 상황 하에 퉁량현 정법위 ‘610’의 인원은 급히 약병을 뽑아내고 황급히 가족에게 그를 집으로 데려가도록 재촉했으며, 아울러 앞뒤에서 경찰차가 감독하며 미행했다. 룽창현 정부 소재지에 도착한 후 룽창현 정부위원회 서기 왕천즈(王臣志)가 나서서 인수인계한 뒤 쌍방은급히 떠났다.

장팡량이 집으로 돌아온 후 사유가 잠시 동안 똑똑해져 가족을 알아볼 수 있었으나 호흡이 곤란했다. 그는 다만 귀울림이 심각하다는 말만 했을 뿐이고 말하기 어려워했다. 가족은 그가 호흡이 어려운 것이 차츰 심해지자 그날 저녁 11시쯤에 룽창현 인민병원으로 보내 응급처치를 했다. 이튿날 아침 7시에 링거를 주입하는 과정에서 장팡량은 천천히 호흡을 멈췄다. 병원에서 써 준 사망 진단증명서의 결론은 폐렴, 심장 쇠약, 호흡 쇠약이었다.

장팡량의 아내는 극심한 비통 속에서 상황을 룽창현 현장 리치쑹(李啓松)에게 알려 정의롭게 이 일을 조사해 해결하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파룬궁을 연마하는 사람을 우리는 상관하지 않는다”는 답변만 얻었다. 그 다음에 그들은 곧바로현위원회에 사람을 파견해되도록 빨리 화장하도록 했다. 동시에 빈소를 현 장례식장에 만들게 했으며 현 계획생육위원회(그의 아내가 다니는 직장의 가속원 안에 있음)에 만들지 못하게 했다. 게다가 또 그날로 통지를 내려 부국급 이상 간부들은 장팡량을 추모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리고 또 빈소밖에 공안인원이 감시하고 지키고 있으면서 사람들에게 앞으로 다가가서 애도하지 못하게 했다. 룽창현 관련부서에서는 또 고의로 장팡량이 ‘자살로 사망했다’는 거짓말을 만들어냈다.

장팡량이 박해로 사망한 뒤, 영구차는 계획생육사무실 문밖에 정차돼 출입이 금지됐다. 그때는 마침 야채를 파는 기간었는데 야채를 파는 한 농민이 물었다. “누가 죽었어요?” “부현장이 사망했어요.” 둘러싸고 구경하던 한 주민이 대답했다. 야채를 파는 농민은 하하거리며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국민의 것을 많이 탐오해 먹었기에 마땅히 죽어야 해요!” 둘러싸고 구경하던 다른 한 사람이 말했다. “이런 것이 아니예요. 그는 청렴한 관리로, 농촌에 내려와 농민의 것을 먹지도 가지지도 않았으며, 바지를 걷어 올리고 논밭에 가서 농민들과 함께 일했어요. 그리고 회의할 때 먹는 급식비도 자기 절로 받지 않았고 뇌물도 받지 않았어요……” 야채를 파는 농민은 괴로워하면서 말했다. “당신이 말하시는 사람이 장팡량이라는 농업을 관할하시는 부현장이지요. 그는 좋은 사람이며 청렴한 관리입니다.”

2. 허베이 정딩현 부현장 상쿤펑, 10년 불법 판결을 선고받다

상쿤펑(尚琨峰, 남, 54, 대학본과졸업)은 1996년부터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박해를 당하기 전에 이미 정딩현(正定縣) 상무 부현장을 맡은 적이 있었다. 임직기간에 청렴결백하고 공정하며, 공무에 충실하고 법을 잘 지켜 주민들의 큰 호평을받았다. 2001년 6월, 정딩현 610, 공안 악경들이 광적으로 파룬궁수련생을 붙잡을 때 상쿤펑은 핍박에 못이겨 유랑생활을 하게 됐다. 정딩현 중공(중국공산당) 인원은 대량의 재력과 물력을 아끼지 않고 전력으로 수색해 체포했다. 2002년 10월에 상쿤펑은 싱타이(邢臺)에서 납치당했다가 그후 루촨(鹿泉) 구치소에 불법 감금당했다. 2003년에 10년 불법 판결을 선고받았는데, 지금 여전히 허베이성(河北省) 제4감옥[스자좡 베이자오감옥(石家莊北焦監獄)]에 갇혀있다.

상쿤펑은 1999년 ‘7.20’이후 중공이 ‘문화대혁명 조리돌림’ 방식으로 법에 의거해 베이징으로 청원하러 간 파룬궁수련생과 불법 재판을 받은 파룬궁수련생을 박해하는 것을 보고 이를 단호히 반대하고, 공개적으로 군중들이 연공함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상무 현장 직무에서 면직당해 정딩현 정치협상회의 부주석으로 전근됐다.

2001년 7월, 상쿤펑은 자신의 신념을 견지하기 위해 사악에게 협조를 거부했으며 의연히 속인 중의 명리를 포기하고 핍박에 못 이겨 집을 떠나 밖에서 유랑생활을 했다. 상씨의 유랑은 현지에서 적잖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상부로부터 하급기관까지 잇달아 수군거렸다. “이렇게 청렴한 간부가 연공을 한 것 뿐인데 핍박을 받아 이 지경이 되다니. 요즘 좋은 사람이 되는 것마저도 어렵네.” 주민들도 말했다. “이렇게 좋은 관리가 면직 당하다니 우리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공안정보처 인원은 남의 재앙을 보고 기뻐하며 소식을 알렸다. “상씨의 사건이 크게 벌어져서 성과 시에 넘어가게 됐다.” 말로는 상씨가 떠나간 소식이 해외 매체에 의해 폭로되어 한 미국 국적 중국인이 바다 저편에서 현 서기 쑨완융(孫萬勇)에게 전화를 걸어서, 이 일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물었다고 한다. 현 서기는 ‘이런 일이 절대 없다’고 말했으며 아울러 그 미국 교민에게 간행물 복사본을 달라고 한 동시에 성과 시의 ‘610사무실’에 보고했다. 때문에 상씨에 대해 더욱 큰 범위의 조사가 감행됐다.

성과 시의 테러기구인 ‘610사무실’의 귀띔 하에 중공 사악한 당 인원들은 상쿤펑에 대해 연속 1개월 넘는 비밀조사를 감행했다. 그들은 아주 거만하게 “연공하는 사람이 그렇게 좋으리라 믿지 않는다.계란 안에서도 뼈를 가려낼 수 있다”고 소란을 피웠다. 소식에 따르면 이 조사인원 무리들은 위협과 이익으로 유인하는 깡패수단을 채용했는데, 무릇 상쿤펑에게 악행이 있음을 증명하는 사람에게는 좋은 점을 준다고 했으며, 반대로 하면 공직에서 해직시킨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조사 결과는 여전히 현에서 장시기 동안 인사 대권을 담당한 상쿤펑이 뜻밖에 어떠한 탐오나 불법 점유, 먹고 마시며여자와 만나고 도박한 행위, 세도를 부리거나 뇌물을 주면서 관직을 얻은 등 악행이 없으며 심지에 춤추고 마작을 할 줄도 모르는 완전히 전심전력으로 대중을 위해 생각한 사람이었다는 점만 증명했다.

상쿤펑이 박해를 당한 진상이 밍후이왕에 폭로된 후, 국내외의 정의로운 인사들은 잇달아 중공을 질책했다. 이 때문에 스자좡시 공안국에서는 많은 큰 사건, 중요한 사건을 내려놓거나 범인을 붙잡지 않고 정딩현공안국 등과 결탁해 대량의 재력, 물력과 인력(누군가가 몇 십만 위안을 사용했다고 말함)을 움직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 사건에 대해 조사했다. 그들은 상씨의 아내(정딩현 노간부국 부국장임)를 협박해 베이징, 바오딩(保定), 스자좡 등 곳의 친척과 친구 집으로 가서 소란을 피웠다. 상씨의 기사는 어느 하루 출근 한 뒤에 갑자기 실종돼 3일 동안 꼬박 소식이 전혀 없었다. 그의 가족은 직장으로 가서 울면서 하소연했지만 현 책임자들은 모두 모른다고 말하면서 책임을 미뤘다. 여러 방면의 조사를 거쳐서야 시공안국 정보처에 비밀리에 납치당했음을 알게 됐다. 남의 눈과 귀를 가리기 위해 뜻밖에 외부에 대해 이 기사가 차를 몰기 전에 ‘팻말’을 훔쳤으며 산시(山西) 타이위안시(太原市)에서 교통사고를 냈다고 말했다.

2002년 설 전야, 수많은 인가에서 곧 단란하게 모일 명절에 중공의 불법 악도들은 상씨의 아내와 조카딸 및 조카를 시국으로 붙잡아가서 위협하고 이익으로 유인하면서 잔혹한 박해를 감행해 상씨가 스자좡에 있는 주소를 알아냈다. 상쿤펑은 지혜롭게 벗어났지만 천 위안의 돈, 신분증, 대법자료, 진상 현수막 등은 악인 손에 들어갔다. 그는 핍박에 못이겨 어쩔 수 없이 먼 타향으로 가는 수 밖에 없었다.

상쿤펑은 2002년 10월 말에 상타이감옥성으로 불법 체포당했고, 그 후 10년의 불법 판결을 선고받았다.

중공 사악한 당이 파룬궁을 박해한 후, 정딩현의 파룬궁을 수련하는 많은 정부의 업무인원은 심각한 박해를 당했다. 정딩현 정부기관 간부 정란루이(鄭蘭瑞)는 중공의 심각한 박해를 당해 몸에 심각한 상처를 입었다. 그녀의 남편 쑹젠민(宋健敏)은 정딩현 무장부의 간부로 10년 불법 판결을 받았다. 2010년 8월 10일, 정딩현 610의 악경(흉악한 경찰)은 다시 한 번 정란루이에 대해 불법 가택수색을 감행해 강제로 대량의 재물을 빼앗은 동시에 그녀를 납치해 현구치소에 감금했다. 56세인 정란루이는 괴로움을 당해 피골이 상접하고 늘 심장병이 도져서 몸은 못견딜 정도로 허약해졌는데, 여태껏 여전히 불법 감금당해 있다.

3. 네이멍구 츠펑시 여시장 왕야쉬안의 사망원인이 의심스럽다

네이멍구(內蒙古) 자치구(自治區) 츠펑시(赤峰市)에는 현지 국민까지 모두 그리워하는 좋은 부시장이 있는데, 이 부시장의 이름은 왕야쉬안(汪亞軒, 50여세)이며 파룬따파를 수련하는 사람이다. 대법은 이 부시장에게 시민을 자신의 자녀와 같이 아끼고 사랑하게 하는 관리로 되는 표준 ‘진선인(眞善忍)’을 주어 일심으로 시민을 위하고 선행하게 했다. 장쩌민 범죄집단이 파룬따파를 박해할 때인 1999년 8~9월 즈음 공휴일에 이 부시장은 갑자기 사망했는데 당시 나이 겨우 53세였다. 중공은, 왕야쉬안이 훙산(紅山)으로 유람갔다가 조심하지 않아 산아래로 떨어져 사망했다고 말했다.

왕야쉬안은 파룬궁을 수련했고 신체를 건강하게 하는 5장공법을 연마했다. 매일 또 많은 번거로운 일이 많은데 어떻게 갑자기 훙산에 기어오를 수 있겠는가? 그녀는 또 왜 어두운 밤에 이렇게 가파른 돌산에 기어올랐는가? 왕야쉬안의 시신에는 산 위에서 굴러 떨어진 어떠한 흔적도 없었으며 호주머니 안에 있던핸드폰도 여전히 그곳에 있었는데 떨어져 잃어버리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고장나지도 않았다.

훙산은 츠펑시 교외에 있는 산으로 붉은 돌이 있어 유명하다. 이 산의 붉은 돌이 있는 곳일부는 일반적인 사람이 쉽게 기어오를 수 없는 가파른 돌산으로, 등산도구거나 혹은 등산 기능이 있는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오르기가 아주 어렵다. 게다가 훙산 밑은 텅 비어 있는, 중공의 비밀 군사시설과 츠펑공안의 비밀고문 시설이 있기에 더욱 접근할 방법이 없다. 훙산 밑 산세는 높고 가파른 비탈로, 때마침 8~9월인 늦여름 초가을에 만약 이곳에서 산아래로 굴러 떨어진다면 도중에 잡초, 관목, 돌덩어리에 막혀 전혀 산아래까지 내려가지 못한다. 그리고 완만한 비탈에서 넘어졌다면 다시 기어일어나기도 어렵지 않아 전혀 산아래까지 굴러 내려오지 못하므로 떨어져 사망할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츠펑시 여 부시장 왕야쉬안은 파룬따파를 수련하기 시작해서부터 국민을 자신의 자녀와 같이 아끼고 사랑했다. ‘진선인(眞善忍)’은 그녀 마음속에서 뿌리를 내렸으며, 그녀는 엄격하게 자신을 요구해 자신부터 잘했다. 하지만 ‘가악투(假惡鬪-거짓, 악행, 투쟁)’를 수단으로 한 중공 체제 중에서 왕야쉬안은 자신의 맡은 일을 잘하기는 그리 쉽지 않았다.

1999년 ‘7.20’ 이전, 중공 장쩌민은 자신의 주관대로 파룬궁을 박해하려고 결정하고 고위층 관료회의를 소집해 비밀리에 지령을 전달했는데 츠펑시에서는 파룬따파를 수련하는 부시장 왕야쉬안을 파견해 참가시켰다. 왕야쉬안은 명철보신하지 않고 중공의 간사한 권모술수에 얼굴색이 변하지 않았다. 곧 대법의 아름다움을 솔직하게 말하고 파룬따파가 국가와 국민에게 백가지 좋은 점만 있으며 한 가지 해로운 점이 없음을 이야기했다. 왕야쉬안의 솔직한 말은 중공 집권자를 개변시키지 못했으며 도리어그녀를 걸림돌로 간주하게 했다. 그 후 중공 대표는 담화하고 공작한다는 명목으로 왕야쉬안을 찾아 이 일을 이야기했으며, 공산당의 ‘당성(黨性)원칙’을 중하게 여기도록 요구했다가 진실한 말만 하는 왕야쉬안에게 거절당했다.

왕야쉬안의 갑작스런 사망에서 전체 사건의 신고, 법조인이 안건을 받아들이는 것과 조사는 모두 중공 자신이 감독하고 스스로 연출했다. 이렇게 ‘진선인(眞善忍)’에 따라 좋은 공무원이 되려 하고 진실한 말을 하려한 왕 부시장은 조용히 사라졌다. 이전에 츠펑시 훙산구 공안부문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한 사람이 말했다. “어떤 한 노부인은 파룬궁을 포기하지 않아 죽임을 당했는데 그녀 가족도 모르고 있어요.”

중공이 파룬따파수련을 박해한 이래, 네이멍구와 츠펑의 중공 악인이 장쩌민 집단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무고하게 선량한 인사를 살해한 것은 왕야쉬안 뿐이 아니다. 전 츠펑시 총공회(노동조합) 여공부 부장 저우차이샤(周彩霞)는 2000년에 납치돼 네이멍구 투무지(圖牧吉)노동교양소에 갇혔다. 츠펑정법위 두목은 “저우차이샤가 매우 완고하니 죽는 길 밖에 없다”고 소란을 피웠다. 2003년 7월 12일에 네이멍구 바오안자오(保安沼) 여감옥(전 네이멍구제2여자감옥)에서 저우차이샤는 감옥장 저우젠화(周建華)가 직접 나선 박해로 사망했다.

문장발표: 2011년 07월 18일
문장분류: 박해진상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1/7/18/24388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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