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지린성 보도) 지린성(吉林省) 징위현(靖宇縣)의 나이 겨우 46세인 파룬궁수련생 후윈치(胡雲岐)는 사악한 공산당의 수년간 박해를 당해 결국 2011년 4월 18일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이때에 이르러서도, 현지의 흉악한 경찰은 그에 대한 박해를 중단하지 않았는데 뜻밖에 ‘화장증명서’를 주지 않았다. 동시에 징위현에서 전문적으로 파룬궁을 박해하는 중공(중국 공산당)의 불법 기구인 ‘610’과 연합해 장례에 참가한 후윈치의 셋째 남동생과 넷째 남동생을 다시 한 번 납치하려고 했다가 장례에 참가한 친척과 친구들의 호된 비난을 당했다. 이들 악도들은 이제야 이 같은 일처리 방법은 양심을 전부 상실한 짓임을 느꼈다. 두 형제는 가족을 잃은 비통 속에서 다행히 납치박해를 당하는 재난을 모면했다.
후윈치(남, 1965년 7월 17일 출생)는 징위현 싼다오후진(三道湖鎭) 싼허촌(三合村)에서 거주하고 있다. 1996년 11월에 파룬궁을 수련한 후 심신의 건강을 얻었다. 그러나 중공(중국 공산당) 사악한 당이 1999년 7월 20일에 파룬궁을 박해한 이래, ‘眞ㆍ善ㆍ忍’(진선인)에 따라 좋은 사람으로 되려 한 1억 명의 파룬궁수련생은 역사상 전례가 없는 악독한 박해를 당했다.
후윈치는 2000년 11월에 베이징에서 단지 파룬따파를 위해 한마디 공정한 말을 하고, ‘파룬따파는 좋습니다(法輪大法好)’는 한마디를 외쳤다가 흉악한 경찰들에게 고문박해를 당했다. 겨울에 흉악한 경찰은 대량의 냉수를 끼얹은 동시에 창문을 열어놓고 추위에 떨게 했는데 그는 두 다리의 감각을 잃어 걷기도 어려웠다. 동시에 현지 ‘610’에 의해 베이징에서 납치당해 바이산시(白山市)노동교양소에서 1년 동안 불법 박해를 당했다.
2001년 11월 말, 후윈치는 창춘시(長春市) 자오양거우(朝陽溝)노동교양소로 이송돼 계속 박해를 당했다. 이 기간에 현지 파출소에서는 징위현 ‘610’과 내통해 그에 대해 불법 가택수색을 감행했고, 그의 형과 남동생의 신분증을 강탈해갔다. 동시에 그들 세 형제(모두 파룬궁을 수련함)의 호구를 전부 취소했다.
중공 당국에서 죄명을 뒤집어씌워 후윈치를 창춘시 자오양거우 노동교양소에 불법 감금한 증거
2002년 5월에 노동교양소에서 돌아온 후, 후윈치는 계속 교란을 받아 핍박에 못이겨 의지할 곳을 잃고 떠돌아 다녔다. 그러나 여전히 안정된 나날을 보내지 못했다. 후윈치는 창춘시에서 일했고 원래 창춘시 솽더향 펀수이룬[雙德鄕 分水屯-창춘시 웨이싱로(衞星路) 펀수이툰]에서 셋방살이를 했다. 2004년 3월 2일, 관련 인원이 치안관리비를 거두어들이러 집으로 찾아갔다가 방안의 상자 위에 파룬따파 진상표어가 인쇄된 신문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3월 3일 저녁, 창춘시 난후(南湖)파출소에서 집으로 찾아와 불법적으로 가택 수색을 감행해 대법서적과 ‘밍후이주간’ 등 자료를 수색해 갔다. 동시에 강제로 후를 난후파출소( 집주인은 1백 위안의 재물을 강탈당했음)로 납치했고, 그날 저녁에 창춘시공안국으로 납치했다.
후윈치는 재차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받아 자오양거우 노동교양소로 납치돼 2년 동안 박해를 당했다. 그가 2006년 3월에 노동교양소에서 석방돼 나올 때 이미 박해로 볼품없이 됐고 각종 질병으로 시달려 출근하는 것도 겨우겨우 했다.
후원치는 공포의 그늘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다시 박해를 당할까 두려워 정신적 압력이 극히 컸다. 또 흉악한 경찰은 그의 호구를 취소했는데, 2010년에 사악한 당이 인구 조사를 해서 그에게 또 한 차례 거주환경을 빼앗자 그의 신체는 더욱 망가져 출근할 능력조차 없었다. 결국 2011년 4월 18일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문장발표: 2011년 05월 10일
문장분류: 박해진상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1/5/10/24044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