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헤이룽장보도) 헤이룽장성 자무쓰시 파룬궁수련생 쥐짜이빈(鞠在斌)은 2010년 11월 25일에 박해 중에서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당시 나이 겨우 38세였다. 쥐짜이빈은 생전에 친구에게 “나는 노동교양소에서 돌아와 몸이 지금껏 회복된 적이 없었어요.” 노동교양소를 떠난 후 오랫동안 이러한 지난 일들을 언급하기만 하면 그는 곧 얼굴이 창백해졌다.
쥐짜이빈(남)은 1972년 12월 헤이룽장성 더더우현(德都縣)에서 출생했다. 1995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자무쓰 발전소에서 보조 엔지니어로 일했다. 1999년 7월 20일, 중공(중국 공산당)이 파룬궁을 박해한 후, 쥐씨는 각종 고문과 비인간적인 학대를 당해 몸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고 극도로 허약해졌다. 이와 동시에, 자무쓰 발전소에서는 그를 공직에서 해고했다. 쥐씨는 핍박으로 의지할 곳을 잃고 떠돌아 다니게 되어 기본적인 생활도 보장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결국 박해 중에서 세상을 떠났다.
품행과 학문이 훌륭한 좋은 학생으로 즐겁게 남을 돕다
쥐씨는 4남매 중 맏아들이었다. 쥐씨는 어릴 적부터 매우 선량하여, 부모를 공경하고 남동생과 여동생들을 늘 보살폈으며, 이웃들은 항상 그를 ‘좋은 아이’라고 불렀다. 그는 독서하기를 좋아했고 동창들에게 관심을 기울였으며 학업성적도 우수했다. 1991년 7월,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상하이(上海) 전력(電力)학교 생산공정자동화학과에 합격하였다. 1995년 7월 졸업 후, 자무쓰 발전소에서 근무했다.
일찍이 고교시절시절에 쥐씨는 인생의 참뜻을 사색했다. 근무를 시작한지 오래지 않아, 마침 파룬따파가 중화대지에 널리 전파되는 시기를 맞이했다. ‘眞善忍’의 수련 원칙, 도덕의 승화와 몸을 건강하게 하는 신기한 효과는 그를 깊이 끌어당겼다. 1996년 5월, 쥐씨는 기쁘게도 파룬따파를 얻고 파룬궁수련생이 되었다.
파룬따파를 수련한 후, 쥐씨는 ‘眞ㆍ善ㆍ忍’의 표준에 따라 자신을 엄격히 요구해, 근무지 또는 어떤 장소든 지를 막론하고 모두 좋은 사람, 더욱 고상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했다. 그는 매일 출근하여 작업반으로 가서는 먼저 위생청소를 했고 또 동료들을 위해 뜨거운 물을 가져다 놓았다. 쥐씨는 근면하고 성실하게 업무에 임했으며 어렵고 힘든 일을 가리지 않았다. 업무에서도 많은 노력을 들여 연구하여 일부 기술적 문제를 해결했다. 근무하는 기간에 줄곧 발전소의 독신자숙소에서 머무르면서, 동료가 경제적 곤란이 있는 것을 보면, 그는 늘 자신의 월급으로 그들을 도와주었다. 직장에서 그에게 나눠준 복지물품, 예컨대 쌀, 밀가루, 콩기름 등을 쥐씨는 집으로 가져간 적이 없으며, 모두 동료들에게 보내주었다. 발전소에서 책임자에서부터 동료에 이르기까지 그가 하난의 좋은 동료임에 찬성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바로 이렇게 좋은 사람으로 되려는 사람은 도리어 중공의 잔혹한 박해를 당했다.
자무쓰 발전소에서 불법 해고 당하다
1999년 7.20 중국 공산당은 광적으로 파룬궁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쥐씨는 파룬따파가 좋음을 알리기 위해, 그날 곧바로 직행열차를 타고 베이징에 들어갔다. 베이징에 도착한 후, 바른 말 한 마디 못하고 곧장 무장경찰에게 납치되어 기차로 창춘(長春)까지 송환되었다. 그 후 특별 차편으로 하얼빈시로 압송되었다가 다시 하얼빈주재 자무쓰 사무실 전문 인원들에 의해 자무쓰로 압송되었다. 밤 12시 넘어 공안분국 ‘610’(중공이 파룬궁을 박해하기 위해 전문적으로 설립한 초 법적 기구이며 공안, 검찰, 법원 위에 군림함)으로 끌려갔다.
불법 압송돼 돌아온 후, 자무쓰 발전소의 책임자는 늘 그를 찾아 면담했고, 그로 하여금 수련을 포기하도록 했다. 쥐씨는 단호하게 파룬따파 수련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 후 자무쓰 발전소에서는 쥐짜이빈의 부친으로 하여금 그에게 압력을 가하도록 했지만 그는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부친은 쥐씨를 고향집으로 데려와서 강제로 그에게 수련을 포기하도록 했다. 그는 끊임없이 아버지에게 眞ㆍ善ㆍ忍을 수련함은 잘못이 없으며, 중공의 이치에 어긋난 박해야말로 진정한 잘못이라고 말했다. 그의 아버지는 외부의 압력이 비교적 크고, 또 아들의 마음을 움직일 힘이 없었기에, 화가 나서 손에 있던 자신의 밥그릇을 난폭하게 땅 위로 내동댕이쳤다. 그런데 밥그릇은 박살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고무공처럼 왔다 갔다 하면서 몇 번 튕겨졌다. 그 후, 쥐씨는 아버지에게 말했다. “만약 저더러 수련을 포기하라고 하신다면 저는 사는 게 죽는 것만 못합니다.” 부친은 그의 의지가 그렇게 단호한 것을 보자, 압력을 가하는 것을 그만 두었다.
관할 구역 경찰의 잦은 교란을 벗어나기 위해, 쥐씨는 발전소 공장 구역에서 10리 떨어진 곳의 주민구역(14소학교 인근)에서 한 방에 세 들어 살았다. 이렇게 그는 매일 출근해서 일하는 외에도 여가 시간에 법공부를 하고 연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2002년 7월, 쥐씨는 진상을 분명히 알지 못한 사람에게 무고 당한 뒤, 3년의 불법 노동교양을 선고 받았으며, 아울러 자무쓰 발전소로부터 불법 해고를 당했고 직업을 잃었다.
자무쓰노동교양소의 잔혹한 박해
쥐씨가 막 자무쓰노동교양소로 납치당했을 때, 한쪽 손은 교도관에 의해 스팀 파이프 위에 채워져 박해를 당했다. 흉악한 교도관 궈강(郭剛) 등은 그에 대해 위협하고 공갈 협박하면서 정신적으로 극심한 압력을 가했다. 노동교양소에서 쥐씨는 흉악한 교도관들이 수련생에 대하여 잔혹한 폭행을 가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학교를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사회 초년생인 쥐씨는 교도관들이 이렇듯 법률도 무시하는 폭력배들이라곤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정신적 압박은 극에 달했다. 쥐 씨는 눈앞에 놓인 아령으로 자신의 머리 위를 때리게 하여 자신 스스로 부상을 입혔다. 선혈이 줄줄 흘러내려 싸맨 붕대(역주: 파룬궁수련은 자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것은 수련생이 상상하기도 어려운 극에 달한 사악한 환경 속에서 이지적이지 못한 행위로써 모방할 수 없음)를 붉게 물들였다. 다른 수련생들이 이를 보고, 궈강에게 당신들이 어째서 사람을 이 정도로 때렸냐고 묻자, 궈강은 그가 스스로 처박은 것이라고 말했다. 수련생이 말하기를, 그것도 당신들이 위협하고 공갈 협박해서 조성된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서, 흉악한 교도관은 쥐씨를 ‘전향’하고 그를 핍박해 수련을 포기하도록 제멋대로 계획했다. 4개월 사이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교대로 집중 공격을 하고, 강건책과 유화책을 함께 썼음에도 쥐씨의 대법 수련에 대한 굳은 믿음은 움직일 수 없었다. 한번은 노동교양소의 교도관이 죄수에게 지시하여 발로 쥐씨의 흉부를 걷어차게 했는데, 쥐씨는 심장과 폐에 아주 큰 손상을 입었고, 호흡이 곤란해졌고 끊임없는 기침을 했는데 줄곧 노동교양소를 떠나서까지도 오래 동안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다.
2002년 11월 9일, 자무쓰노동교양소에서는 상금을 나눠주고 승진하거나 혹은 죄수들에게 형기를 줄여주는 등을 미끼로, 흉악한 교도관과 죄수들에게 지시해서 수련생을 잔혹하게 박해했다. 그들은 여러 차례 방 하나에 가두고, 강제로 수련생의 두 손을 무릎 위에 놓게 했다. 그리고 한 사람씩 작은 걸상에 가지런히 앉혀놓고(그들의 전문 용어로 ‘마다파이(碼大排)’라 부름) 움직이지 못하게 했으며 말하지 못하게 했다. 수련생 주변에는 몽둥이와 전기곤봉을 든 흉악한 교도관과 죄수들이 서서 강제로 수련생들에게 대법을 비방하는 비디오영상을 관람하게 했는데 분위기가 매우 공포적이었다. 누가 움직이거나 혹은 반항만 하면 곧바로 전기곤봉으로 전기 충격을 가하고 몽둥이로 혹독한 구타 등 가혹한 고문을 가했다.
그날 저녁 11시에 쥐 씨는 흉악한 교도관들에게 7호 감방으로 끌려갔다. 감방 안에서 고문 박해를 당하고, 꼬박 며칠 동안 잠을 자지 못해 극도로 피로해진 대법제자가 있었는데, 구타로 얼굴 부위가 변형되고 눈이 퍼렇게 부어 올랐으며 목구멍이 막힌 궈위주(郭玉珠), 그리고 혹독한 구타를 당한 후, 아무것도 깔지 않은 나무 침상 위에 묶여있는 후이웨신(慧月新), 구타로 치아가 빠진 징광린(敬廣林)이 있었다. 목적은 쥐씨에게 이런 공포스런 장면을 목격하게 해서 정신적으로 압력을 조성하기 위함이었다. 그런 다음 그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흉악한 경찰은 쥐씨의 두 손을 등 뒤로 비틀어 올리고, 수갑을 철제 침대 위에 채워놓았으며, 강제로 그에게 20센티미터 높이의 모서리가 있는 작은 플라스틱 걸상 위에 앉혔다(이런 작은 걸상에 사람이 오래 앉아 있으면, 나중에 둔부의 피부가 찢기고 살이 터져 바지와 살이 들러붙게 됨). 게다가 노동교양소에서 수련생을 박해한 가장 사악한 네 명의 죄수 중 한 사람인 량진구이(梁金貴)에게 교사해서 쥐씨를 박해하게 했다.
고문 시연: 작은 걸상 위에 앉히고 두 손을 등뒤로 하여 침대틀 위에 채우다
량진구이는 쥐씨에게 말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당신은 발전소 사람이고 또 대학생이라고 하는데, 나는 전문적으로 대학생을 다스린다.” 이렇게 말하면서 작은 걸상 위에 앉은, 전혀 대비가 안된 쥐씨의 흉부를 사납게 걷어찼다. 쥐씨는 비명소리를 지르면서 땅 위에 쓰러졌고 얼굴은 창백해졌다(당시 수련생을 혹독하게 구타한 장면을 그 현장에 있던 17세 죄수 왕챵(王强)이 놀라서 정신병에 걸려 그 후 병보석으로 풀려나 치료를 받았음).
이어서, 남자 대대 대대장 류훙광(劉洪光), 중대장 궈강 등 네 명의 흉악한 경찰이 방안에 들어와서 쥐씨를 사람이 없는 11호 감옥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상술한 방법으로 침대 머리에 채워놓고, 역시 수련생을 박해함에 가장 사악한 네 명의 죄수 왕훙웨이(王宏偉), 쑨즈쑹(孫志松), 량진구이 등에게 충동질해서 쥐씨에 대해 육체적, 정신적 학대를 가하도록 했다. 연속 5박5일 동안 쥐씨를 강제로 모서리가 있는 걸상 위에 앉혀놓고, 잠도 자지 못하게 하면서 움직이지 못하게 했으며 두 손은 등뒤로 해서 철제침대 위에 채워놓았다. 눈을 감거나 움직이면 곧바로 몽둥이로 구타했다. 이외의 고문은, 조는 것을 보기만 하면 냉수를 끼얹거나 혹은 담배 꽁초로 얼굴 부위를 지졌으며, 심지어 담배 꽁초를 콧구멍 안에 밀어 넣고 눈덩이를 목안에 넣은 다음 여러 개의 전기 곤봉으로 전기 충격을 가했다.
이것은 노동교양소에서 헌법, 형법 등 모든 법률을 위반하고 있는 것인데, 교도관에게 지시하고 인간성이 없는 죄수들에게 사주하여 수련생에 대해 잔악무도한 박해를 감행한 하나의 장면이다. 이런 박해형식은 시종 멈춘 적이 없는데 목적은 수련생을 압박하여 眞善忍 수련을 포기시키기 위함이다. 이렇다 하더라도 쥐씨는 이번 박해 중에서 매우 확고하게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다.
2003년 4월 하순에 대대장 류훙광, 중대장 궈강 등 흉악한 교도관은 또 상술한 수단을 채용해, 확고한 수련생에 대해 새로운 한 차례의 잔혹한 박해를 발동했다. 그들은 죄수들에게 교사해 수련생들을 가지런하게 작은 걸상에 앉혀놓고 두 손은 무릎 위에 놓게 하고 움직이지 못하게 해서 아침 4시부터 줄곧 저녁 12시까지 앉혔다. 어떤 때에는 심지어 이른 새벽 2시까지 앉혀놓았다. 흉악한 교도관들은 먼저 수련생들에게 잠을 자지 못하게 해서 심신이 극도로 피곤해지게 했다. 다시 수련생을 사람이 없는 방안에 홀로 가두고 고문 학대를 가해서 수련을 포기하도록 했다. 이번에 쥐씨는 또 단독으로 잔혹한 박해를 당했다. 사람이 없는 방안에 갇혔기에, 구체적 박해 정황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박해의 혹독함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억울하게 세상을 뜨다
3년 넘는 잔혹한 박해는 쥐씨의 몸과 정신에 극심한 상해를 입혔다. 노동교양소를 떠난 후 오랫동안 그때 있었던 일들을 언급하기만 하면 그는 곧 얼빠진 사람처럼 얼굴이 창백해졌고 매우 고통스러워 했다. 자무쓰노동교양소의 박해 중에서 쥐씨는 폐 부위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고 호흡이 곤란했으며 기침이 끊이질 않았는데, 바로 그의 몸이 허약해져 억울하게 사망한 중요한 원인 중 하나이다.
쥐짜이빈의 사망은 그 개인 가정의 비극일 뿐만 아니라, 역시 현재 중국 대륙에서 중공의 박해로 조성된 무수한 인간 비극의 실례로, 사악한 중국공산당이‘ 眞ㆍ善ㆍ忍’에 대한 박해이며, 바로 일체 죄악의 근원이다.
문장발표: 2011년 04월 01일
문장분류: 박해진상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1/4/1/佳木斯市法轮功学员鞠在斌遭迫害含冤离世(图)-23840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