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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유랑생활 장잉, 억울함도 씻지 못한 채 박해로 사망

[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헤이룽장보도) 10년 세월은 모든 아늑한 가정의 사람에 대해 말한다면 그렇게 지루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심신에 손상을 입고 돌아갈 집도 없이 유랑하는 사람으로 말하면 어떠한 괴로움과 고통이겠는가? 때문에 장잉(張瑩)이 중병에 걸려 타향에서 객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사람들은 모두 매우 놀라며 마음 아파했다.

장잉은 원래 자무쓰 제2제약공장의 기술 부주임으로 이와 관련된 과 학력자였다. 한 여성으로 말한다면 이것은 그래도 사업에서 성공한 셈이다. 특히 1997년에 파룬궁을 수련한 이후, 몇 년 동안 장경색증에 걸렸던 그녀는 마침내 각종 야채를 모두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그 몇 해 동안에 섬유를 지닌 야채들을 모두 감히 먹지 못하던 그녀에 대해 말하면 정말 기적이었다. 공장의 많은 직원들은 이 기적을 본 뒤, 그들도 분분히 法輪大法(파룬따파) 수련 중에 들어섰다.

그러나 1999년 7월 20일에 장 씨 집단과 중공(중국 공산당)은 서로 이용해서 파룬궁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모든 파룬궁수련생들은 모두 ‘연마한다’와 ‘연마하지 않는다’란 선택에 직면했다. 자무쓰 제2제약공장의 사악한 당서기와 공장장은 장잉에게 수련과 근무가 본래 서로 모순되지 않는 양자(兩者) 중에서 수련을 포기하든지 아니면 해고당하든지 선택을 하도록 했다. 고통스러운 선택 중에서 장잉은 파룬궁 수련을 선택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건강과 생명은 法輪大法(파룬따파)에서 왔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전체 직원들이 묵묵히 주시하고 사람들이 동정하며 아쉬워하는 가운데 장잉은 그녀가 사랑하던 직업을 떠나 유랑하는 인생을 시작했다.

장잉은 억울함을 당해 직장에서 해고당했고, 남편도 퇴직했기에 생활형편은 단시간에 매우 어렵게 되었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장잉은 부득이 고향을 멀리 떠나 남방의 한 제약공장으로 가서 일했다. 세상 사람들이 속임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 그녀는 각종 기회를 이용해서 사람들에게 진상을 알려주었다. 한번은 직장에서 진상자료를 출력하다가 다른 사람의 무고로 거주하고 있는 곳의 파출소에 의해 납치당했고, 또 자무쓰 쓰융훙(斯永紅)분국으로 돌려보내졌다. 가족은 돈을 써서 그녀를 보석으로 풀려나게 했지만 신분증 등 증명서는 압수당했다. 집으로 돌아오자 남편은 그녀에게 수련을 포기시키려고 온갖 방법으로 그녀를 괴롭혔다. 하지만 이런 것들로는 ‘眞善忍’에 대한 그녀의 신앙을 바뀌게 할 수는 없었다.

증명서가 없지만 또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장잉은 본지에서 직업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 후, 화촨(樺川)의 약공장에서 일을 찾았다. 열심히 일하면서도 불평하지 않고 근면하고 성실하게 업무에 임하는 대법제자의 업무 태도는 이 공장의 공장장을 감동시켰다. 원래는 그녀에게 한 작업실의 기술만 책임지게 했다가 그 후에는 전체 공장의 기술업무를 책임지게 했다.

하지만 박해의 압력, 가정에서 속임을 당해 가하는 압력과 분망한 업무, 그리고 유랑생활은 다시 한 번 장잉의 건강에 손해를 입혀 2008년에 유선암 증상이 나타났다. 결국 2009년 세상을 떠났다. 만약 이번 역사상 전례가 없던 박해가 없었다면, 만약 그녀에게 안정된 생활환경이 있었다면, 만약 그녀가 여전히 안정한 생활환경 중에서 수련할 수 있었다면 그녀는 이렇게 일찍이 세상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 나이 겨우 40여 세였다.

문장발표: 2011년 03월 07일
문장분류: 박해진상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1/3/7/漂泊十年冤未洗-张莹遭迫害离世-23726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