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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사범대학 의사 왕안린이 박해당한 경험

글/ 베이징 파룬궁수련생 왕안린

[밍후이왕] 베이징 사범대학 의사 왕안린(王安琳·여)은 확고히 파룬궁을 수련해 여러 차례 중공(중국 공산당) 경찰에게 납치를 당했고, 2005년에 5년의 불법판결을 당해 베이징 여자감옥에서 박해를 당한 적이 있다. 왕안린은 박해당한 체험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왕안린이며 1947년 출생으로 베이징 사범대학 의사이다. 집은 베이징 사범대 원내의 러위(樂育) 6층 2문(門) 202호이다. 나는 파룬궁을 수련했다는 이유로 이미 전에 차례로 7번 붙잡혀 혹독한 구타를 당했고, 판결을 선고받아 심신에 막심한 상해를 입은 적이 있다.

불법구류, 노동교양을 선고받고, 악경에게 혹독한 구타당해

2000년 6월 18일, 나는 다른 파룬궁수련생과 톈안먼에 가서 현수막을 펼쳤다. 광장에서 경찰은 나를 마구 두들겨 패고 머리카락을 틀어잡아 야만적으로 차에 던진 다음에 파오쥐(炮局)로 잡아갔다. 나는 1개월 구류를 당했다가 1년의 보석을 당했다.

2000년 7월, 나는 고향인 후베이(湖北) 스옌(十堰)으로 돌아갔다. 후베이로 간 이튿날에 둘째 누나 왕안슈(王安秀-지금 박해로 사망)의 집으로 갔는데, 오후 4시에 현지 공안국에서 집에 뛰어들어 마구 수색을 감행했다. 그 자리에서 나의 신분증과 몸에 지녔던 시디를 수색해갔으며 나를 속여 파출소로 데려가 쇠우리 안에 3일 동안 가뒀다. 48시간이 초과했는데도 그들이 여전히 나에게 아무런 소식도 주지 않아 나는 단식(8월 27일)하기 시작했다. 셋째 날에 그들은 나를 유치장에 보냈다. 파출소든지 유치장이든지를 막론하고 나는 연공을 견지했으며, 아울러 단식으로 불법체포에 항의했다. 이 때문에 나는 혹독한 구타를 당했다. 나는 구타를 당해 땅위에서 이리저리 뒹굴었다. 허리부위 아래에서 발뒤축에 이르기까지 검은 자색으로 변했으며 당시 현장에 있던 어떤 사람은 목격했다. 후에 나는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베이징 사범대학의 파룬궁수련생, 동료 및 당시의 보위처 처장에 이르기까지 전부 나의 외상을 목격했다. 사진 한장이 있었는데 그 후 박해로 잃어 버렸다. 내가 단식한 기간에 그들은 나에게 음식물을 주입했다. 내가 음식물 주입에 반대하자 그들은 수갑으로 나의 입을 벌려 두 입가를 찢어지게 해 선혈이 줄줄 흘렀으며 코를 잡고 강제로 주입했다. 주로 경찰 상(尚)××(여)가 했다.

이 기간에 현지 공안과 베이징 공안이 연계했는데, 베이징 공안 안쉬창(安徐强), 류쳰(劉謙)이 스옌에 도착하자 현지 공안은 그들을 열정적으로 접대하며 식사대접을 하고 유명 담배와 술을 선물했다. 그런 다음에 우당산(武當山)으로 가서 실컷 놀고는 다시 와서 나를 데리러 왔다. 이 기간에 나는 줄곧 단식을 해서 그들이 나에게 공정한 평가를 해주도록 요구했다. 베이징 공안은 이미 베이징으로 되돌아 갈 기차표를 사가지고 나를 데리러 왔지만 나는 가지 않았다. 그래서 베이징 공안 안쉬창은 억지로 나를 업어서 기차에 태웠다, 기차마저도 그들의 지휘 하에 내가 기차에 오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늦게 떠났다.

2001년 10월에 나는 진단지를 배포하다가 붙잡혀 1년 6개월 동안 불법노동교양을 선고받았다.

감옥에서 노역과 학대를 당하다

2005년 7월, 나는 집에 있었는데 악경(사악한 경찰)이 베란다 위에서 나의 집에 뛰어들어 컴퓨터, 프린터와 모든 대법 자료를 빼앗아 갔으며, 나를 유치장으로 납치해 5년의 불법판결을 내렸다. 쉬안우(宣武)의 공안 우(吳)××(남)는 나를 마구 두들겨 팼고 깡패의 언어로 끊임없이 욕설을 퍼부었다. 그의 경찰 번호는 028965이다.

톈(田) 씨 성을 가진 7처(七處) 여경과 후(胡) 씨 성을 가진 남자 경찰은 만 위안짜리 컴퓨터를 돌려주지 않고 나에게 서명을 시켰다. 두 차례의 감옥 생활은 나의 심신에 극심한 고통을 가져다주었다. 몸 상태가 갈수록 나빠졌다. 나는 본래 연공을 해서 몸에 아무런 병도 없었다. 그러나 감옥에서는 나에게 매일 많은 약을 먹였는데 그중에 심장병은 주요한 병이었다. 그들은 또 나를 끌어다가 입원시켰다. 가장 심각한 때였기에 그녀들도 감히 나에게 전향이라는 단어를 언급하지 못했다. 정신적인 압력이 너무 커 머리카락이 한줌씩 빠져 전형적인 원형 탈모증 증상 또렷이 나타났다. 장기간 강압에 처해진 탓에 정신적으로 매우 긴장했다. 출옥한 후 오랜 시간이 지나도 나는 그런 비인간적인 생활의 속박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웠으며 늘 악몽을 꾸었다.

노역 노동은 감옥에서 파룬궁을 박해하는 주요 수단 중 하나이다. 노인, 어린이, 환자, 장애인을 막론하고 모두 참가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생산량에 대한 요구가 있었다. 생산량의 높낮이로 점수의 높낮이 결정해서 누계 점수로 형기를 줄여줌을 결정했다. 이로부터 무릇 일찍이 출옥하고 싶은 사람은 모두 점수의 누적으로 형을 줄이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또 필사적으로 일했다. 그러나 감옥에서는 다른 한 방면에서는 또 일부 방법으로 형기를 줄이고 싶어 하는 파룬궁수련생을 억제했다. 예컨대 답안을 쓰는 것으로 파룬궁수련생이 진정으로 전향했는지를 고험했다. 이들 답안지는 3개 답안이 있을 것이다. 만약 그들이 마음속으로 지정한 답안을 선택한다면 맞게 대답한 것이다. 하지만 상반되는 답안을 선택한다면 혼나며, 만약 불확실한 답안을 선택한다면 문제가 있는 것으로 암암리에 음모를 당할 것이다. 예를 들면, 질문해서도 안 되는데, 그러면 마음속에 무엇을 감추고 말하지 않는 것이라고 여겨 암암리에 괴롭힐 것이고, 가탈을 부려 일을 시키며 점수를 적게 주거나 혹은 상상하지 못한 방법을 사용해 괴롭힐 것이다. 나는 답안지를 쓸 때, ‘모른다’고 대답했고 그 자리에서 괴롭힘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오래지 않아 재난이 닥쳤다.

사정은 이러했다. 파룬궁수련생 랴오이핑(廖一平)은 이미 70여 세이다. 노동하던 과정에서 머리가 어지러워 견지할 수 없게 되어 도중에 돌아갔다. 우리 두 사람은 원래 같은 곳에서 살았고, 차례로 붙잡힌 뒤에도 같은 감방에 있어서 자연히 관계가 좋았다. 그녀는 일을 끝낼 때, 자기가 만든 물건을 내는 걸 도와달라고 부탁하면서 20개의 완성품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러나 일을 끝낼 때 보니 18개 밖에 없었다.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사실 다른 죄수가 몰래 훔쳐갔음을 누구나 다 알고 있다. 대장(隊長)은 마음속으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도리어 이 일을 크게 벌이며 우리 두 사람에게 검사를 쓰게 했고, 대회에서 비판하고 작은 회의에서 투쟁했는데, 모든 감방이 일을 하지 않으면서 전문적으로 우리에 대해 비판대회를 열었다. 우리 두 사람은 일을 하지 않으면 점수를 얻지 못했지만 다른 사람은 오히려 우리들에 대한 비판대회를 여는 것을 통해 만점을 따냈다. 이런 유형의 일이 너무 많았다. 두 차례 답안지를 쓴 적이 있는데, 모두 요구에 부합되지 않자 내 정수리를 필사적으로 한번 구타하며 “누가 당신더러 말하라고 했는가!”라고 했다. 내가 누구에게 억울함을 호소하겠는가? 감옥에 들어간 자체가 바로 억울함인데, 들어오면 도리를 따질 곳이 없다. 감옥에서는 죄수를 이용해 파룬궁수련생을 괴롭히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대장인 그녀들은 아주 적게 나서면서 모두 다른 죄수들을 시켜 자기들 대신에 우리를 괴롭히게 했다. 우리에게는 조금도 말할 권리가 없었고, 제때에 물도 마시지 못해 대변이 굳어져 일주일이 한 번밖에 보지 못했으며, 또 손으로 후벼 파내야 했는데 극히 고통스러웠다. 겨울에 목욕할 때 뜨거운 물을 주지 않았으며, 준다 해도 한 바가지만 줘서 냉수와 섞으면 약간의 따스함도 없었다.

나는 내성적이고 담이 작아 정신적으로 무거운 압력을 받아 저녁에 잠을 이룰 수 없었고, 낮에 밥을 먹을 수 없었다. 심장도 차츰 나빠지고 머리카락도 많이 빠졌다.

문장발표: 2011년 02월 24일
문장분류: 박해진상
원문위치: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1/2/24/北京师范大学校医王安琳遭迫害经历-23674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