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허난보도) 허난성(河南省) 루양현(汝陽縣) 위안샹판(袁相凡) 여사는 파룬궁을 수련해서 심신에 이로움을 얻었다. 1999년 7월에 중공(중국 공산당)이 파룬궁을 박해 한 후, 그녀는 베이징으로 청원하러 갔다는 이유로 납치돼 루양현 구치소, 세뇌반, 뤄양시 수용소 등에서 체벌학대를 당했다. 2001년 양력 1월에 그녀는 정저우시 18리허(十八裏河) 여자노동교양소에 납치돼 혹독한 학대와 박해성 음식물주입을 당해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친정집 가족이 노동교양소에서 업어서 내온 후 2003년 8월 9일에 두 미성년인 딸을 남기고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위안샹판 여사는 1966년에 출생했으며, 허난성 루양현 청관진(城關鎭) 청관둥제(城關東街)에서 살았으며 직업 배우였다. 그녀는 1997년에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수련하고 오래지 않아 원래 앓던 여러 가지 질병이 다 나아 온몸이 가벼움을 느꼈다. 더욱이 마음씨가 선량하게 된 그녀는 法輪大法(파룬따파)를 굳게 믿고 확고하게 ‘眞ㆍ善ㆍ忍’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었다.
1999년 7월에 대법이 중공(중국 공산당) 당국에게 온 천지를 뒤덮을 듯한 비방과 박해를 당하자 그녀는 파룬궁수련생들과 함께 대법을 위해 공정함을 돌려오고 사부님께의 결백하심을 돌려오기 위해 베이징으로 갔다. 당시 뤄양현 정법위(정치법률위원회), 공안에 의해 뤄양현 구치소, 세뇌반, 뤄양시 수용소 등에 감금돼 학대를 당했다. 이 기간에 ‘610(전문적으로 파룬궁을 박해하는 불법조직)’, 구치소 및 바오자(包夾-감시자) 인원은 그녀에게 꿇기 고문과 세워두는 고문(한쪽 다리로만 세워두기), 쇠 광주리 고문(鐵座笸-손발을 심문 의자에 묶어놓고 꼼짝하지 못하게 하는 것임)을 가하며 5일 밤낮을 앉혀놓았다. 그리고 밥 먹고 대소변 보고 잠을 자는 등 전부를 윗면에 묶여진 채로 해야 해서 같은 감방에 불법감금당한 파룬궁수련생이 밥을 먹여주었다. 사악한 무리들은 여전히 그녀의 남편에게 그녀와 이혼(그녀의 남편은 교사임)하라고 위협하고 선동했다. 이렇게 잔혹한 육체와 정신적 학대마저도 그녀로 하여금 ‘眞ㆍ善ㆍ忍’에 대한 신앙을 포기하게끔 하지는 못했다.
악인은 그녀에 대해 속수무책이 되자 일부러 그녀를 며칠 집에 돌려보냈다. ‘610’과 당시의 뤄양현 정보과에서는 그녀가 다시 청원하러 갈까봐 두려워, 2001년 음력 1월 7일에 정보과 과장 리바오현(李保現)은 어떠한 법률수속도 없이 위안샹판 여사를 속여 공안국 문어귀로 데려가서 강제로 정저우시(鄭州市) 18리허 여자노동교양소로 납치해 보냈다. 노동교양소에서 위안샹판 여사는 여전히 세뇌전향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마약복용죄수와 바오자에게 혹독한 구타를 당했다. 또 그녀의 머리를 틀어잡고 벽에 부딪혀 온종일 몸은 상처투성이 되었다. 그녀는 단식으로 항의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3개월 동안 단식을 진행했는데, 매번 모두 7~8명의 사람들이 그녀에게 야만적인 음식물주입을 해서 그녀의 앞니는 비틀려 변형되었다. 그녀가 피를 토하고 온몸에 부종이 생기고 하지가 마비되어 사경을 헤맬 때까지 줄곧 괴롭혔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노동교양소는 여전히 사람을 풀어주지 않고 또 가족에게 3천 위안의 치료비를 가져오라고 했다. 집에서는 협조하지 않았고 10일이 지난 후에야 위안샹판의 친정집 가족이 그녀를 노동교양소에서 업어 내왔다.
구치소에서 노동교양소까지 차례로 2년 넘는 상해를 입은 것 때문에 그녀의 몸은 극한을 감당하는 데 이르렀다. 결국 2003년 8월 9일에 미성년인 두 딸을 남기고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위안샹판 여사의 친정집 부모와 오빠 그리고 형님은 모두 수련을 하며, 모두 노동교양 감금을 당한 적이 있다. 그리고 오빠와 형님도 교사이지만 해고당했다.
문장발표: 2011년 02월 10일
문장분류: 박해진상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1/2/10/河南汝阳县袁相凡女士生前遭受的迫害-23609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