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량오닝 푸순 여교사 웨이밍화, 박해로 억울하게 사망

[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랴오닝보도) 랴오닝(遼寧)성 푸순(撫順)시 칭위안(清原)현 제1중등학교 교사 웨이밍화(魏明華)는 2010년 8월 21일에 원래 퇴직해야 할 연령이었다. 그러나 칭위안1중(清原一中)학교와 현 교육위원회에서는 그녀가 파룬따파(法輪大法) ‘진선인(眞善忍)’ 수련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퇴직수속을 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연공을 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쓰지 않았다는 구실로 월급 지급을 중지하고 출근도 시키지 않았다. 지난 해 난방비를 내지 않았기에 난방공급회사에서는 난방을 중지했다.

10여 년 동안의 박해는 이 여교사로 하여금 심신이 몹시 지치게 했고 무거운 짐을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렵게 했다. 2010년 7월 3일 오후 억울하게 일찍 세상을 떠났는데 당시 나이 겨우 56세였다.

웨이밍화의 남편 리원쑹(李文松)은 10여 년 이래 누계로 7년 넘게 불법 감금을 당했다. 박해가 발생한 초기에 2년이란 불법 강제노동을 당하고, 2003년 9월에 또 6년 불법 판결을 선고 받고 여러 경로를 거쳐 선양(沈陽) 다베이(大北)감옥, 랴오양(遼陽) 화쯔(鏵子)감옥, 다롄시(大連市)감옥에 감금되어 학대와 강제노동을 당했다. 석방 후 불법으로 해고 당했다.

웨이밍화는 1955년 8월 21일에 태어났고, 푸순 시 칭위안 현 제1중등학교 교사이다. 웨이밍화는 1996년에 파룬따파 ‘진선인’을 수련한 뒤, 몸이 건강해지고 가정도 화목해졌으며 학생에 대해서 더욱 관심을 가졌다. 그녀가 가르치는 학생들의 학습성적이 두드러지게 올라갔으며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보편적으로 공인하는 좋은 교사이다. 그녀는 강의를 잘했을 뿐만 아니라, 또 학생에 대해 인내심이 있었다. 많은 학부모들은 모두 “아이를 웨이선생님께 맡기면 우리는 모두 마음을 놓습니다.”라고 말했다.

1. 청원하러 가서 납치, 갈취를 당하다

1999년 7월 20일, 사악한 중국 공산당(이하 중공) 장쩌민 정치 깡패집단은 ‘진선인’을 수련하는 선량한 민중에 대해 박해를 발동하고, 매체를 통제해 온 천지를 뒤덮을 듯이 파룬궁에 대한 유언비어를 날조했으며, 중국 대륙 민중을 핍박하여 파룬궁을 연마하지 않는다는 태도를 표명하게 했다. 심신에 수혜를 얻은 파룬궁 수련생으로서 웨이밍화는 파룬궁은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을 닦고 선을 행하게 가르치며, 어떻게 좋은 사람으로 되는지를 가르치는 공법임을 알고 있는데, 이렇게 좋은 공법을 왜 수련하지 못하게 하는지, 왜 이렇게 유언비어를 날조하고 모독하는지, 중공 당국의 일 처리하는 방법에 대해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서 1999년 7월 28일 웨이밍화는 베이징으로 청원하러 갔다. 국민의 합법적인 권익을 이행해, 베이징 관련 부서에 가서 파룬궁의 진실한 상황을 설명했다.

베이징에서 돌아온 후, 웨이밍화는 칭위안1중학교 교장 비수화(畢淑華)와 중공의 사악한 당서기 푸웨이(付偉)에게서 한바탕 질책을 받았다. 그들은 또 즉시 교육국의 규율검사 서기 스바오옌(石寳硯)에게 통지했다. 스바오옌은 떠나기 전에, 칭위안1중학교 교장 비수화에게 그녀들에게 세뇌반을 조직해 준다고 알려주었다. 당시 웨이밍화의 남편은 파룬궁을 수련해 구치소에 불법 감금을 당하고 있었으며 집에 있는 노인과 아이는 보살펴 줄 사람이 없었다. 웨이밍화는 세뇌반으로 납치되어 수련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세뇌반을 조직한 15일 동안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먹고 자는 것도 모두 교장, 주임 등이 지키고 있었는데 인신자유가 조금도 없었으며 게다가 1개월 월급과 장려금 마저 갈취 당했다. 학교에서는 보증금 2천 위안 (당시 그녀들에게 준 것은 웨이밍화의 아이의 이름으로 된 저축 통장임)을 받아내고 교육위원회에도 보증금 2천 위안(그녀들을 강박해 이후 베이징으로 청원하러 가지 않는다는 보증을 서도록 했음)을 받았다. 웨이밍화는 여러 차례 교육위원회로 가서 불법으로 받은 보증금을 되돌려 달라고 요구했다. 교육위원회의 규율검사 서기 훙자오천(洪兆臣)은 줄곧 파룬궁에 대한 박해를 주관했다. 웨이밍화는 여러 차례 그를 찾았지만 그는 주기는 커녕 또 이러한 돈이 없다고 말했다. 어떤 때에는 또 “쪽지를 써서 상부에 바치라.”고 말했다. 줄곧 지금까지 이 돈을 웨이밍화의 가족에게 돌려주지 않고 있다.

2. 밤중에 경찰이 집안에 뛰어들어 납치하고, 남편은 강제노동을 당하다

2000년 10월 25일 밤 10시 10분경, 칭위안 현 공안국 경찰 쉬진룽(徐金榮), 멍링광(孟令光) 등은 갑자기 웨이밍화의 집에 뛰어들어 불법 가택수사를 했다. 당시 술을 마신 이 세 명의 경찰은 웨이밍화의 집 문을 두드려 부수었다.(이웃에서도 문을 부수는 소리를 들었음) 아이가 문을 열어 주었다. 세 명의 경찰은 흉악하게 집안에 뛰어든 후, 구두를 신은 채로 침실 안에 뛰어들어 도처를 마구 뒤지기 시작했다. 리원쑹은 그들이 도대체 무얼 하려는 것인지를 물었다. 그들은 파룬궁 자료를 수색한다고 말했다. 그 중 한 경찰은 또 바닥을 비틀어 열었다. 다 뒤진 후 즉시 리원쑹의 집 전화로 현 공안국 부국장 샤오룽(肖龍)에게 보고했다. 그 후 리원쑹과 아내를 함께 납치했다.

소식에 따르면 그날 저녁 11시가 넘어서 경찰은 불법적으로 가택 수사를 한 과정에 서명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웨이밍화를 현 공안국으로 납치했다. 당시 밤 12시가 거의 다 되어서야 서명을 끝냈다. 경찰은 또 그녀를 칭위안 현 다사거우(大沙溝)구치소로 납치해 불법 감금을 했다. 납치 당한 이튿날, 현 공안국에서는 웨이밍화의 아이가 다니고 있는 학교에 통지해 아이를 강박해 현 공안국으로 가서 검증하도록 했다.

웨이밍화는 36일 동안 불법 감금당했다. 그녀의 남편 리원쑹은 칭위안 다사거우 구치소에 30여 일 동안 불법으로 갇혔으며 사악한 중국 공산당에 의해 집안에 파룬궁 서적 등이 있다는 구실로 2년이라는 불법 강제노동을 당했다.

3. 수업하다가 납치, 강제노동을 당하다

2003년 5월 19일 오후 3시 15분, 한창 학생들에게 수업하던 웨이밍화는 교장 비수화에 의해 수업이 중단되고 교장 사무실로 불려 갔다. 당시 푸순시 공안1처의 두 명의 경찰과 칭위안 현 싱룽(興隆)파출소의 경찰 주중화(朱忠華) 등 총 세 사람이 현장에 있었다. 그 중 싱룽파출소의 한 사람은 웨이밍화를 호출해 일들을 좀 묻겠다고 말했다. 경찰은 웨이밍화에게 “수업을 해도 안 된다. 가야 한다.”고 말했다.

당시 웨이밍화는 교실 안에 놓아둔 강의할 때 사용하던 책을 가져오려 했다. 웨이밍화가 막 두 발자국을 뗐을 때 두 명의 경찰이 다가와서 웨이밍화를 납치해 밖으로 끌고 갔다. 당시 신마저 끌려 벗겨졌으며 그녀의 머리카락도 흐트러졌다. 3층(교장실)에서 줄곧 학교 운동장까지 끌려갔는데 옷의 단추도 당겨져 떨어지고 바지, 양말, 발목까지도 모두 마찰로 상했다. 학교의 선생님들과 학생들은 직접 이 일체 사악한 장면을 목격했다.

당시 칭위안1중학교 교장 비수화(지금은 퇴직했음), 서기 푸웨이, 부교장 리궈쥔(李國軍) 세 사람은 푸순 공안1처의 경찰에게 협조해 웨이밍화를 들고 가서 소형차 안에 던졌다. 기사는 웨이밍화에게 깡패들만이 하는 말로 욕하면서 “당신이 선생이 아니었다면 곧 당신에게 수갑을 채워야 했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내가 당신을 죽도록 혼내주겠다.”고 말했다.

이렇게 저녁 8시에 웨이밍화는 푸순시 공안1처로 납치돼 박해를 당했다. 같은 날, 푸순 공안1처의 사악한 경찰은 푸순 전력(電力)공사 칭위안 안장처(安裝處-남편 리원쑹의 직장임)로 가서 그녀의 남편 리원쑹을 직장으로 유인해와 불법으로 납치했으며 그 후 6년이란 불법판결을 내렸다.

며칠이 지나도록 푸순 공안1처에서는 웨이밍화로부터 무슨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지만 웨이밍화에게 불법 강제노동을 선고했다. 5월 26일과 28일에 두 차례 랴오닝(遼寧)성 마싼자(馬三家) 노동수용소(教養院)로 보냈다가 신체검사에서 불합격을 받아 전부 수감 거부를 당했다. 웨이밍화는 2003년 5월 30일에 병 보석으로 풀려나 치료를 받으러 집으로 돌아왔다. 당시 푸순 현 공안1처에서는 각종 항목의 비용을 불법으로 받았는데 보증금 6천 위안, 관리 비용 1천 1백 25위안, 10일 동안의 급식비 1백 30위안, 신체 검사비 4백 위안이다.

4. 남편은 고문당하고 6년이란 불법 판결을 선고 받다

2003년 5월 19일 오후 1시가 넘어서 푸순 국보대대는 칭위안 공안국과 결탁해 리원쑹의 직장 칭위안 전력안장처로 가서, 직장 서기 차오즈수(曹志書)로 하여금 리원쑹에게 전화를 걸어(사실 그가 이렇게 함은 사악한 경찰에게 협조해 파룬따파 수련생을 모함하는 것임) 즉시 직장에 한번 오도록 했다. 리원쑹이 직장에 왔을 때 6, 7명의 사람들이 사무실에 앉아 있었는데 푸순시 국보대대(푸순 공안1처)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리원쑹을 현 공안국으로 가게 했는데 리원쑹은 안 간다고 말하자, 직장 아래층에서 이들 사악한 경찰들은 벌떼처럼 덤벼들어 리원쑹을 마구 두들겨 팼으며 안간힘을 다 써서 그에게 수갑을 채웠다. 당시 둘러싸고 구경한 사람들은 모두 그들의 죄악을 목격했다.

리원쑹과 기타 납치당한 파룬궁수련생들은 칭위안현 공안국에서 직접 푸순의 작은 흰색 건물(공안1처)로 납치당했다. 그날 저녁 푸순 공안1처의 사악한 경찰은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했다. 세 경찰은 함께 리원쑹을 박해했는데, 성이 하오(郝)가란 사람과 텅웨(騰躍)라고 부르는 사람이 뺨을 혹독하게 때렸다. 왼쪽 귀는 당시 맞아서 오랜 시간 청력을 잃었는데 여태껏 귀에 여전히 바람이 새는 현상이 있으며 청력이 나빠졌다.

그 달 마지막 주 일요일 오후, 네 명의 사악한 경찰은 리원쑹을 큰 마당으로 끌어갔다. 마치 금방 손질한 방안처럼 보도블록과 벽 위의 시멘트도 아직 마르지 않았다. 손에 수갑을 채우고 족쇄를 채웠으며 머리 위에는 실자루를 씌워 리원쑹을 땅 위에 눌러놓고는 머리 위에 의자를 더 보태어 그를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당시 네 명의 악한 경찰은 바로 그들 내부에서 늘 ‘공작광(工作狂)’으로 불리며 별명이 ‘독일의 게슈타포’인 관융(關勇), 류핑허(劉平和), 장타오(張濤)이고 또 이름 모를 젊은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리원쑹의 가슴, 양 옆구리, 아랫배, 소변보는 부위, 허벅지 안쪽을 사납게 마구 구타했는데 줄곧 그가 기절할 때까지 때렸다. 리원쑹이 깨어났을 때 그들은 곧 대답을 강요했다. 그 류핑(劉平)이라고 부르는 자는 그에게 호랑이 의자에 앉히고 무거운 물건으로 리원쑹의 무릎과 아랫다리를 내리 눌렀는데 손으로 들고 비틀면서 발 밑에 벽돌을 받쳤으며 리원쑹을 고문으로 초 죽음이 되게 했다. 그들은 리원쑹이 고문으로 죽을까 봐 책임을 감당하기 두려워 또 유서를 한 부 쓰고는 리원쑹의 앞에서 들고 왔다갔다하면서 “당신이 만약 사망이라도 하면 당신이 스스로 살고 싶지 않았다고 말할 거다.”라고 말하고는 그들이 다 써놓은 유서에 강제로 리원쑹의 지장을 내리누르게 했다. 그리고 또 리원쑹에게 “만약 당신이 죽으면 곧 직장과 가족에게 당신이 자살했다고 통지해 인터넷에 올리겠다.”고 말했다.

2003년 8월 25일 칭위안 현 검찰원의 관련 인원은 직권을 남용해 법을 어기고 직책을 더럽혀 죄 없는 사람인 줄 뻔히 알면서도 소추를 진행하여 리원쑹을 불법으로 기소했다. 모함에 참가한 칭위안현 검찰원 인원으로는 판둥펑(範東鳳), 쉬칭원(徐清文)이다. 9월 23일 칭위안현 법원은 리원쑹에 대해 불법 법정 심리와 판결을 내렸다. 재판 중에서 고의적으로 사실과 법률을 무시하고 재판을 진행하여 리원쑹에게 6년이란 불법 판결을 내렸다.

5. 월급 지급을 중지 당하고 박해는 지속되고 있다.

웨이밍화는 2003년 5월 30일에 병보석으로 풀려나 치료를 받으러 집으로 돌아왔지만 그녀에 대한 박해는 끝나지는 않았다. 칭위안 만족자치현(滿族自治縣) 감찰국(監察局)에서는 1년 동안 직무에서 해고처분을 하였다. 이로부터 칭위안1중에서는 웨이밍화가 마땅히 얻어야 할 월급 지급 및 일체 비용을 중지했다.

당시 남편이 불법 감금을 당했던 이유로 웨이밍화는 경제적, 정신적 압력을 감당하고 있었다. 웨이밍화는 여러 차례 일자리 문제로 당시의 교육 위원회 주임 쑨중샤오(孫忠孝)와 규율 검사 서기 훙자오천(洪兆臣)을 찾았다. 그들은 그들이 처리한 일이 아니라고 말하고는 상부를 찾아야 하며 또 610이 동의해야 한다는 등등으로 미루면서 해결해 주지 않았다.

리원쑹은 여러 손을 거쳐 선양 다베이감옥, 랴오양 화쯔감옥, 다롄시감옥에 감금되어 학대와 노동을 당했다. 2009년 5월 19일, 불법 감금 기한이 만기되어 석방 될 때, 칭양현 정법위와 ‘610’은 감옥과 내통해서 또 리원쑹을 모함해 푸순 푸타이 산좡(撫臺山莊)세뇌반으로 보내려 했다. 리원쑹이 석방되기 전 날, 그들은 사람을 파견해 감옥에 보내어 직접 리원쑹을 세뇌반에 보내려고 시도했다. 친구와 친척 및 수련생들의 강력한 반대로 일부 곡절을 거쳐 사악한 박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웨이밍화의 요절은 가족에게 극심한 고통을 가져왔으며 그녀의 노모는 직접 심신에 더욱 큰 상해를 입었다.

웨이밍화의 요절은 그녀에 대한 박해에 참여한 사람 칭위안현 교육위원회 쑨중샤오(孫忠孝), 훙자오천(洪兆臣)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당신들에게 물어보자. 당신들이 웨이밍화를 곤란하게 하고 박해한 각종 행위는 누가 지시하고 어느 문건에 따라 집행했는가? 이 일체는 모두 당신들이 박해에 참여한 죄이다. 몇 년 동안 당신들은 이렇게 박해에 참여해 또 무엇을 얻었는가? 사악한 중공은 비열한 수단으로 정부기관의 사람들을 위협해 법을 알면서도 법을 위반하게 하고, 법을 집행하는 사람이 범법 행위를 하게 했으며, 손에 있는 권리를 이용해 법을 지키는 좋은 국민을 박해했다. 당신들이 이렇게 공산당을 도와 나쁜 짓을 해 사악한 졸개로 되어 잔혹하게 본 나라의 선량한 민중을 탄압했는데 천리가 용납하지 않는다! 만약 당신들이 지금 자신을 위해 속죄할 이 기회를 아끼지 않는다면, 조만간에 법률의 엄중한 징벌을 받게 될 것이다.

문장발표: 2010년 09월 19일

문장위치: 박해진상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0/9/19/22983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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