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후커링(胡克玲)
매번 밍후이왕에서 파룬궁 수련생이 정신병원에 감금, 박해당하는 사례를 보게 될 때마다 나는 사는 게 죽느니만 못한 나날들을 생각하게 된다. 나는 라이시시 실험중학교 우수교원이다. 파룬궁을 수련하는 것으로 정신병원에 납치, 독주사를 주입 당했다. 건강했던 나는 거의 정신병 환자가 되어갔고 손가락 관절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붓고 변형되어 있다.
독주사를 주입당한 후 후유증: 크게 부은 후커링의 손가락 관절
나는 후커링(46세)이라 하며 전에 산둥성 칭다오 라이시시 실험중학교 교사였다. 임직기간 특히 2000년 이후 우리 학교 교사는 학교 지도자를 찾아가 자신의 자녀들을 내가 맡은 학급으로 옮겨 달라 요청했다. 때문에 내가 맡은 학급은 교사의 자녀가 아주 많았으며 좋은 관계를 많이 맺었다. 어떤 가장은 몇 사람을 통하여 자녀를 내가 맡은 학급으로 옮기려했다. 2005년 12월 나는 파룬궁 수련으로 불법으로 라이시 구류소에 8일간 감금당했다. 많은 학생과 학부모는 자발적으로 학교 지도자와 공안 지도자를 찾아가 나를 석방해줄 것을 요구했다. 어떤 학부모는 여러 차례 전화나 직접 학교 선생과 지도자를 찾아 나를 학교에 복직시키려했다.
라이시 제2병원 정신병과로 납치
2002년 나는 박해를 피해 떠돌이 생활을 했다. 9월 23일 나와 라이시시 난란진 파룬궁수련생 멍페이화는 산둥 지난 여자감옥에 감금당한 그녀의 딸을 만나러 갔다. 그녀의 딸은 23세이며 파룬따파 수련을 견지한다는 이유로 불법으로 5년형을 선고받았다. 지난 기차역에서 우리는 승무경찰의 조사를 당했다. 그는 우리가 파룬궁 수련생임을 알고 불법으로 감금했다.
이튿날 오후 라이시 공안, 라이시 실험 중학교는 사람을 파견하여 우리를 끌고 갔으며 우리는 칭다오로 파출소에 감금당했다. 그 속에는 실험중학교 사무실 주임 마쉐쥔(马学军)과 그때 라이시 공안국 정보과장이었던 사오쥔(邵军)이 있었다. 이튿날 멍페이화는 라이시 허터우뎬 파출소에서 집에 돌려보내졌다. 칭다오로 파출소, 라이시 실험 중학교, 라이시 ‘610’(전문적으로 파룬궁을 박해하는 기구)은 또 작정하여 나를 쯔보왕춘 노동교양소로 보냈다. 나에게 불법으로 노동교양 판결을 내리려했다. 그때 참여한 사람은 칭다오로 파출소 자오신룽(赵欣荣, 여), 610 부주임 딩후이쥔(丁会军), 실험중학교 사무실 주임 마쉐쥔과 기사였다. 신체검사에서 불합격되어 노동교양소는 받기를 거절했다. 하지만 이들은 포기하지 않고 나를 또 왕춘 세뇌반에 납치했다. 세뇌반에서도 거절했다. 이러한 정황에서 그들은 또 나를 라이시 제2병원 정신병원과로 납치했다. 마쉐쥔과 딩후이쥔은 나를 거의 들다시피 하여 4층 정신과로 보냈다. 그때 마쉐쥔은 불법으로 나 대신 서명했다.
정신과 주임은 쭤원화(左文华, 여, 40여세)였다. 내가 그들의 박해에 협조하지 않자 나를 침대에 묶어놓고 이름 모를 약물을 주사했다. 그 결과 흐릿한 정신 상태에서 온 밤을 잤다. 그 당시 나를 박해한 주치의는 장원화(张文华, 여, 50여세)이다.
강박적으로 약을 먹이고 이름 모를 약물을 주사
이튿날부터 그들은 매일 혈압을 측정하고 나에게 강제로 약을 먹였다. 내가 먹지 않자 남자간호사 쉬루이챵(徐瑞强)은 나를 침대에 묶어놓고 억지로 약물을 코로 주입했다. 약물은 얼굴과 머리카락에 뿜어졌다.
며칠에 한 번씩 그들은 나에게 일종 이름 모를 약물을 주사했다. 내가 협조하지 않자 남자간호사 왕보(王波)는 4, 5명의 정신병 환자를 불러다 야만적으로 나를 땅에 내리누르게 했다. 왕보는 정신병 환자를 사주하여 나의 허리띠를 끌어내리고 바지를 벗겼다. 그런 후 나에게 약물을 주입했다. 왕보는 늘 정신병 환자를 묶는 긴 천으로 나의 팔을 묶어 놓아 활동하지 못하게 했다.
나는 단식으로 이러한 박해에 항의했다. 그러자 그들은 음식물을 강제로 주입했다. 그들은 나의 팔다리를 침대에 묶고 고무호스를 코에 삽입한 후 음식물을 주입했다. 남자간호사 자오중(赵中)과 여자간호사 후쉐옌(胡雪艳)은 나를 고통에 시달리게 하려고 호스를 코에 삽입한 후 고의적으로 여러 차례 밀어 넣었다 뺐다 했다. 나는 구토가 나고 몹시 괴로웠다. 음식물 주입이 끝나서도 그들은 호스를 코에서 빼내지 않아 침을 삼키기 못했고 삼키기만 하면 구역질이 났다. 내가 겨우 호스를 뽑아내면 그들은 다시 거칠게 삽입했다. 특히 굵은 호스를 찾아서 삽입했다. 자오중은 음흉하게 말했다. ‘당신을 다스리는데 방법은 많다. 바로 당신을 괴롭히려는 것이다.’ 공기 중에 나의 위액의 냄새, 조금도 어쩔 수 없는 상태, 흰 가운을 입은 간호사들의 잔인한 웃음 등 모든 것이 함께 어우러져 지옥과 같은 장면을 만들었다. 이것은 박해자의 사악함을 증명하는 것이다.
시달림 속에서 정신병 환자같이 되다
이곳에 감금, 박해당하는 3개월 동안 두 언니가 나를 보러 왔다. 언니들은 나를 보자마자 울었다. 전에 총명하고 영리하던 사람이 현재는 어찌하여 멍청이가 되었는가! 이때의 나는 급하게 움직이면 설 수 없었고 서있어도 다리로 지탱할 수 없었다. 늘 선 자리걸음으로 걷고 있었으며 팔과 손은 약간 떨고 있었다. 언니는 내가 추워서 그런 거냐고 물었다. ‘이곳은 아주 추운 것이 아니냐?’ 내가 말했다. ‘춥지 않아요. 스팀이 있어요.’ 언니는 듣고 더욱 심하게 울었다. 반시간 만남에 두 언니가 운 시간이 내가 말한 시간보다 더 많았다. 일주일이 지나서 언니는 솜옷을 나에게 보내왔다. 언니는 내가 때로 떨고 있는 것은 추워서가 아님을 몰랐다. 신경을 파괴하는 약물의 직접적인 작용임을 어찌 알 수 있었겠는가.
그 이후 언니와 형부는 끊임없이 ‘610’에 찾아가 나의 석방을 요구했다. 나중에 언니는 울면서 나에게 말했다. ‘너를 집에 돌아오게 하고 자유롭게 하고 더는 박해를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 나와 너 형부는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모른다. 얼마나 많은 좋은 말을 하고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친인들의 지속적인 구출로 나는 마침내 건강한 사람을 정신병 환자로 만든 ‘정신병원’을 떠났다. 나의 친인들은 부득불 내가 심한 박해를 당하면서 사용된 비싼 의료비를 감당해야 했다. 2002년 섣달 27일 언니와 형부는 나를 제2병원에서 언니네 집으로 데려왔다. 이때의 나는 이미 사지가 굳어졌고 지각이 마비됐으며 시력이 흐릿하고 사물을 볼 때 겹쳐 보였다. 얼굴은 심하게 부었고 눈길은 멍청했으며 전신을 끊임없이 떨고 있었다. 4달 동안 생리가 없었으며 마음으로 말하기 힘든 괴로움이 있었다.
2003년 정월 나는 학교에 복직됐다. 나의 모습을 본 동료교사들은 나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당신은 모르지요. 당신의 지금의 모습은 정신병환자입니다…’ 그 일 년 간 겨울에서 여름이 되기까지 반년간의 회복기간이 있었다. 나의 다리는 여전히 부어서 신을 신을 수 없었고 손가락 관절은 지금까지 여전히 붓고 변형되어 있다.
문장발표: 2010년 7월 2일
문장분류: 밍후이주보 169호 > 시련의길
문장위치: http://zhoubao.minghui.org/mh/haizb/169/A06/index.html#7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