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후이왕] (밍후이통신원 허베이성 보도) 허베이(河北) 탕강2제강공장(唐鋼二煉鋼廠)의 직원 퉁란구이(佟蘭貴.남)는 파룬궁을 수련했다는 이유로 장시기 탕강 중공 사당인원의 박해를 당했다. 장시기 커다란 압력하에, 2005년 10월 26일에 갑자기 뇌출혈이 발작해 생활도 스스로 할 수 없었다. 결국 2007년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는데 당시 나이 겨우 44세였다.
퉁란구이는 1999년 7월 파룬궁을 위해 공정한 말을 하기 위해 베이징으로 청원하러 가다가, 펑룬(豊潤) 통행세징수소에서 가로막혀 돌아왔으며, 공장 공안처에 줄곧 9월 5일까지 불법감금을 당했다. 벗어난 다음 재차 베이징에 정황을 반영하러 갔다. 10일 후, 현지 경찰에 의해 공장으로 납치돼 왔다.
9월 하순, 중공 사당서기 쉬안웨이인(軒維印)과 공장장 왕즈쥔(王志軍)은 퉁란구이와 기타 본 직장의 12명 파룬궁수련생들을 카이핑구(開平區) 뉘즈자이향(女織寨鄕)에 위치한 탕강 기술학교로 납치해 불법 감금했다. 이곳은 외진 곳에 위치해 버스가 다니지 않았다. 쉬안웨이는 몇 십명 사람들을 배치해 세 개 반으로 나눠 24시간 번갈아 감시했다. 반 마다 생산 현장 지부서기가 조장을 맡았으며, 리샤오천(李曉臣), 우루민(武汝敏), 징푸챵(經福強) 등이 그들을 핍박해 사상 보고를 쓰게 했다. 베이징에 청원하러 갔던 사람에 대해서는 더욱 특별하게 ‘배려’했는데 사람마다 한 개 방안에 넣고 날마다 수갑을 채웠으며 한 끝은 침대위에 채웠다. 그리고 방안을 떠나지 못하게 하고 다른 사람과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매 방안은 모두 미리 쇠 난간을 잘 땜질해 놓았으며 창문은 봉쇄되고 빛이 들어오지 않았다. 복도 대문은 철제 난간문인데 24시간 잠궜으며 특수한 상황이 없으면 열지 않았다. 퉁란궁이가 여전히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그 후 또 구치소에 보내 더욱 심각한 박해를 당하게 했다. 12월 경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공장에서는 그에게 대과처분(大過處分-큰 과오가 있다는 처분)이 있다고 기록하고 퇴직금(생활비)을 주었다.
2000년 여름, 퉁란구이와 몇 명 파룬궁수련생들이 잠깐 함께 있다가 고발 당했다. 사당서기 쉬안웨이인에 의해 펑난(豊南)구치소로 납치돼 불법감금 당했다. 구치소에서 퉁란구이는 죄수에게 구타당해 치아가 한 대 빠졌으며 온 입은 피투성이 됐다. 10월 집으로 돌아온 후, 공장에서는 그를 해고하고는 오히려 그가 공장을 떠나지 못하게 했으며 공장 내에서 임시직으로 일하게 했다.
2000년 12월 19일, 사당서기 류쭝라이(劉宗來)는 그를 강제로 탕산(唐山) 방직(紡織)대학세뇌반으로 보냈다. 그가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무리한 박해를 저지했기에, 2001년 1월에 또 구치소로 납치돼 박해를 당했다. 1개월 후 또 세뇌반으로 돌려보내 줄곧 5월까지 감금해서야 집으로 돌려보냈다.
공장으로 돌아와 작업 임무는 변함이 없었지만 임시직 월급만 지불해 줄 뿐이다.
이 몇 년 동안 정신과 육체적 학대와 경제적인 파탄을 거쳐, 퉁란구이는 이미 생활형편이 매우 어렵게 됐는데 아이의 학비마저도 도처에서 돈을 빌려야 했다. 아내도 핍박을 못이겨 이혼을 제기했다. 지금껏 눈물을 흘린 적이 없는 퉁란구이는 이 때 도리어 간장이 녹고 폐부가 찢어지는 듯한 울음소리를 터뜨렸다. 장시기 극심한 정신적 압력하에 2005년 10월 26일, 한창 일하고 있던 퉁란구이는 갑자기 뇌출혈이 발작해 탕강병원 응급실에 입원했다. 응급실에서 2개월 치료를 받고 총 의료비 10여 만 위안을 썼다. 이때 류쭝라이와 왕즈쥔은 여전히 박해를 그만두지 않았는데 그에게 파룬궁을 수련하지 않는다는 보증서 위에 서명하라고 핍박했으며 그렇지 않을 경우 의료비를 결산해 주지 않겠다고 했다.
2006년 1월 퉁란구이는 퇴원한 다음 줄곧 스스로 혼자 생활하지 못했다. 70여세 노모는 대소변을 받아 내면서 그를 보살펴 주었는데 늘 몰래 눈물을 흘렸다. 1년 넘게 고통을 겪은 다음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문장발표: 2010년 08월 01일
문장분류: 박해진상
문장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0/8/1/227797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