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후이왕](밍후이통신원 헤이룽장 보도) 동료와 이웃들이 이구동성으로 칭찬하던, 우아하고 다재다능하던 처녀가 박해를 당한 지 약 11년이 되었다. 잔양은 매일 고통 속에서 시달리고 있다. 그녀는 어머니와 일년 내내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으며, 집이 있어도 갈 수 없다. 잔양(戰陽)은 1999년에 중공 무리들의 파룬궁 박해 후 정신분열이 되었다.
박해 전 잔양
잔양은 1971년 5월생 이다. 전문대학 출신이고, 의류 디자인과 침구 등 두 가지 일을 배웠다. 집은 하얼빈(哈爾濱)시 난강(南崗) 구역 쉐푸루(學府路) 헤이룽장 대학(黑龍江大學) 가족아파트이다. 1995년 10월 중순, 부모를 따라 파룬따파를 수련하였다. 수련 후 앓던 선천성 심장병, 류머티즘, 부인과 병(婦科病)이 모두 사라졌다. 춘잔양(春戰陽)은 1996년 하얼빈 훙타이양(紅太陽) 보건품 집단회사에 지원하여 상품광고, 출납 등의 일을 한 적이 있다. 3년 넘게 아주 착실하게 근무를 하였다. 직장의 핵심직원 이었고, 여러 번 우수 직원에 선정되었다.
수련 후 잔양의 마음은 온종일 기쁨으로 가득했다. 인간이 존재하는 진정한 의의와 생명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성실하고 행복했던 잔양은 10년 동안 이유 없는 박해를 감당하고 있으며, 고통 속에서 시달리며 정신이 바르게 돌아오는 날을 고대하고 있다…….
성정부로 청원하러 갔다가 중점 박해대상이 되다
1999년 7월 22일, 선량한 사람들을 박해한 원흉 장씨 집단은 국가의 명의로 파룬궁과 파룬궁 수련자에 대해 전면적인 탄압을 진행 하였다. 잔양은 정부와 각급 간부들에게 파룬궁이 민족, 사회, 가정에 아주 좋은 점이 있으므로 박해를 받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실증하기 위해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성정부로 청원을 갔다가 불법으로 온종일 갇혔다. 그들은 시에서 비교적 먼 한 학교에 보내졌는데, 지키던 경찰은 “청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시의 곳곳에 감금된 수련생들은 오후에 강제로 중앙 텔레비전에서 파룬궁을 모함하는 거짓소식을 들었다. 이 세 식구는 강제로 이름, 집 주소, 직장 전화번호를 기록한 후 아주 늦게 집에 돌려보내졌다.
직장 보위처에서 사람을 데려온 후, 줄곧 하얼빈 시공안국, 난강(南崗)구역 공안분국, 하시(哈西)파출소, 직장, 가도(하시사무실)등에 의해 중공조직이 배열한 중점박해대상으로 되었다. 헤이룽장(黑龍江) 대학에서는 이를 위해 ‘5명 전향 소조’를 만들었으며, 이어서 가도사무실, 하얼빈시와 난강구역 공안국보대대에서 공작을 이유로 그들에 대해 끊임없는 교란을 하였다.
난강구역 정보과(政保科) 과장 장진빈(張金濱)은 거의 매일 잔씨네 집에 머물렀다. 헤이룽장 대학에서 한 “노 홍군(老紅軍)”이 장기간 따라다니며 수련인 한 가족에 대해 신앙을 포기하게끔 공작을 했는데 이는 사당의 견해와 일치한다. 학교 당위서기 쉬스둥(許師東)은 잔양 부모의 월급 지불을 중지하겠다고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 학교 동료들은 그들이 매달 월급으로 노인을 부양한다는 것을 알고는 모두들 “월급지불을 정지하는 것은 그들의 목숨을 끊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라고 말하였다. 결국 잔양 부모는 한 달간 월급 지불을 중지 당하였는데, 이 월급은 지금까지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 일은 세 식구의 수련의 결심을 동요시키지 못했다.
헤이룽장 대학에서 민간 법정을 사사로이 세워 공갈 협박하여 잔양은 정신분열증이 나타나다
1999년 10월 4일 아침 헤이룽장 대학 보위처의 우구이만(吳桂滿), 쑨중광(孫忠光)등 네 사람이 경찰복을 입고 잔씨네 집에 왔다. 얼굴에 웃음을 띄고 “잔선생, 류(劉)선생 학교에서 일이 있어 만나서 대화하자고 합니다. 잔양도 가도록 하시오.”라고 말했다. 그리고 차로 세 사람을 보위처에 데려가서, 그들을 각기 세 개 사무실에 보냈다. 엄하게 심문(당시의 책임자는 처장 류강(劉剛)이고, 부처장 리쉐펑(李雪峰)이 구체적으로 지휘하였음) 했는데, 경찰복을 입은 낯선 젊은이들이 기세 등등 하게 매 사람마다 둘러쌌다.
당시 잔양은 대학교를 졸업한지 얼마 되지 않았으며 사상이 단순하고, 담도 작았다. 이러한 장면(약 7~8명 사람이 포위)은 여태껏 겪어본 적이 없었다. 그 사람들은 그녀를 둘러싸고 고래고래 소리치면서 캐물었다. 어떤 이는 책상을 두드리고, 어떤 이는 컴퓨터로 타자하여 기록을 했다. “너희들은 무슨 조직과 연계가 있는가? 누구와 접촉하는가? 누가 너의 집에 갔는가? 이름은 모두 무엇인가? 함께 어떤 활동을 했는가? 너는 앞으로 연공을 하지 못한다. 나가서 연락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헤이룽장 대학에서 민간법정을 사사로이 세웠는데, 또 일부분 본교 로스쿨(法學院)의 학생도 있었다. 그들도 경찰복을 입고 있었는데 부추김에 의해 거들먹거리고 하찮게 여기는 그 표현이 아주 사악하였다. 잔양에게 위협, 공갈협박을 두 시간 넘게 지속하였다.
잔양이 집에 돌아온 후, 그 악몽 같은 광경은 그녀에게 두려움을 가져다주었다. 이런 감각은 부단히 그녀를 포위하고, 습격하고 있었다. 마치 집안 곳곳마다 경찰 옷을 입은 흉악하고 무서운 사람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요란스레 떠들어 대며, 끊임없이 사진을 찍으며, 책상을 두드리는 것만 같았다.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어도 잠을 이룰 수 없었으며, 화장실에도 가지 못했다. 며칠이 지나자 더 심해졌으며 집에 있을 수가 없었다. 친척집(외할머니, 고모, 이모네 집 등)에 5개월 동안 가 있었다. 계속 매우 놀라고 두렵고 불안정한 상태 속에 처했는데, 외할머니 집에서도 늘 도처에 숨었으며, 두 번이나 실종되었다. 있지 말아야 할 근심과 시끄러움은 가족과 친척에게 불안을 가져다주었다.
당시 잔양 부모는 8일 동안 연금 당하였다. 아침에 차로 마중하여 밤중에야 집에 돌아왔다. 아파트 밖에는 경찰차와 사람이 지키고 있었는데, 지키던 10여 명이 계속 병으로 드러누워 지킬 사람이 없게 되어서야, 가족을 시켜 ‘보증서에 서명’ 하고는 거민위원회에 맡겨 ‘지키게’ 하였다. 이 기간 동안 하얼빈시 공안국 성이 왕(王)가인 과장이 헤이룽장 보안처에 지시하였는데 그들 부부가 학교 문을 한 걸음도 나서지 못하게 하였으며 나서면 곧 잡겠다고 하였다.
잔양 부모는 연금에서 풀려나 돌아온 후, 딸의 표정이 정상이 아닌 것을 발견하고 아주 놀랐다. 곧 헤이룽장대학 보위처 처장 류강을 찾아 말하였다. 너희들이 우리 두 부부한테 한 짓만으로도 이미 틀린 것인데 아이를 놀라게 해서 정신이상이 되였다. 너희들은 이후에 나타 날 후과를 책임져야 한다.
잔양 부모의 이치에 맞는 변론으로 학교 보위처에서는 하는 수 없이 “잔양은 헤이룽장 대학 보위처에서 놀라게 하여 오늘의 이런 비정상적인 상태가 조성된 것이며, 파룬궁을 수련하는 것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증명서 한 부를 썼다.
잔양이 밖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던 전후 다섯 달, 가족과 친척은 갖가지 방법으로 그녀의 병 치료를 해주었다. 후에 하얼빈 의학대학 신경과에서 진단을 내렸는데 “강한 자극을 받고 심각한 정신장애를 초래하였는데, 이는 정신분열에 속한다”는 것이었다. 한동안 치료를 받은 잔양의 정신 상태는 좀 호전되었고 2000년 4월에 집으로 돌아왔다.
베이징에 청원하러 갔다가 혹형고문을 당하고 병세가 더욱 심각해지다
2000년 4월 25일, 잔양과 동수 몇 명은 베이징(北京)으로 청원하러 갔다가 납치되어 하얼빈시 제2간수소에 불법구금 당하였다. 구금당한 동안 잔양은 법공부와 연공을 하려다가 악경에 의해 철제 의자에 묶였다. 손발은 형구에 묶여 3일 밤낮을 움직일 수 없었다. 악경은 또 ‘작은 흰 용’ (즉 모래를 가득 채운 플라스틱 배관)으로 그녀를 혹독하게 때렸다. 악도들은 잔양이 처녀라서 특수한 방법으로 그녀를 ‘전향’ 시킬 수 있으리라고 여겼다. 밥을 먹을 때면 전문인원이 한 입 한 입씩 먹여주고, 소변을 보겠다면 사람을 시켜 철 의자 밑으로 받아내게 하였다. 이런 위선적인 못된 장난은 그녀를 굴복시키지 못했다.
잔양의 부모는 하얼빈시 난강 공안 분국 정보과 과장 장진빈(張金濱)을 찾았다. 헤이룽장 대학에서 썼던 증명서 ‘잔양은 헤이룽장대학 보위처에서 놀라게 하여 정신이 정상이 못 된다’는 증명을 꺼내가지고 사람을 내놓으라고 하였다. 잔양의 ‘안건’을 책임진 국보대대 경찰 한슈원(韓秀文)은 “이 아이는 확실히 정신에 이상이 있다. 내가 그녀에게 간단히 이력을 쓰라고 하자 그녀는 오히려 ‘나의 어머니를 찾으라’ 라고 말하였다. 또 나에게 화장지를 사 달라고 했으며……”. 잔양은 간수소에서 26일 동안 구금당한 후 집으로 돌아왔다.
이번 박해로 잔양은 늘 중얼거렸으며 귀를 벽에 대고 듣는 증상이 생겼다. 어떤 때에는 멍하니 있었으며 소리 없이 혼자 웃기도 했다.
2001년 7월 초, 잔양은 집에 돌아가 머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녀는 떠돌이 생활을 하는 어머니를 찾아 가다가 잠복해 있던 악경에 의해 다시 납치되었다. 하루 넘게 구금 당했다가 풀려 나온 후, 그녀의 병세는 나날이 심해졌다. 공포 속에서 그녀는 큰 소리로 외치고 다른 사람이 그녀를 해친다고 말하였다. 사람을 보기만 하면 숨었다. 또한 그녀는 집을 나가기 시작했는데 아득한 어둠속에서, 얼음과 눈이 휘몰아치는 아침햇살 속에서, 전에 그토록 사랑했던 이 땅에서, 아무런 목적도 없이 걸어갔다.
어머니와 함께 떠돌이 생활을 하고 늘 실종되며 공포로 불안에 떨다
2002년 설날, 어머니는 잔양을 찾았다. 집에 돌아온 잔양은 경상적으로 ‘파룬따파는 좋다’와 ‘사부님’ 등을 큰 소리로 외쳤다. 그녀의 이런 행동 때문에 항상 진상을 모르는 악인에 의해 고발당했다. 그리고 어머니와 시내에서 여섯 번 숙소를 바꾸었고, 농촌에서 일곱 번 이사를 하였다.
2008년 5월 잔양은 어머니와 마트에 갔는데, 어머니는 그녀에게 일을 좀 보고 올테니 잠시 기다리라고 하였다. 그런데 어머니가 돌아온 후 잔양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밤이 되어서야 몇 가족의 도움으로 찾아냈다. 사흘 후 새벽 두 시경에 잔양은 갑자기 온몸에 경련을 일으켰으며 한 시간 넘게 지속되었다. 그녀의 표정은 아주 고통스러웠다. 이후 이틀 동안 잔양은 제대로 걷지 못하였으며 휘청거리면서 여러 번 넘어지고 끊임없이 헛소리를 했다. 부모는 잔양을 병원에 데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가는 도중 자동차에서 그녀는 반시간 넘게 경련을 일으켰다. 4개월 넘는 치료를 거쳐서야 좀 안정되었다.
2009년 3월 하순, 잔양은 다시 공포로 불안해하는 상태가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늘 다른 사람이 자기를 해친다고 말하였다. 때때로 하염없이 소리 내어 울기도 하고 또 머리로 어머니를 부딪쳤으며 조끼와 팬티만 입고 맨발로 눈길을 달리기도 했다. 어떤 때에는 멍하니 있다가 몸을 벌벌 떨었으며 온돌에 앉아서도 하루 종일 움직이지 않았다. 오줌을 온돌 위에 누고도 모르고, 둔부와 발 복사뼈의 가죽과 살이 데어서 헐어도 반응이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당국에서는 잔양을 여전히 가만두지 않았다. 2009년 6월, 관할구역 가도사무처, 파출소 등에서 많은 사람들이 잔씨 집에 와서 그녀를 찾다가 잔양 아버지의 엄한 질책을 받았다. “잔양을 정신분열증으로 만들어놓고도 또 찾아와? 집에서 지금 지킬 사람이 없어 근심하던 참이다. 이번에 저 애를 너희들에게 맡겨줄 테니 지켜라!” 그 사람들은 듣자마자 몸을 돌려 가버렸다.
2009년 8월 19일 오후, 잔양은 잠옷 치마를 입고 플라스틱 가방을 든 채 바쁘게 집을 떠났다. 아버지 어머니가 쫓아 나갔을 때는 이미 딸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나흘 후에 구조수용소(救助收容站)에서 사람을 데려가라는 통지가 왔다. 가족이 잔양을 만났을 때, 그녀의 표정은 초췌하였고 많이 약해졌으며 몸에는 흙이 많이 묻었고 두 다리는 옥수수 껍질에 긁혀 온통 빨갛게 부은 자국이었다.
2009년 9월 11일, 잔양은 어머니를 따라 외출하다가 재차 실종되었는데, 하루 반 동안 실종되었다. 이튿날 잔양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떠난 지 8년이 되는 집에 스스로 돌아갔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침대에 누워 잤는데 며칠 동안 깨지 못하였다. 가족은 잔양이 신은 가죽신이 닳아서 구멍이 난 것을 발견하였다.
정신병원에서 전기충격을 받고 핍박으로 전향하다
2009년 9월 24일, 잔양의 정신상태는 갈수록 나빠졌으며, 늘 실종되었다. 부모와 친척, 친구들은 하는 수 없이 그녀를 하얼빈 푸닝(普寧)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잔양이 병원 앞에 도착했을 때 손에 대법 책 한권을 꽉 쥐고 있었다. 누가 달라고 해도 주지 않았으며 빼앗으려 해도 빼앗을 수가 없었다. 병원에 도착한 후 의사는 우리한테 방법이 있다고 말하였다. 잔양은 제4병실에 입원하였다. 주치의 양젠화(楊建華)와 잔(詹)의사, 쉬(徐)의사는 먼저 잔양에게 몸을 검사하고 정황을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손을 뻗어 책을 빼앗으려고 하였다. 책을 빼앗지 못하자 양젠화는 사람들을 5~6명 불러와 잔양을 침대에 묶었다. 그들은 두 손을 묶으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양은 사람을 시켜 전기곤봉을 가져와 잔양의 몸에 충격을 가하였다. 그녀들은 끝내 책을 강제로 빼앗았다. 잇달아 양젠화 등이 돌아가며 잔양에게 꼬치꼬치 캐물었다. “너는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이냐?” 잔양은 그렇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그녀들은 두려워서 어쩔 줄 몰라 하며 거의 이지를 잃은 것 같았다. “안 된다. 너는 파룬궁과 결별해야 한다. 너의 사부님과 결별해야 하고, 반드시 결별서를 써야 한다.” 잔양은 그녀들에게 명확히 말했다. “불가능하다. 나는 파룬궁과 결별하지 않을 것이다.”
이 때 주치의 양젠화는 정신병자처럼 큰소리로 외치면서 사람을 시켜 전기침을 가져오게 하여 전기를 가하여 금방 병원에 들어온, 정신이 극도로 피곤해진 처녀에게 의사로서 하지 말아야 할 박해수단을 실행하였으며, 말하지 않으면 전기 충격을 가했다. 강대한 전류가 잔양의 호구혈(虎口穴), 외관혈(外關穴) 등을(원래 이런 전기침을 반신불수인 환자를 치료할 때 사용해야 한다) 충격했다. 잔 의사는 잔양에게 전기를 가하면서 물었다. “누구한테서 배웠니? 말해!” 잔양이 말했다. “나의 어머니한테서 배웠다. 어머니는 몸이 좋지 않았는데 연공을 하여 좋아졌다. 그래서 나도 따라서 연공했다.”
그 사람들은 안 된다고 말하면서 “너는 연공을 못한다. 바로 파룬궁과 결별하라는 것이다. 네가 안 쓰려면 말로 해도 된다.” 의료인으로써 갖추어야 할 도덕이 전혀 없는 사람이 몇 년 동안 사당에게 심신의 박해를 받은 처녀에게 그녀 자신이 영원히 하고 싶지 않는 일을 하게 하였다.
잔양의 남동생은 푸닝병원으로 누나를 보러갔는데 누나가 철고랑이에 채워진 채 예전의 친절한 표정이 없이 멍하니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남동생은 갑자기 마음이 떨렸다. 누나가 억울하게 고통을 당하고 있어서 눈물을 흘렸다. 남동생은 집에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말했다. “누나가 너무 불쌍해요. 철고랑이로 누나를 채워둔 것은 이번이 두 번째 예요. 우리가 누나를 데려와요.”
잔양은 가족에 의해 집에 돌아왔다. 그녀는 다시 어머니와 함께 고생스러운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다. 그녀의 가족도 정신적인 시달림과 경제적으로 무거운 압력을 감당하고 있다. 지출하지 말아야 할 비용이 이미 10여 만에 달한다.
이것이 바로 중국대륙에서 매일 외치는 ‘인간을 근본으로 삼다’, ‘조화롭고 안정되다’는 거짓말 하에 파룬궁 수련생 일가족이 수련을 포기하지 않아서 받는 비극이다. 그러나 이는 중공악당이 파룬궁 수련생을 박해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이러한 참혹한 사건을 중국대륙에서는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잔양을 박해하는데 참여하여 이미 업보를 받은 사람으로는 아래와 같다.
장진빈(張金濱):하얼빈시 난강구역 공안분국의 원 정보과 과장이다. 전에 파룬궁 수련생 여러 명이 그에 의해 불법 노동교양과 불법 판결을 받은 적이 있다. 2000년 이후 이미 “솽 구이”(雙規—규정된 지점에서 규정된 시간 내에 규정된 문제를 교대해야 한다)를 받았다.
쉬스둥(許師東): 그 해 헤이룽장대학에서 파룬궁을 탄압한 총지휘자이다. 헤이룽장대학의 백 십 여명의 수련생은 거의 모두 강제로 수련을 중지 당했다. 그 가운데서 수련을 포기하지 않은 4명의 대학생은 학업이 끝나기 전에 퇴학을 당했으며, 견정한 사람은 곧 탄압 당했다. 쉬스둥은 전교대회에서 공개적으로 소리쳤다. “나는 악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너희들이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들과 연계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했다. 현재 쉬스둥은 아주 중한 전립선병에 걸렸으며 아파서 고함을 지르고 있다.
쑹융(宋勇): 그 해 하얼빈시 하시(哈西)파출소의 구역경찰이었다. 2000년 4월 25일 잔양이 베이징으로 청원하러 갔을 때 베이징에 가서 잔양을 현지로 납치해 왔다. 당시 파출소에서는 가족에게 3천 5백 위안을 요구하였으며 쑹융은 장려금 2천원을 탔다. 쑹융은 현재 이상한 병에 걸렸으며 어디에 가도 치료되지 않으며 고통 속에서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다.
우구이만(吳桂滿):헤이룽장대학 보위처의 직원이다. 2007년에 백혈병에 걸려 사망했다.
헤이룽장대학
헤이룽장대학에서 잔양을 박해하는데 참여한 관련직장과 책임자:구역번호:0451
원 헤이룽장대학 당위서기(이미 퇴직):쉬스둥(許師東)-13359708687(핸드
폰) 86608335(집 전화번호)
보위처 처장:류강-13936242567
보위처 부처장:리쉐펑(李雪峰)
보위처인원:우꾸이만(2007년에 백혈병에 걸려 사망)
보위처 인원:쑨중광(孫忠光)
보위처 인원:쉬빙(許 兵) (원 헤이룽장대학 당위서기 허스둥의 아들)
하얼빈시 난강구역 공안분국 정보과 과장:장진빈(이미 솽구이를 받았음)
하시파출소:원래 있던 소장은 이미 전근 갔음, 현재 소장은 왕(王)×× – 86661484
하시 가도사무실:왕(王)주임 – 86661209
하얼빈 푸닝 정신병원 제4병실 주치의:양젠화 사무실:88083974
하얼빈 푸닝 정신병원 제4병실 의사 잔××(현재 이미 전근 갔음)
하얼빈 푸닝 정신병원 제4병실 의사 쉬(徐)혹은 쉬(許)의사
현재 근무하고 있는 헤이룽장 대학 당위서기 양전(楊震):사무실 86608500, 집 전화번호:53646952
문장발표:2010년04월28일
문장분류:박해진상
원문위치: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0/4/28/222426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