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후이왕 2010년 5월 26일] (밍후이통신원 헤이룽장성 보도) 솽청(雙城)시 파룬궁수련생 야오차이웨이(姚彩薇)는 중국공산당의 장기적인 박해로 반신불수가 됐다. 손발이 마비되고 발음이 정확치 못했으며 두 눈이 잘 안보여 스스로 생활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2010년 5월 18일, 58세의 나이로 고통 속에서 억울하게 인간세상을 떠났다.
야오차이웨이
야오차이웨이의 남편 장타오(張濤)은 2002년 7월말 박해로 사망했다. 당시 나이 겨우 19세였던 딸 장젠후이(張建輝)는 납치돼 구금됐는데, 구타로 얼굴이 변형됐고 곧 10년 불법 판결을 받고 헤이룽장성 여자감옥 수감됐다.
야오차이웨이가 세상을 뜬 이튿날인 5월 19일, 친척들은 감옥측에 딸 장젠후이가 돌아와 그녀의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한번 보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감옥 옥정과(獄政科) 과장에게 거절당했다. 21일 친척과 친구가 재차 헤이룽장성 여자감옥으로 가서 야오차이웨이의 딸이 돌아와 어머니의 장례에 참석하게 해달라고 요구했으나 감옥측은 이들을 문밖으로 내쫓았다.
2002년 박해로 사망한 야오차이웨이의 남편 장타오
지금도 헤이룽장성 여감옥에 수감돼 있는 야오차웨이의 딸 장젠후이
야오차이웨이 일가는 박해로 집안이 참혹한 불행을 당했다. 주요 책임자의 중 한 사람은 솽청시 공안국장 장궈푸(張國富)다. 장궈푸의 부친과 장타오[본명은 장궈타오(張國濤)]의 부친은 사촌 형제다. 그러나 장궈푸는 중공사당에 의해 인성이 삐뚤어져 혈육도 몰라봤으며 명리를 위해서만 마음을 움직였다. 더 높은 관직에 오르기 위해 여러 차례 사촌 형, 사촌 형수, 사촌 여동생과 조카딸을 불법 체포하고 구금했다. 그는 장타오 부부를 붙잡아 장기간 불법 구금했다. 게다가 두 사람을 따로따로 노교소에 보내 박해를 진행했다.
1. 여러 차례 불법 구금당하고 핍박으로 의지할 곳을 잃고 떠돌아다녀
야오차이웨이와 남편 장타오는 원래 솽청시 시멘트 공장 직원이다. 본래는 온전한 집이 있었으며 가족은 네 식구다. 남편과 딸은 모두 파룬따파를 수련한 원인으로 오랫동안 치료해도 낫지 않던 질병들이 신기하게 사라졌으며 신체도 정화됐다. 특히, 그녀의 남편 장타오는 이미 일찍부터 심한 요통에 시달렸는데 아플 때는 허리도 펴지 못했다. 여러 의사를 찾아갔지만 효과가 없었다. 1996년 1월 파룬따파를 수련한 후 여러 해 동안 시달렸던 불치병이 치료하지 않아도 저절로 나아졌다. 비록 두 부부가 모두 직장을 잃어 어려운 생활을 지냈으나 이 일가족은 오막살이에서 살며 자그마한 장사에 의거해 생계를 유지하며 아주 행복하게 살았다.
1999년 중공 장쩌민 깡패집단이 파룬궁을 박해하기 시작하자 야오차이웨이와 남편, 딸은 대법과 사부님의 결백을 실증하기 위해 여러 차례 베이징으로 청원하러 갔는데 중공 솽청시 공안국에서 파룬궁 박해를 주관하는 악경 장궈푸, 진완즈(金婉智)에 의해 중점 박해대상이 됐다. 비록 장궈푸와 장타오는 사촌 형제지만 장궈푸의 사당(邪黨)성은 인성을 능가했다. 잔쳰(站前)파출소를 시켜 늘 장타오집 앞뒤에서 잠복하고 지켰으며, 그의 딸 20세도 안된 장젠후이를 납치하겠다고 떠벌렸다.
야오차오웨이는 두 차례 불법구금을 당했다. 2000년 1월 19일, 야오차오웨이는 베이징에 가서 청원하고 돌아온 후 솽청시 제2간수소에 갇혀 구금됐고 5월 23일에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2000년 7월 1일, 야오차오웨이는 두 번 째로 베이징으로 청원하러 갔다. 7월 4일에 솽청시 제2간수소에 감금됐고 9월 29일에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남편 장타오는 이미 세차례 불법 구금됐다. 1999년 8월 5일 장타오는 처음으로 베이징에 청원하러 갔다. 청원하고 돌아온 후, 솽청시 제2간수소에 18일간 불법 구금됐고 9월 2일에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1999년 11월 초, 장타오가 집에서 휴식하고 있었는데 잔쳰 파출소에 납치돼 54시간 구금당한 후 솽청시 제2간수소로 보내졌다. 11월말에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2000년 정월 초하루 장타오는 두 번 째로 베이징으로 청원하러 갔다가 3일 후 솽청시 제2간수소에 보내져 구금당했다. 5월 30일에는 상즈(尚志)시 이몐포(一面坡)노교소로 보내져 강제로 9개월간 강제노동을 한 후에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딸 장젠후이는 2000년 1월 18일에 베이징으로 청원하러 갔다가 1월 22일에 솽청시 제2간수소에 보내졌다. 2000년 3월 28일에 또 잔쳰가도 학습반에 보내져 7일간 구금당한 후에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중공중앙텔레비전(CCTV)에서 ‘천안문 분신자살’ 가짜 사건을 만들어낸 후 파룬궁 수련생들은 즉시 장쩌민 집단의 사악한 음모를 간파했다. 민중이 거짓말에 속지 않게 하기 위해, 또 파룬따파의 진상을 세인들에게 알리기 위해, 장타오 일가족은 선한 마음을 품고 침식을 잊어가며 진상전단지를 배포했다. 2001년 2월 23일 저녁 10시경, 장씨네 일가족은 잔쳰파출소 경찰에게 납치돼 솽청시 공안국으로 보내졌다. 이튿날, 야오차오웨이는 솽청시제2간수소에 납치됐고 장젠후이는 이른바 ‘학습반’에 납치돼 불법구금을 당했다.
2001년 10월, 야오차이웨이 일가족 네 식구는 현지에서 살아 갈 수 없어 오막살이집을 싸게 팔아버렸다. 이때부터 전 가족은 정처 없는 유랑생활을 하게 됐다.
2. 남편 장타오가 노교소에서 학대로 사망
2001년 11월 10일, 장타오는 하얼빈시 모 지역에서 차에서 내리자마자 곧 몇 명의 사복경찰에게 붙잡혔다. 그런 다음 하얼빈 공안국 모처로 그를 압송해 심문하고 자백을 강요했다. 뿐만 아니라 돈 3400위안을 빼앗아 갔다. 장타오는 12일간 주야로 쇠의자에 앉았는데, 둔부는 너무 앉아서 헐고 두 다리와 발은 부종이 생겨 당시 풀어줘도 설 수도 없었다. 악 경은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하자 곧 장타오를 하얼빈 야쯔촨(鴨子圈)감옥으로 옮겨 4개월 구금한 후 3년 노동교양을 시켰다.
2002년 3월 장타오는 하얼빈 창린쯔(長林子)노교소로 옮겨졌다. 장타오는 박해로 몸에 이상 상태가 나타났다. 걸을 수도 잘 수도 없게 됐으며 배가 참을 수 없이 아팠다. 하얼빈 의과대학2병원의 검사를 거쳐, 담. 신장, 췌장이 모두 병들어 흉강과 복강에 물이 차 오줌을 배출할 수 없다고 했다. 노교소에서는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4월 10일 장타오를 솽청시 형 집에 돌려보냈으며, 15일간 병보석으로 풀어줘 치료받게 했다.
하지만 집에 돌아온 지 9일 만인 2002년 4월 19일 오후, 솽청시 ‘610(파룬궁탄압 전문기구)’ 폭도들은 하얼빈 폭동진압 경찰대대와 결탁해 7,8명 사람들이 자동차 두 대를 몰고 장타오 부부가 새로 얻은 셋집에 들이닥쳤다. 이들은 가택수색을 해서 대법책과 녹음기를 수색해 갔다. 두 사람은 강제로 장타오 부부를 자동차에 붙잡아 넣고 악경은 계속 욕설을 퍼부었다. 장타오 부부를 솽청시 공안국으로 압송해 간 후, 대법진상자료에 관한 일 자백하라고 고문했으며 장타오를 쇠의자에 채워 하룻밤 동안 앉혀놨다.
이튿날부터 장타오는 솽청시 제2간수소에서 24일간 구금당했다. 5월 13일 악경에게 혹독한 매를 맞았으며 그는 당일 오후 창린쯔노교소에 납치됐다. 7월말 단식으로 박해에 항의했다는 이유로 장타오는 독방에 갇혔고 매달아 채우는 학대를 받았으며 음식물을 강제주입 당했다.
7월 31일 창린쯔노교소에서는 장타오의 형에게 장타오가 ‘심장병으로’ 사망했다고 통지했다(당시 장타오의 아내와 딸은 모두 감옥에 있었고 아들은 행방불명이었다). 8월 2일, 장타오의 형과 형수가 하얼빈 제2병원 냉동실에서 장타오에게 옷을 입힐 때, 장타오의 목이 시퍼렇게 멍들고 부어 아주 굵어졌으며, 한쪽 어깨가 골절되고 변형된 것을 발견했다.
2002년 4월 19일, 야오차이웨이는 납치된 후 불법적으로 노동교양 3년을 받았다. 이후 신체검사에 불합격을 받아 솽청시에서 하얼빈시 완자(萬家)노교소 ‘학습반’에 보내져 연속해서 세뇌박해를 받았다. 야오차이웨이가 완자노교소에 있을 때 남편이 박해로 사망된 소식을 듣자마자(장타오의 사망된 소식은 완자노교소의 왕대장이 그녀에게 알려주었다), 야오차오웨이는 남편의 시신을 마지막으로 한번 보자고 요구했으나 인성이 없는 중공당국은 허락하지 않았으며 시신을 직접 하얼빈 황산쭈이쯔(黄山嘴子)화장터로 보내 화장했다.
3. 딸이 납치를 당해 불법적으로 10년 판결을 받다
2002년 4월 중순, 솽청 시위서기 주칭원(朱淸文), 공안국부국장 장궈푸 등 살인범들은 전 시내 ‘공안, 검찰, 법원’을 발동하고 아울러 하얼빈시 740명의 경찰, 무장경찰부대를 시켜 파룬궁수련생들을 체포하는 행동에 참가하게 했다. 온 성시는 적색 공포속에 휩싸였다. 4월 19일, 야오차오웨이의 22세 딸 장젠후이가 불법 체포됐으며 간수소에 불법 구금됐다. 사악한 악도들은 그녀를 고문하며 자백을 강요했는데 얼굴은 맞아 변형됐고 온몸은 상처투성이였다. 장젠후이는 10년형을 선고 받고 2003년 1월 하얼빈시 여자감옥에 감금됐다.
남편이 박해로 사망하고 딸이 불법으로 중형 판결을 받았으며 수련을 하지 않는 아들은 어디에서 방랑하는지도 모른다. 이런 큰 정신적 압력하에서, 인신자유를 잃고 비인간적인 박해를 당한 야오차이웨이의 몸은 망가졌다. 불법구금 기한을 견디고 가정이 파괴되며 가족이 사망한 상황에서 셋집에서 괴롭게 살아갔다. 하루 종일 마음이 극도로 아프고 고통스러워 눈물로 지냈다. 반신불수에 손발이 마비되고 발음이 정확치 못했으며 두 눈이 잘 안보여서 혼자 생활할 수 없었다.
2008년 겨울, 야오차이웨이는 친척에 부축임을 받고 차에 올라 딸을 구금된 헤이룽장성 여자감옥으로 찾아갔다. 모녀는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우는데 너무 울어서 말도 하지 못했다. 이들이 우는 것을 본 친척들도 모두 눈물을 흘렸다. 친척들은 야오차이웨이를 부축해 감옥장을 만나 딸을 풀어줘 어머니를 보살펴드리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감옥장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소란을 피웠다. “이렇게 말하지 마시오. 당신보다 더욱 비참한 사람도 있소. 가족이 죽어도 그녀를 집으로 돌려보낼 수 없소.”
야오차이웨이는 돌아온 후 병세가 더욱 심해졌다. 수시로 경련을 일으키고 넋을 잃고 멍하니 바라보기도 했다. 울려고 해도 눈물이 나오지 않았는데 남편, 딸의 말을 꺼내거나 혹은 지나간 일들을 회상하거나 혹은 가족들의 의복 등을 보기만 하면 즉시 우는 상태가 나타났다. 그러나 눈물이 이미 다 말라버려 나오지 않았다.
2010년 5월 18일, 유감을 지닌 야오차이웨이는 경련을 일으키면서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5월 22일, 친척들은 야오차이웨이의 시신을 화장할 때 풍습에 따라 야오차이웨이와 남편 장타오의 골회를 합장했다.
문장발표:2010년 05년 26일
문장분류:박해진상
문장위치: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0/5/26/224355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