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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린시 쩡판잉, 박해로 집도 잃고 가족도 잃고··· (사진)

【밍후이왕】 (밍후이통신원 지린보도) 지린(吉林)시 대법제자 쩡판잉(曾繁影)은 2009년 9월 24일에 출근할 때, 경찰에게 불법으로 체포당해 10월 26일에 불법노동교양 1년을 선고받고, 창춘(長春)시 헤이쭈이쯔(黑嘴子) 노동교양소에 감금되었다. 2009년 11월 6일에는 집에 발생한 화재로 남편 왕즈융(王志勇)이 불행하게도 사망했다. 감정 결과, 사고원인은 ‘자살’이었다.

2009년 9월 24일 오전 4시 반경에 지린시 공안국이 장난(江南) 가오신(高新)구 파출소에 지시를 내려 마침 출근한 대법제자 쩡판잉을 납치했다. 그 후에 쩡판잉을 촨잉(船營)구 창춘로 파출소에 강제로 감금해 박해했다. 2009년 10월 26일 월요일에 가족은 쩡판잉이 이미 불법노동교양 1년을 판결 받았다는 통지를 받았다.

쩡판잉

2009년 10월 30일 금요일, 지린성 지린시 대법제자 쩡판잉은 지린시 창춘로 파출소에 의해 창춘시 헤이쭈이쯔 노동교양소로 보내졌고, 강제로 7대대에 감금되었다. 뒤이어 가족과 변호사가 연달아 서둘러 도착했다. 변호사는 당사자 쩡판잉과 한 차례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으나 가족은 쩡판잉과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쩡판잉의 남편 왕즈융

2009년 11월 6일 금요일 밤 8시 45분에 쩡판잉의 아들 왕쉬둥(王旭東)은 창춘로 파출소의 전화를 받았는데, 집에 불이나 아버지 왕즈융이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는 것이었다. 9시경에 왕쉬둥은 서둘러 현장에 도착했는데, 당시 길가에는 구경꾼이 가득했다.

왕쉬둥은 아버지의 시신을 보고는 목이 메어 통곡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땅에 쪼그리고 앉았는데, 인민경찰은 시신과 접촉하지 못하도록 했다.

쩡판잉 일가 사진

나중에 소방분대의 조사원이 현장에 도착해 화재 원인을 조사했고, 그 후에 시신을 부검센터로 보냈다. 2009년 11월 7일 토요일에 형사경찰대대는 현장 상황에 따라 화재의 원인을 분석했는데, 휘발유로 인한 화재였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법의학자는 사망원인이 일산화탄소 중독이라고 했으며, 종합적으로 ‘자살’이라고 했다.

쩡판잉(여·48)은 전문대 학력이며, 거주지는 지린시 촨잉구 창춘로 판룽(繁榮)골목이다.

1997년에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했고, 심신에 이득을 얻었다. 원래는 지린시 방직공장 염색현장 단장 겸 교련원으로서, ‘황도파(黃道婆)’의 칭호를 얻었다. 1999년 7월 20일에 중공사당이 파룬궁을 박해한 후에 쩡판잉은 여러 차례 시 정부, 현 정부에 가서 청원하다가 악경(惡警)에게 제지를 당했다. 최후로 쩡판잉은 베이징에 청원하러 갔는데, 도중에 불법으로 납치당해 지린시 구류소에 불법으로 15일간 구류를 당했다.

*황도파(黃道婆) : 13세기의 걸출한 방직기술자, 중국의 면방직업의 발전에 뛰어난 기여를 했다.

2009년 9월 24일 아침 6시가 되기 전, 지린시 공안국 경찰이 2무리로 나눠서 대법제자 쩡판잉 여사의 직장과 집에 갔다. 경찰은 쩡판잉을 직장에서 촨잉구 창춘로 파출소로 납치했다. 경찰은 또 그녀의 집에서 제멋대로 강탈을 했다. 쩡판잉의 아들은 일찍이 컴퓨터 소모품점을 열었는데, 경찰들은 집에서 많은 물품을 강탈했다. 아들은 어머니가 납치된 것을 알고는 창춘로 파출소에 가서 면회를 요구했으나 파출소 1층의 악경에게 차단당했다. 죽을 힘 다해 버티는 그를 경찰 7~8명이 강경하게 끌고 가는 바람에 팔에 핏자국까지 났으나 결국에는 어머니를 만나지 못했다. 경찰은 또한 총기를 휴대하고는 쩡판잉의 남동생 쩡판빙(曾繁斌)이 있는 지린시 54중학교에 갔다. 이들은 마침 학생들에게 물리를 가르치던 쩡판빙을 현장에서 강제로 끌고 가 학생들을 떠들썩하게 했다.

왕즈융(51)은 2008년 말에 경도 뇌혈전으로 집에서 요양했다. 아들은 늘 바깥에 있었으므로 아내 혼자서 줄곧 그를 보살피며 가정의 경비를 다 댔다. 왕즈융은 병에 걸린 후에 의기소침해져 늘 폭음을 일삼았다. 아내 쩡판잉이 대부분의 시간을 남편의 정서가 호전되도록 하는 데 써서야 스스로 술을 끊고 몸도 호전되기 시작했다. 2009년 9월 24일에 쩡판잉은 납치를 당하고 창춘로 파출소 악경들이 집을 텅 빌 정도로 강탈해 갔는데, 왕즈융은 속수무책인지라 다시 술로 근심을 해소하기 시작해 병세가 악화되었다.

2009년 10월 30일에 아내가 노동교양 1년을 판결 받은 것을 알게 된 후에 왕즈융은 더 소극적이 되어 대량으로 폭음을 일삼고 늘 만취되도록 마셨다. 11월 4일, 왕쉬둥은 아버지가 넋을 놓고 베란다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는데, 얼굴과 이마에 상처가 있었고, 오른손 손바닥에는 반창고가 있었다. 입고 있는 옷의 목둘레와 소매에 핏자국이 있었다. 왕즈융은 파출소로 간다고 말했는데, 길에서 자빠졌다……. 왕쉬둥은 부친이 이러한 것을 보고는 마음속으로 너무 괴로웠는데, 어머니의 일 때문에 줄곧 밖에서 바쁘게 다니느라 아버지를 돌볼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가까운 시일 내에 숙부의 집으로 가서 잠시 머무는 것이 어떨지에 대해 아버지와 상의를 했다. 당시 왕즈융은 동의하며 “나는 상관없으니 너는 안심하고 네가 해야 할 일을 하도록 하거라. 네 어머니 일은 네가 파헤쳐라. 나는 아무런 도움도 못 되는구나. 너는 안심하거라.”라고 했다. 그리고 왕즈융은 11월 6일 밤에 사망했다. 부검할 당시, 왕쉬둥은 아버지의 시신 오른손 손목에서 어머니의 팔찌를 보았다…… .

문장발표 : 2009년 11월 23일
문장분류 : 박해진상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9/11/23/21314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