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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커수(傅可姝)와 쉬건리(徐根礼)의 장기 적출 후 사체는 정강산에 버려져(사진)

【명혜망 2006년 8월 8일】귀주성 개양현에서 첫 번째 초등학교 퇴직 수석교사인 파룬궁 수련생 푸커수와 그녀의 먼 친척 조카인 쉬건리가 2005년 11월 정강산에서 실종되었다. 그 후 그들의 가족들은 현지 지리를 잘아는 고향사람을 찾아 실종 가능성이 있는 산과, 위험 가능한 강과 구덩이를 함께 찾으면서 시 정부의 정강산과 관련된 부처에 협조를 요구했지만 그들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다. 그런데 2006년 4월말 정강산의 오자봉에서 그들의 사체가 발견되었다. 다른 사람에게 장기를 적출 당한 후 그 사체는 야외에 버려진 것으로 분석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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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커수(傅可姝)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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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건리(許根禮)

2006년 4월 30일 실종자 가족은 금강산시 공안국형사 경찰대대로 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들은 정강산의 오자봉에서 남자 사체를 발견했는데 …… 입은 의복을 보고 실종자를 찾을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다. 전화를 받은 뒤 그들은 실종자와 함께 정강산에 갔던 할머니를 찾아서 그들의 옷과 실종자가 입은 옷이 동일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5월 3일 쉬건리의 일가족 6명은 정강산에 도착하여 형사와 경찰들과 함께 현장 조사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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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커수와 쉬건리를 찾는 광고

쉬건리 사체현장 사진은(365KB)(어린이와 심리적으로 약한 사람은 클릭하지 말기 바란다)

사체는 머리카락이 없었고 이마에는 큰 구멍이 나 있었으며 그 구멍에는 뼈가 보이지 않았다. 머리와 두 눈은 움푹 들어간 상태로 눈주위는 썩었으며, 코는 시커멓게 두 구멍이 나 있었다.(공안은 이에 대해 장기적으로 압박을 받아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했다)사체의 배와 흉부는 갈라져 있었다. (공안은 그들이 사체 검사와 DNA를 검증하기 위해 해부한 흔적이라고 했다.)그날 현장에서 사체를 본 다음 이를 처리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5월 5일 큰 비가 내린 뒤 5월 6일 사체가 호수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오후 6-7시에 츠핑(茨坪) 장의소에 보냈다.

5월 7일에는 푸커수의 가족들이 현지에 살고 있는 몇몇 고향 사람들과 함께 그녀를 찾으러 산으로 올라갔다가 그곳에서 1박을 했다. 이튿날 산을 따라가다가 산밑 도랑 옆에서(죽은 쉬건리 사체 위에)커다란 비닐막과 낡은 작업복을 발견했고, 나무가지에서 마대를 발견했는데 그 안에는 곰팡이 낀 쌀이 반자루 가량 담겨져 있었다. 5월 9일 고향 사람들 6명이 강에서 배를 타고 산으로 올라가 오전 9시경 쉬건리의 사체에서 몇 십미터 떨어진 폭포 밑에서 푸커수이가 외출할 때 입었던 옷을 발견했다. 10경에는 폭포 위 중간지점에서 푸커수의 사체를 발견했는데 큰 돌 앞에서 얼굴은 밑을 향해 놓여져 있었다. 즉시 이 사실을 경찰에 알리자 그들은 현장에 신속하게 도착하여 사진을 찍고 녹화했으며 법의인 쏘모는 사체 검사를 했다.

푸커수의 사체 사진(454KB
)(어린이와 심리가 약한 사람들은 클릭하지 말 것)

현장에서 발견된 푸커수의 사체는 썩지 않은 채 머리카락은 없었고, 두 눈은 움푹 들어갔으며, 눈알은 없이 눈주위는 썩어 있었다. 그리고 코는 시커멓게 두 구멍으로 뚫려 있었고 (공안의 말에 의하면 벌레에게 상했고 장기적으로 압박을 받아 그렇게 된 것이라고 했다)웃통은 벗겨져 있었고, 내의는 꺼꾸로 머리를 감싸고 있었고, 솜바지와 양말은 그대로 입혀져 있었다. 그리고 바지는 헤여져 있었고, 발과 작은 다리는 말라서 수축되었으며 두 발은 똑바로 펴져 있었다.

당시 공안원이 “도랑을 따라 가보면 무엇인가 찾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래서 고향 사람 2명이 도랑을 따라 무엇인가를 찾기 시작했다. 상류 몇 십미터 남짓 떨어진 풀밭에서 비닐주머니 하나를 발견했는데 그 안에 있던 도장에는 “법정건곤 사악전멸”(따파제자들은 평소 이 도장을 가방안에 넣고 다니지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이 문을 나설 때 검은색 가방안에 들어있었던 사진기,열쇠,은행카드 등 물품은 찾지 못했다. 5월 9일, 오후 푸커수의 사체는 츠핑 장의실에 보내졌다. 그런데 그날 밤 경찰대의 형사들이 푸커수 가족에게 ‘자살’이라고 했다. 그래서 자살이라고 하는 이유를 묻자 공안은 아주 기분 나빠하면서 내일까지 사체를 옮겨야 한다고 했다.

이튿날 공안이 찾아와 사체에서 DNA를 검증해야 한다면서 즉각 옮겨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유족이 그렇게 검증하면 죽은 시간과 그 원인을 알아낼 수 있는지 물었다. 그러자 공안은 친척들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유족은 “일부 일가 친척들이 내일 이곳에 도착한다. 내일 그들이 온 다음 우리도 즉시 옮겨가겠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5월 11일 푸커수의 사체를 츠핑 장의실에서 길안 장의실로 옮겨서 5월 12일에 화장한 뒤 5월 13일 유족들은 유골을 가지고 귀주로 돌아갔다.

위의 사실을 근거로 푸커수와 쉬건리는 모살 당한채 장기 적출 당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 이유로,

1, 두 사람의 주검에는 몇 군데 동일한 점이 있다. 사체는 각각 머리카락이 없었고, 두 눈은 움푹 패여 들어갔고, 눈주위는 썩어 있었다. 코에는 구멍이 두 군데 시커멓게 나 있었으며, 의사의 말에 의하면 각막 수술을 할 때 머리카락과 눈섭을 깍아야 세균 감염을 방지한다는 것이다.

2、쉬건리의 사체는 가족이 찾기 전에 이미 해부된 채 내장을 적출 당했다. 만약 DNA 검증을 한다면 야외에서 사체를 발견했을 때 그곳에서 집적 배를 가를 필요가 있겠는가? 당연히 가족이 도착한 후에 검증해야 한다. 그리고 피부 한점이나 머리카락 하나면 DNA 검증이 가능한데 왜 반드시 배를 갈라야 하는가?

3、두 사람의 사체는 버려진 것으로, 위조된 푸커수의 사체는 아직 썩지 않은 상태였으며, 쉬건리의 사체는 마른채 이미 썩은 것으로 보아 둘은 동일한 시간에 죽은 것이 아니다. 그리고 쉬건리의 사체가 마른 상태로 보아 건조한 곳에서 죽은 것으로 추정되며, 전신 나체로 두 다리를 벌리고 두 손은 머리 위로 향한채, 사체가 도랑의 돌 사이에 똑바로 놓여진 것을 보아 돌발사나 자연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푸케수의 사체는 윗도리가 벗겨진 채 물에 불어 있은 반면에 바지는 그대로 입혀져 있었다. 발과 작은 다리는 말라서 수축되어 있었다. 만약 사체가 폭포에서 도랑으로 떨어졌더라면 온 몸이 물에 잠겨져 있었을텐데 발과 작은 다리가 수축하여 말라 있겠는가? 이는 푸케수의 사체가 어떤 사람에 의해 도랑으로 옮겨져 인위적으로 가짜 현장을 만든 것임을 설명해 준다. 또 푸커수의 두 발끝이 똑바로 서 있는 것은 사체가 사람에게 끌려온 증거이거나, 아니면 사망 당시 너무 고통스러웠음을 말하는 것이다.

3, 공안원의 권유에 의해 ‘법정건곤 사악전멸’ 도장을 발견했다. 그러나 수련생들은 이 도장을 가방에다 잘 간수하지 아무 곳에나 함부로 버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이 문을 나설 때 가지고 갔던 검은 가방 안에 들었던 사진기, 열쇠, 은행카드 등은 찾지 못한 상태이다. 그리고 사체부근에서 발견된 곰팡이 낀 쌀도 이상하다.

그들은 문을 나설 때는 쌀이란 것은 가져가지 않았고 그날 영씬(永新)여관에 도착해서 산으로 같이 갔던 할머니의 말에 의하면 그날 여관으로 돌아온다고 했다는 것이다.

4、 정강산의 공안이 실종자 가족에게 2005년 11월 18일(두 사망자가 츠핑에서 영신여관에 갔던 뒷 날)황양계에서 ‘파룬궁’ 진상 자료를 발견했다고 한다. 지리적 위치로 보면 황양계에서 오자봉까지 츠핑 영신여관을 지나야 한다. 그들이 만약 살해된 뒤 오자봉에 고의적으로 갖다 놓여진게 아니라면 왜 영신여관을 지나면서도 그곳에 들리지 않았을까? 함께 있었던 할머니의 말에 의하면 그들은 오후에 돌아오겠다는 약속까지 했다고 한다.

5、 이상으로 분석해 본 결과 의문점은 이처럼 명백한데 공안은 왜 한 마디로 ‘자살’이라고 추정하는가? 왜 사실에 대해 한층 더 조사를 하지 않는가? 후에 그들의 말에 모순이 생기니 ‘돌발사’라고 했다. 사체 두 구 모두 머리카락이 없고 두 눈은 움푹 들어가 있는데 이는 무엇을 설명하는 것인가?

귀주성의 대법수련생 푸커수와 쉬건리는 2005년 11월 7일 65세의 할머니와 함께 집을 나섰다가 11월 16일 저녁에 정강산에 도착했다. 그날 저녁 정강산 츠핑의 개인 여관에서 투숙했다. 17일 오전 8시에 외출할 준비를 하는데 할머니는 몸이 불편해서 함께 갈 생각이 없어져 여관에 남아 있었다. 그들은 할머니에게 다른 곳에 가지 말고 있으라면서 오후에 꼭 돌아온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여관을 떠난 뒤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할머니가 여관에서 5일간 기다렸지만 그들이 오지 않아 6일 만에 정강산을 떠나 귀양으로 돌아갔다.

가족들은 2005년 11월 29일 실종자의 정황을 알게 되어, 12월 4일 정강산에 도착하여 자세한 상황을 물은 다음 즉시 츠핑 공안분국에 실종신고를 했다. 그후 정강산 텔레비전와 매체를 통해 그들을 찾았고 각 여행지로 다니면서 그들을 찾는 광고를 붙였다. 그리고 지형을 잘 아는 사람을 고용하여 길을 잃기 쉬운 산, 강, 동굴 등지로 찿았으나 여전히 찾지 못했다. 그래서 가족은 정강산 시정부, 공안국 시정법위, 시여행국 등 유관부문에 그들을 찾을 수 있도록 협조를 요청했다.

이렇게 그들을 찾아다니는 동안 쉬건리의 누나는 사람을 찾으려는 마음이 급해져 정강산 공안에게 자신의 동생이 파룬궁을 수련한다고 했다. 한 공안이 “우리 공안원 수에 한계가 있으니 당신이 찾아라”고 했다. 그러면서 11월 18일 황양계에서 파룬궁 전단지를 발견했다고 했다. 그래서 가족이 “사람을 체포하지 않았는가?” 라고 물으니 상대방은 “안 잡았다고 한다” 고 했다. 12월 8일 실종자 가족이 정강산의 여행국으로 찾아 가 그들에게 협조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런 뒤 대략 두시간 후 어떤 사람이 전화로 실종된 사람을 찾았다고 하면서 그들에게 뒷 날 여관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뒷 날인 12월 9일에 주씨성을 가진 정강산 국안대대 사람이 그들 가족을 찾아와서 말했다. “실종자는 파룬궁 수련자가 아닌가? 그들 가족 중에는 또 누구가 수련하는가?” 그리고 11월 18일 황양계에서 파룬궁 진상자료가 발견된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에게 자료를 배포한 사람을 체포했느냐고 물으니 그는 모른다고 했다. 이에 “사람을 체포하지 않았으면서 당신은 왜 묻는가?”고 하자 그자는 대답도 하지 않고 가버렸다.

2006년 4월 30일 쉬건리 가족은 정강산 공안국 형사대대로부터 전화를 받았는데 정강산 오자봉에서 쉬건리의 사체를 발견했다는 것이었다. 그런 뒤 5월 9일 오전 9시쯤 쉬의 사체가 발견된 폭포 하류에서 몇 십미터 떨어진 곳에서 푸케수의 옷을 발견했고, 10시쯤에는 폭포 위의 중간지점에서 푸케메이의 사체를 발견했다.

중공이 자행하고 있는 파룬궁 수련생의 생체 장기 적출 뒤 사체를 소각하고 있는 악행이 폭로된 후, 캐나다 전 아태사장이자 국회의원 킬구어 (乔高)(David Kilgour)와 저명한 국제 인권변호사인 마타스(麦塔斯)(David Mates)는 두 달동안 심층 조사를 거쳐 증거를 수집했다. 그런 뒤 2006년 7월 6일에 49페지에 달하는 ‘중공의 파룬궁 수련생 장기 적출 조사 보고’를 제출했다.

신문기자 회견에서 마타스(麦塔斯)는 파룬궁 수련생 장기 적출을 ‘이 지구상에 전례없는 사악’이라 지적했다. 킬구어는“생채로 장기를 적출하고 있는 사실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서운 일이고” 동시에 중공 정부는 일종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정부다”라고 하였다.

(EnglishTranslation:http://www.clearwisdom.net/emh/articles/2006/8/12/76758p.html)
문장완성:2006년 08월 07일

문장위치: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6/8/8/135079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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