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후난 천저우 대법제자
【명혜망 2006년 5월 16일】1994년 7월 15일부터 7월 18일까지,자비롭고 위대하신 사부님께서는 호남 침주 여자배구훈련기지에서 4일간의 파룬궁학습반을 여셨다. 우리는 인연이 있어 이번 학습반에 참석하였고 행복하게 사부님의 곁에서 일생 중 가장 잊을 수 없는 나날을 보냈다. 지금 우리가 직접 겪은 이야기를 동수들과 나누고자 한다.
은사의 법신께서 나의 신체를 청리해 주시다
7월 13일 아침 나와 시참의 참장, 그리고 기사 한 명은 장사에 가서 사부님을 마중나갔다. 차가 형양시에 도착했을 때 107국도는 시멘트바닥을 까는 작업을 하느라 차가 막히고 차들이 아주 길게 늘어섰다. 오후 2시에 우리는 여전히 형양시를 벗어나지 못했다. 7월의 호남은 해가 불같이 뜨겁고 거기에 차들이 줄을 지어 내보내는 열기, 시멘트바닥에서 증발하는 열기로 우리는 마치 스팀 속에 들어간 듯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 나는 본래 신체가 좋지 않았는데 이렇게 힘들어지자 나는 더위를 먹었다. 머리가 부풀어오르고 온 몸이 불편했다. 그 시기 나는 대법을 배운지 얼마 안되어 법리상의 인식도 아주 옅었다. 또 정말로 약을 사먹으려고 했는데 길에는 약국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억지로 장사까지 왔다. 14일, 사부님이 머무실 호텔을 연결하느라고 오전 내내 바삐 보내고 점심 식사 후 공항에 나갔다. 근데 그 날 하필이면 공항 주변 상공은 우뢰와 천둥이 가세하여 사부님께서 탄 비행기는 연착되었으며 거의 황혼시기에 장사에 도착했다. 우리는 사부님을 용원호텔에 모셔다 드렸고 나는 기진맥진한 느낌이 들었다. 언제부터인가 두 발의 엄지발가락에도 두 개의 큰 피 물집이 생겨 길을 걷기 어려웠다. 바로 우리가 사부님께서 머무시는 방안에서 나오려고 할 때 이장현의 한 현급 영도가 사부님을 찾아왔고 몇 마디 인사가 오간 후 사부님한테 신체를 청리해달라고 했다. 사부님께서는 별 말씀 없이 그의 신체를 청리해주셨다. 그 당시 나도 사부님께 신체를 청리해달라고 요구하고 싶었지만 사부님께서 먼 길에 비행기마저 연착한 것을 생각하고 휴식에 영향을 줄까봐 또 남방의 날씨가 이렇게 더워 사부님께서 적응할수 있을까 라는 생각에 사부님한테 요구할 수 없었다.
우리 침주에서 간 세 명은 함께 한 방에 머물렀다. 그 두 수련생은 이미 잠이 들었고 나는 정공을 연마하려고 했다. 방금 앉은 후 사부님 법신이 나의 뒤에 서 있는 것을 보았고 손자세를 하시면서 나더러 바르게 앉으라고 하셨으며 온 몸이 홀가분해졌다. 나는 즉시 잠이 든듯 들지 않은 듯한 날아갈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온 몸이 홀가분하여 아주 편안했다. 모든 통증의 감각이 씻겨나가는 것 같았다. 몇 분 뒤 나는 갑자기 내일 아침 일찍이 서둘려야 하기에 프론트에 가서 결산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산을 마치고 방안에 들어올 때 위 아래로 3층의 계단을 오르면서 행동이 자유롭고 날아갈듯 했다. 조금 전과 전혀 달랐다. 나는 아주 기뻤다. 그리고 은사님의 법신이 나더러 명백하게 신체 청리를 느끼게 해주시어 고마웠다.
사진을 찍을 때 사람이 찍히지 않았다
7월 15일 사부님께서는 여로도 마다하고 머물고 있는 여자배구훈련기지 호텔에서 좌담회를 여셨다. 회의에 시 기공협회와 시 로령위의 대표가 참석했다. 나도 이번 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다. 사부님께서는 회의 참석자들에게 무엇이 파룬궁이고 파룬따파의 특점이 무엇인지를 소개하셨다. 사부님의 소개를 들은 후 파룬궁이 너무 좋고 사부님이 무척 선량하며 무척 자비롭다고 느꼈다. 그러나 기공협회와 로령위의 대표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지방, 시에서 퇴출당한 영도들이고 공산당의 투쟁철학을 신봉하는 것 외에 근본 기공을 믿지 않았으며 더욱이 신불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사부님의 소개를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일부는 사상 속에 저축하며 심지어 비웃었다. 어느 공법은 “금전을 추구하고” 파룬궁은 “신을 추구한다”고 했다. 사부님께서는 화를 내지 않고 그들이 무엇이라고 말해도 개의치 않으셨다. 그러나 그들도 사부님께서 전국에서 가장 저명한 기공사이고 가장 환영받는 기공사임을 알고 있었다. 명예를 위해 회의가 끝난 후 그들은 사부님과 사진을 찍을 것을 요구했다. 그 당시 청해 온 촬영사는 인체 촬영기술이 가장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 모두들 자세를 잘 갖추고 만일의 경우를 위해 동시에 두 장을 찍었다. 사진을 찍은 후 씻을 때 두 장의 필름에는 전부 사람그림자가 없었다. 그들은 이상하다고 여겼다.
소선봉을 유람하다
소선봉은 천하 18대 복 받은 곳이라고 한다. 호남의 저명한 관광지 중의 한 곳이고 침주시와 겨우 3킬로 떨어진 곳에 있으며 한가롭게 더위를 피할 수 있는 좋은 곳이다.
그 시기는 아주 무더운 때였고 사부님께서는 아주 바쁘신 와증에 침주에 오셔서 설법하셨다. 시간 배치가 아주 빡빡하여 4일간에 전부 끝내셔야 했다. 매일 4,5시간씩 설법하셨고 제자들은 마음 속으로 걱정하였다. 침주시 보도참의 책임자는 사부님께 소선봉을 유람하실 것을 요청하셨고 사부님께서는 흔쾌히 승낙하셨다. 7월 16일 현지 수련생으로서 사부님과 동행할 수 있는 행운을 지녔다.
소선봉 산 정상으로 가는 길은 세 갈래 길이고 타 지역의 관광객들은 지도에 의지해서 길을 걸어야 했다. 나는 사부님의 앞에 서서 가이드를 하려고 했는데 사부님의 발걸음이 아주 빨라 우리들은 할 수 없이 사부님을 따라갔다. 사부님께서 가시는 이 길은 원래 내가 인도하려던 길이었는데 사부님께서 이 지역에 대해 아주 익숙히 알고 계심을 설명한다. 사부님의 자신 있는 모습을 보며 나는 사부님한테 “언제 와 보신 적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사부님께서는 대답을 하지 않고 단지 4개의 손가락 내보였다. 우리는 그 뜻을 알 수 없었는데 네 번이나 와 보았다는 뜻인지 아니면 4백년 전에 오셨다는 뜻인지 알 수 없었다. 한참 지나서 사부님께서는 “침주 명대의 집에 대해 아주 익숙합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한 마디 말씀에서 보면 사부님께서는 가능하게 4백년 전에 와보신 것이다.
산 정상에 거의 도착할 때 거대한 돌 하나가 공중에 드리우듯이 우뚝 서 있고 돌에는 바둑판과 발자국 하나가 찍혀있는데 이름은 승선석(昇仙石)이다. 이 돌을 가리켜며 나는 사부님한테 소선이 이 곳에서 도를 얻어 학을 타고 돌아간 이야기를 알려드렸다. 사부님께서는 그가 무슨 소선이 아니고 이 곳(거대한 돌을 가리키며)은 다른 공간으로 통하는 통로라고 말씀하셨다. 산 정상에는 도관이 있었고 이름은 소선관이었다. 우리는 정문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사부님께서 우리의 앞을 막으며 경고하셨다. “우리는 부처를 닦는데 이후에 만약 사찰 도관에 들어가려면 옆문으로 들어가시오.” 그리고 사부님께서는 우리를 이끌고 옆문으로 소선관을 들어갔다. 소선관에서 나온 후 사부님께서는 “산 전체를 제가 모두 청리했습니다. “라고 하셨다.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사부님께서는 무거운 표정으로 “말겁시기의 인류는 마치 썩어빠진 여지(?枝)와 같습니다.”고 하시면서 우리더러 기연을 소중히 여기고 잘 수련하라고 격려하셨다.
당신은 어느 기공사가 우산을 쓰는 것을 보았습니까?
7월 17일 오후 우리는 전처럼 여자배구훈련기지의 등비관에서 사부님의 설법을 들었다. 나는 그 당시 아주 덥게 느껴졌는데 공기마저 응고된 것 같았으며 숨을 쉬기 힘들었다. 얼마 안가서 하늘이 어두워지고 검은 구름이 몰려오더니 우뢰가 울고 천둥이 치며 비를 마구 퍼부었다. 사부님께서 설법을 끝내셨지만 큰비는 여전히 퍼부었다. 비록 끝났어도 우리는 떠날 수 없었고 복도, 휴식실에서 비를 피했다.
내가 출구의 한 복도에 서 있는데 사부님께서 차분하게 강연대에서 내려오시더니 호텔로 가려고 하는 것이 보였다. 사부님께서는 나의 옆을 지나 앞으로 걸어나가셨고 마치 비가 오는 것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즉시 옆의 한 수련생의 손에서 우산을 건네 받고 펼친 후 사부님을 호텔로 배웅하려고 했다. 사부님께서는 나를 바라보면서 또 한편으로 길을 가면서 말씀하셨다. “당신은 어느 기공사가 우산을 쓰는 것을 보았습니까?” 그리고는 빗속으로 걸어가셨다. 나는 마치 무엇을 깨달은 것 같았고 우산을 돌려준 후 사부님의 뒤를 따라 사부님을 호텔로 모셔드렸다.
재미있는 것은, 큰비가 계속 내렸지만 사부님은 길에서 온 몸에 빗방울 흔적 하나 없었고 나도 비를 맞지 않았다.
문장완성: 2006년 05월 15일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6/5/16/127893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