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혜망 2006년 5월 9일】2000년 12월 30일,나는 베이징 톈안먼에서 플래카드를 펼쳤다는 이유로 시청(西城)간수소에 불법 감금되었다. 같이 잡힌 동수들이 많았다. 모두들 사악에 호응하지 않고 이름과 주소를 대지 않았으며 사진을 찍지 않았고 지장도 찍지 않으면서 불법 체포에 단식항의하면서 무조건 석방할 것을 요구하였다. 모두에게 번호가 매겨졌는데 나는 779번으로 되어 있었다. 2001년 1월 30일, 베이징에는 대설이 내리기 시작하였다. ‘사재동’이라 불리는 이 간수소에서 우리는 단식 항의하고 있었다. 경찰은 매우 당황해하면서 고래고래 고함질렀다. “너희들이 이름과 주소를 대지 않으면 다 동북으로 보낼거야!”
2001년 1월 6일 저녁 아홉시쯤이라고 기억된다. 많은 동수들이 마당에 불려나갔는데 먼저 맞은 편 복도에 서 있던 동수들 4~50명이 불려나갔다. 뒤이어 우리 이쪽 복도에 서 있던 동수들도 불려나갔다. 문어귀에는 경찰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총을 든 경찰들이 대법제자들을 빙 둘러싸고 있었다. 악경이 번호를 부르면서 한 사람씩 강제로 차에 끌어 올렸다. 한 경찰이 “너희들을 동북 선양 xxx에 싣고 갈꺼야.”하고 말했다. 구체적인 지점은 잘 듣지 못했다.
차가 한 대 한 대 떠나갔다. 마당에 서 있는 나를 누구도 상관하지 않았다. 한 경찰이 나보고 “넌 어찌된 일이야? 번호가 몇 번이지?”하고 물었다. 나는 “779번”하고 대답하였다. 한 경찰이 “저 놈은 돌려보내”하고 소리쳤다. 이리하여 나는 선양에 가지 않게 되었다. 이번엔 남자 대법제자들 이였었는데 후에 들은 소식에 의하면 여성 대법제자들도 많이 실려 갔다는 것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두 여성 동수도 선양에 끌려갔었다.
감금실에 돌아 온 후 우리는 대법제자들이 선양에 실려 가는 비디오를 보게 되었다. 함박눈이 내리는 큰 길로(依维克) 차가 달리고 있었는데 차를 뒤따르면서 찍은 것임을 한눈에 보아낼 수 있었다. 악경들은 이런 비디오로 대법제자들을 위협하려 하였다. 뜻인즉 앞으로 우리도 이렇게 선양으로 보내진다는 것이었다.
이틀이 지난 뒤 나는 저녁에 석방되었다. 나와 함께 톈안먼에 가서 플래카드를 펼쳐 들었던 두 여성수련생은 한동안 실종되었었다. 그녀들은 선양에 간 후 잔혹한 박해로 몇 번이나 사경에서 헤맸다고 하였다. 그녀들의 가족이 전국각지로 다니면서 그들을 찾았었는데 5개월이 지난 뒤에야 그들은 그 마귀굴을 떠나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나를 돌려보내면서 한 경찰이 나보고 “젊은이, 다신 이곳에 오지 말게나. 우린 자네들이 좋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 우린 이미 여러 날 쉬지도 못했어. 매일 몇 백 명씩 들어오니 우리가 도저히 배겨낼 수 없구만.”하고 말했다. 매일 몇 백 명씩 시청(西城) 간수소에 들어온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수련생들이 선양에 보내졌는지 모른다.
선양 쑤자툰 강제수용소에서 파룬궁 수련생들의 생체에서 장기적출한 사실이 폭로된 후 나는 벌써 2000년 말과 2001년 초에 중공악당이 이미 수련생들을 대량으로 선양에 전이시켜 박해를 하기 시작한 그때 일이 생각났다. 중공악당은 이미 쑤자툰 강제수용소에서 이런 살인극을 벌일려고 사전에 모의한 것이었다. 우리는 국제조직에서 즉각 중공의 모든 감옥, 노교소에서 파룬궁수련생들을 박해한 모든 죄악을 철저히 조사하여 이런 죄악이 더 지속되지 않게 하기를 간절히 호소한다.
문장완성: 2006년 5월 8일
문장발표: 2006년 5월 9일
문장갱신: 2006년 5월 8일 21:51:38
문장분류: 협력 조사
원문위치: http://www.minghui.ca/mh/articles/2006/5/9/12722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