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즈판(紫帆)
【명혜망 2006년 3월 23일】선양시 쑤자툰 비밀강제수용소에 수감된 대법제자들은 잔인무도하게 박해 당하고 있다. 대법을 함께 수련하고 있는 우리의 동수들은 사악의 무리들에 의해 생체의 내장이 적출되고 있으며, 각막이 벗겨져 고가에 매매되고 있고, 육신은 화장로에 던져져 한 가닥 한 가닥 하얀 연기로 변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보다 더욱 잔인한 중공 사악의 무리들은 전 세계인의 분노와 질책을 반드시 받고야 말 것이다!
나는 컴퓨터 사이트에서 글을 읽을 때 끊임없이 눈물이 솟아났으며 마음은 줄곧 무거웠다. 2001년 신정 기간동안 스촨에서 온 100여 명의 대법제자들과 함께 허베이시 산허시 교통대대에 함께 갇혀 있었던 생각이 났다. 나의 마음은 피가 흘려 내린다! 나는 글로써 공소할 것이다! 중공 사당의 파쇼 폭행을 공소할 것이다! 나는 글로써 기만당해 독해되어 있는 중국 국민들의 선한 마음을 일깨워줄 것이다! 우리 중국인 개개인에게는 그들의 부모와 형제 자매, 친척과 친구가 있다. 만약 그들이 사악의 무리들에게 끌려가 내장이 도려지고 각막이 벗겨져 높은 가격에 매매되고 있다면, 폭리를 취한 후 육신은 화장로에 던져져 한 가닥 하얀 연기로 변하고 있다면 당신은 심정은 어떻겠는가? 당신은 이에 대해 못 본척하면서 침묵할 수 있겠는가? 중공 사당이 해체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이렇듯 비참한 사건이 아마 당신 가족의 몸에도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선량한 중국인들이여, 당신들은 한번 곰곰히 생각해 보라, 이것은 두렵지 않은가?
2001년 신정을 전후로 스촨에서 베이징으로 법을 실증하러 온 대법제자들 대부분은 빈곤한 지역에서 왔는지라 얇은 옷차림이었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는 스촨의 특산물인 대바구니를 메고 왔고, 일부 대법제자들은 아이를 데리고 오기도 했다. 그들은 “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진선인은 좋습니다”를 알려주기 위해 며칠동안 기차에 몸을 싣고 온 것이었다. 북경에 도착하기 전, 그들은 몇 정거장 먼저 내려 버스를 타고는 베이징 톈안먼(天安門)에 가려고 했다. 하지만 예상치않게 베이징으로 들어가는 길목은 모두 악경들이 봉쇄해 놓고 있었는데 그들은 허베이성 산허시에서 악경에게 붙잡혔다. 그들 모두는 자신들이 근무하던 회사에 보내지면 폭행당해 죽거나 노교소에 보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비록 악경의 전기곤봉에 맞더라도 입을 꾹 다문채 어디서 왔는지 말하지 않고 있었다.
스촨 주 베이징사무실 요원이 사람을 선별하려고 왔다. 그들은 스촨에서 온 사람들 일부는 가려내어 다시 스촨으로 보냈다. 나는 스촨 대법제자들이 한결같이 모두 입을 다문채 말하지 않는 것을 보았다. 산허시의 교통경찰과 스촨 주 베이징 사무처의 요원은 “너희들이 이름을 밝히지 않으면 너희들을 아주 먼 수용소에 보낼 것이다. 그 곳에 갇히게 되면 누구도 너희들을 알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다.
2001년 신정 때 허베이성 공안청 책임자는 기자들을 무더기로 데리고 왔다. 그들은 내가 대학 교수임을 알고는 모두 놀라면서 카메라를 먼저 나에게 들이댔다. 나는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떻게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TV에서는 파룬궁이 사람을 해치는 공이라고 했는데 정부의 선전기구는 전부 날조된 모함입니다… …”라고 했다. 기자들은 이어서 몇몇 할머니를 취재했는데 모두 아주 말을 잘하는 것이었다! 우리 대법제자 중 문화수준이 비록 높지 못한 사람일지라도 나는 그들에게서 사부님과 대법에 대한 단호한 마음을 보았는데, 정말이지 그 모습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 당시 나 또한 이름을 밝히지 않았는데, 만약 내가 현지 공안에 끌려가면 노동개조 아니면 ‘세뇌반’에 보내질 것이고, 나의 상사 역시 내가 상경함으로써 이에 ‘연루’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후 내 이름이 밝혀진 뒤 산허시 교통대대는 XX시 공안국 주 베이징 사무처의 공안요원에게 나를 데려가게 하려고 전화를 해도 연결이 되지 않았다. 이와 동시에 교통대대는 또 나의 근무처 상사에게 연락하여 베이징에서 나를 데려가게 했다. 그래서 하루종일 상사를 기다렸지만 오지 않자 교통경찰은 나를 풀어주는 것이었다. 몇 달 뒤 내가 근무지에 갔을 때야 비로소 왜 데릴러 오지 않았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 당시 원장은 5명의 선생님과 함께 북경으로 떠났는데 비행기가 4시간이나 연착되는 바람에 내가 떠난지 반시간 후에서야 도착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5명의 선생님은 곧장 베이징역으로 갔지만 내가 탔던 기차는 금방 떠나버렸다고 했다.
나는 1995년부터 희망공정에서 실학하는 아동들을 도와주었는데, 이는 몇 년간 빈곤한 산골에서 직접 중국의 양국분화된 상황을 체험하기 위해서였다. 2001년 베이징에서 돌아온 그날 나는 친구집에서 하루밤을 지내면서 XX시 공안국이 나를 체포하려고 할 것이니 집에 돌아갈 수 없으며, 또 고향에도 돌아갈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는데로 후난의 가난한 산골로 떠나기로 했다. 후난에 도착한 후 나는 낡은 짚차를 임대하여 높은 산길 여러 곳을 돌고 돌았다. >을 지닌채 ‘진선인’ 을 후난의 가난한 산골에 전해주었다. 그곳에서 보름을 지낸 뒤 산골을 떠날 때 나는 >과 함께 수백원의 돈을 남겨 놓았다. 몇 달 뒤 학교에 돌아온 후 비로소 알게 되었는데, 산골마을 사람들이 나의 상급자에게 두 번이나 감사편지를 보냈다는 것이었다. 대학에서 이렇듯 좋은 선생님을 육성시켜 주셔서 감사 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그 마을 사람들은 아직도 내가 공안국의 체포대상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몇 년 동안 스촨 대법제자들의 모습이 계속 나의 머리에 남아있었는데, 그 당시 나와 스촨 대법제자들은 가장 잊기 힘든 인생의 나날을 보냈다. 나는 70여 세쯤 되는 할머니가 악경에게 맞아 어리에 피가 나는 것을 보고는 악경에게 다가가 “당신은 이 할머니가 왜 베이징에 왔는지를 물어 보세요. 할머니는 파룬따파가 좋기 때문에, 진선인이 좋기 때문에, 베이징에 왔다고 말씀하시잖아요. 이 말의 어디가 잘못되었나요? 당신은 할머니의 머리를 때려서 피를 흘리게 했는데 이에 대해 책임지세요.”라고 말했다가 나마져 악경에게 맞고는 독방에 갇히게 되었다. 그날 밤 나는 또 대회의실에서 악경이 전기곤봉으로 스촨 대법제자의 얼굴부위를 시커멓게 지지고 태우면서 주먹질과 발길질을 하는 것을 직접 보았다. 대법제자는 땅바닥에서 이리 저리 뒹굴었는데, 나는 이를 보면서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북방 날씨는 이미 영하 몇 도였으며 음침한 차고에서 우리 대법제자들은 며칠동안 물 한모금 밥 한술도 먹지 못한채 갇혀 있었다. 몇몇 여성 대법제자들은 함께 껴안고는 통곡했는데, 그들의 얼굴은 악경의 전기곤봉에 시커멓게 타있어 나도 따라 울었다. 스촨 여대법제자가 선도하여 우리는 계속 사부님의 >와 >을 외웠다.
허베이성 산허시의 교통대대에서 내가 본 스촨 대법제자들은 너무나 소박했고, 그들의 마음은 너무나도 순정하고 선량했다. 사부님과 대법에 대해 반석과 같이 단호하여 사악의 전기곤봉을 마주하고도 그들은 끝끝내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그들은 정말로 대단했다! 그들 중에는 젊은 사람과 연세 많은 이들도 있었는데 나는 그들과 친절하게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들과 함게 손을 잡은 우리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한 대법제자가 말했다. “누님, 우리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그렇다! 우리는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스촨 대법제자들 대다수는 자신의 실명을 밝히지 않았다. 내가 그들을 갓만나 친절하게 이야기를 나눈 뒷날부터 다시는 그들을 보지 못했는데 악경에게 끌려간 것이었다. 악경은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이 끝내 이름을 밝히지 않으면 우리는 너희들을 아주 먼 수용소에 보낼 것이다. 그 속에 가두면 누구도 너희들을 알 수 없다.”
지금의 나는 더이상 생각을 할 수 없다. 선양 쑤자툰 비밀수용소의 화장로에는 하얀 연기가 뿜어지고 있다. 나의 마음은 순간적으로 꼬집힌듯이 아프고 내 마음에는 피가 흐르고 있다! 우리는 반드시 정념정행하여 철저히 사악을 제거할 것이다!
문장완성:2006년 03월 22일
원문위치: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6/3/23/123501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