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혜망 2004년 3월 17일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하나의 진실한 이야기를 들려주겠다.
내가 알고 있는 리구이메이(李桂梅)라는 한 친구는 허베이성 츠청현 청관진 셴민촌(河北省赤城縣城關鎮憲民村)에 살고 있으며 法輪功(파룬궁) 수련생이다. 그녀는 1995년에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신체가 매우 건강하며 약을 전혀 먹지 않고 있다. 매일 책을 보고 연공을 하며 “쩐싼런(眞善忍)”의 표준에 따라 자신을 요구하고 가족사이의 관계도 매우 좋다. 혹여 가정에서 모순이 나타나면 그녀는 하나의 좋은 사람의 표준으로 잘 해결해 나간다. 그녀의 남편도 매우 부지런하고 성실한 사람으로서 부부가 함께 채소를 가꾸며 가정의 경제수입도 괜찮은 편이다. 그들은 또 남을 돕는 것을 좋아하는데 친척과 친우들이 경제적으로 도움을 요청하면 늘 거절하지 못한다. 두 아들도 착실하며 공부도 잘하여 정말로 행복한 가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1999년 7월 20일 한 차례 파룬궁 수련생을 탄압하는 운동이 시작되었다. 리구이메이는 인민에게 부여한 헌법의 권리에 따라 베이징(北京)으로 상방(上訪)하러 갔다. 그녀가 베이징(北京)으로 가는 도중 공안국이 알고 그녀를 공안국으로 붙잡아 갔다. 1과 과장 가오촨핑(高全平)등 5명이 그녀를 심문 하였으며 저녁에는 그녀의 집까지 수색하였다. 그런 후 그녀에게 “사회질서를 혼란시켰다”는 죄목을 씌워 구치소에 15일 동안 구류시켰다.
2001년 5월 말에 츠청현 현(縣) 위원회 서기 취젠궈(邱建國)와 현 610사무실 지시로 댜오어(刁鄂)에서 “전향반(轉化班)”을 만들었다. 5월 30일 각 단위 사업장에서 본 사업장의 파룬궁 수련생들을 “전향반”에 보냈다. 같은 날 청관진의 촌 간부들은 리구이메이를 그곳에 보내기로 하였다. 진장(鎮長) 겸 서기인 궈원쿠이는 리구이메이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이 파룬궁을 수련하여 우리에게 많은 시끄러움을 가져오기 때문에 사람을 보내 지켜야하고 또 명절날에도 제대로 쉬지 못한다면서 원망하였다.”라고 하였다. 그녀는 궈서기에게 “내가 95년도부터 파룬궁을 수련하였는데 언제 당신들에게 나를 지키라고 하였는가? 이것은 장xx가 좋은 사람을 박해하는 것으로써 그가 국가 주석이고 군권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인데, 자신이 직접 할 것이지 무엇 때문에 위에서부터 아래로 층층이 압력을 가하며 누가 탄압을 하지 않으면 누구든 물러나게 하는데 이것이 그래 자신이 나쁜 일을 하면서도 다른 사람까지 핍박하여 나쁜 짓을 하게하는 것이 아니란 말인가? 우리는 박해를 받고 있으며 당신들도 박해를 받고 있다. 명절날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일요일에도 쉬지 못하는 것이 장xx가 해치는 것인데 나를 원망할 일인가?”라고 말하였다.
5월 31일 오후 진(鎮) 정법위원회 서기 쩌우징(鄒靜)은 리구이메이, 왕춘메이(王春梅)와 면담을 하였는데 그들에게 전향하라고 하면서 “4서(四書)”를 쓰라고 하였지만 그녀들은 쓰지 않았다. 쩌우징은 말하기를 “댜오어에 가서 ‘전향반’에 참가하라”고 하였다. 그날 저녁 청관진의 쩌우징, 롄성(連勝) 및 파출소 류쥔(劉俊) 등은 그녀들을 댜오어 “전향반”에 보냈다. 취젠궈는 자신의 관직을 보존하기위해 장xx의 지시에 따라 파룬궁 수련생들을 박해하면서 백성이 죽고 사는 것을 전혀 관계하지 않았다. 리구이메이는 남편과 함께 십여 무(畝, 6.6아르/1무)의 채소밭을 가꾸고 있었고 그 때가 바로 농번기였는데 갑자기 그녀가 잡혀가 많은 땅을 남편 혼자서 일구었다. 두 아들 중 한 아들은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시험 준비하고 있었고 작은 아들은 고등학교 시험을 보아야 하기에 모두 긴장하고 있는 시기였는데 이런 관건적인 때에 그들의 어머니가 갑자기 잡혀가다보니 단란하던 가정이 순식간에 허물어져 버렸다.
리구이메이의 모친은 갑작스런 소식을 들은 후 딸에 대한 그리움이 극에 달한 나머지 끝내 병을 얻어 몸져눕고는 3일 후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남편과 오빠가 청관진에 찾아갔는데 쩌우징은 그들을 데리고 현(縣) 610사무실로 가서 그녀가 외출하도록 허락을 받고 그녀를 집에 데려가 모친의 장례식에 참가하게끔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전향반”의 부주임 장유밍(張有明)은 청관진에서 돈(“전향반”을 꾸리는데 드는 비용 500위안, 사람을 지키는데 300위안, 식비 매달 150위안)을 내야 사람을 내보낼 수 있다고 하였다. 이튿날 청관진에서 돈을 내고나서야 사람을 내보냈다. 그녀가 집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모친을 관속에 넣은 후였다. 가족들은 그녀에게 “어제 저녁에 밤늦게까지 기다렸는데 그들이 사람을 내놓지 않는다고 하기에 할 수 없이 노모를 관속에 넣었다”고 하였다. 그녀는 모친의 관에 엎드려 대성통곡을 하였다. 이러한 박해가 없었다면 그녀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모친에게 효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평소에 부모님께 효성이 지극 하였다. 부모님을 도와 많은 일들을 하였다. 그녀가 잡혀간 후 노모는 동네사람에게 “우리 딸이 언제 돌아올 수 있는지? 딸이 몹시 보고 싶다.”고 말하였다. 노모는 딸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어찌하여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하는 사람을 잡아가는가? 노모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지 못한 채 의문을 품고 세상을 떠났다.
2001년 음력 9월 13일 리구이메이의 남편은 트랙터로 밭을 갈면서 한편으로 생각하기를 오늘은 아내의 생일로 예전 같으면 한집 식구가 단란히 모여앉아 즐겁게 보냈으련만 현재는 아내가 “전향반”에 갇혀 있는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괴로웠다. 생각하고 생각하다보니 조심하지 않아 트랙터가 골짜기에 떨어졌다. 만약에 사람이 트랙터와 함께 떨어졌다면 결과는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는 떨어지는 순간 다행스럽게 트랙터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는 기어일어나 자기 몸을 살펴보았다. 다친 곳이 없었으며 발목이 조금 벗겨졌을 뿐이었다. 마을로 가서 몇 사람을 불러와 골짜기에서 트랙터를 바로 세웠다. 트랙터를 자세히 검사하여 보았으나 별 문제가 없었으며 몇 곳이 조금 찌그러졌다. 수련하는 사람은 다 알고 있는데 한 사람이 수련하면 온 집안이 득을 본다. 사부님의 자비가 리구이메이의 남편을 보호하였던 것이다.
“전향반”에 갇힌 파룬궁 수련생들은 인신의 자유를 박탈당한 것 외에도 육체적, 정신적으로 박해를 받고 있었다. 그들을 전향시키기 위해 핍박하고 대법과 리훙즈(李洪志) 사부님을 모욕하는 말을 듣게 하였으며 듣지 않을 때는 “전향반”의 주임인 량즈빈(梁志斌)이 현(縣) 610사무실에 보고한다. 현(縣) 정법위원회 서기 쑹완구이(宋萬貴)는 형사경찰대(刑警隊)를 끌고 “전향반”에 와서는 한바탕 행패를 부린다. 수련생들에게 수갑을 채우고 뺨을 때리며 전기 충격기로 지진다. 화이뎬잉(槐殿英)은 맞아서 허리가 다쳐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으며 쑨푸친(孫富琴)은 구타당한 후 간수소에 갇혔다. 그들은 표면상에서는 교육을 하고 전향을 하는 것 같지만 사실 배후에서의 수단은 극히 잔인하다. 리구이메이는 4차례나 단식항의를 하였다. 두 번째는 8명의 수련생들이 함께 단식을 하였다. 단식을 시작한 3일 만에 취젠궈와 왕충후이(王崇輝, 현 정법위원회 부서기 겸 610주임), 우화이밍(吳懷明, 선전부 부장), 청관진의 쩌우징 등과 법원의 사람들까지 모두 “전향반”에 와서 그들을 전향시키려고 하였다. 취젠궈는 : “연공을 하지 않겠다는 보증서”를 쓰면 석방한다고 하였다. 방안을 가득히 메우고 서있던 전향일을 하는 사람들이 모두 리구이메이에게 보증서를 쓰라고 권하면서 여기서 이런 고생을 할 것이 뭣이 있느냐? 집에 가서 조용히 연공을 하면 누가 알겠느냐고 하였다. 그녀는 “우리 파룬궁 수련은 바로 “쩐싼런(眞善忍)”을 수련하는 것인데 내가 “연공을 하지 않겠다는 보증서”를 쓰고 집에 가서 계속한다면 이것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물었다. 우화이밍과 왕충후이가 들어와서 리구이메이를 설득하였다. “그저 보증서만 쓰면 되는데 뭐가 어려울 것이 있느냐, 왜 꼭 쓰지 않겠다고 하는가, 보라 다른 사람들이 모두 쓰지 않았는가.” 리구이메이는 그들에게 말했다. “당신들이 한말을 나는 믿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쓸지언정 나는 쓰지 않겠다.” 쩌우징은 “보증서를 쓰기만 하면 가지고 가서 취서기를 만나 자기가 사정하여 그녀를 내보내겠다고 하였다.” 리구메이가 “내가 써 내가만 하면 취젠궈는 나를 금방 내보낼 수 있으며 누구한테 사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아무 것도 쓰지 않았다. 당신이 나를 보증서고 데리고 나갈 수 있는가?”라고 묻자 그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하루 동안 권고하였으나 리구이메이는 확고하게 쓰지 않았다. 취젠궈는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을 데리고 가버렸다.
2001년 12월 2일 사법부의 세뇌 담당을 맡은 한 사람이 리구이메이를 불러 “전향(轉化)”하라고 설득하였다. 그때 마침 세뇌반의 부주임 장유밍이 들어오더니 “전향하지 않겠다면 계속 여기에 남아 있어라”라고 하였다. 리구이메이는 그에게 “전향한다는 것은 반역자와도 같은데 나는 전향하지 않을 것이며 여기서 나갈 것이다.”라고 하였다. 장유밍은 “여기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곳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곳이다.”라고 하였다. 리구이메이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날 저녁에 리구이메이는 장유밍에게 정식으로 선포하였다. “오늘부터 나는 단식을 시작할 것이다. 당신들의 나에 대한 불법 감금에 항의한다.” 그녀가 단식을 시작한 후 전향반의 주임 리징핑(李景平)은 (량즈빈이 후임 대리) 밥을 들고 와서 설득하였다. “우리 협의합시다. 나가고 싶다면 다른 방법을 생각하면 안 되겠는가? 왜 꼭 단식을 해야 하는가? 매우 괴로울 텐데, 당신의 남편과 자식들 또한 얼마나 좋아할 것인가 나는 정말 당신의 가족이 부럽습니다. 그들을 생각해서라도 어서 드세요.” 리구이메이는 말하였다. “내가 파룬궁을 수련하여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하는데 무엇이 잘못 되었습니까? 어찌하여 나를 꼭 전향시키려고 하는 것입니까? 나를 여기에 가둬놓아 자식을 돌볼 수 없고 남편이 혼자 집에서 엄마 노릇까지 하고 있습니다. 나를 여기에 가둬놓고 나가지 못하게 하지만 나 또한 양심을 어기는 일을 할 수 없기에 오직 생명으로 진리를 수호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를 내보내면 나가고 내보내지 않으면 내가 여기서 죽어도 진리를 견지하다가 죽는 것입니다.”
이튿날 리징핑은 또 그녀에게 와서 밥을 먹으라고 설득하였다. 반나절이나 설득하였지만 그녀가 먹지 않자 리징핑은 “네가 먹지 않고 앞장서서 단식을 하면 간수소에 보내겠다.”라고 하였다. 리구이메이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으며 속으로 “진리를 견지하기 위해서라면 감옥에 가는 것도 겁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죄를 범한 것도 아닌데 좋은 사람이 어떻게 간수소에 가야 하는가? 간수소는 범인을 가두는 곳이다.”라고 생각하였다. 리구이메이가 단식을 하고 있을 때 주방장 아저씨가 계란을 볶아가지고 그녀에게 왔다. 왜냐하면 평소에 그가 밥을 짓느라 바쁠 때 리구이메이는 늘 그를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사부님께서 하나의 좋은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신 표준에 따라 파룬궁을 수련하여 하나의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며 어디서나 당연히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 나이가 드신 한 주방장 아저씨 그녀를 보고 “당신같이 이렇게 좋은 사람이 여기서 고생을 당하고 있는 것을 보니 내 마음이 괴롭다. 내가 당신에게 주려고 만든 것이니 어서 먹어요.”라고 하였다. 그녀는 “저는 그 마음만을 받아 드리겠습니다. 저는 좋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냥 여기 있으면 안 되지요. 집에 돌아가 밥을 먹을 것입니다. 너무 괴로워하지 마세요.”라고 하면서 도리어 그들을 위로하였다.
단식을 시작한 지 3일째 되는 날 저녁 리징핑은 “전향반”에서 요원 7~8명의 사람을 데리고 와 리구이메이에게 밥을 먹으라고 위협하면서 “먹지 않으면 강제로 음식을 투입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들은 리구이메이의 태도가 확고한 것을 보고는 리징핑은 사람들을 먼저 돌려보내고 또 한참이나 그녀를 설득하였는데 그녀는 계속 먹지 않았다. 리징핑은 현 정법위원회 서기 쑹완구이에게 지시하여 사람을 내보내라고 하였다.
단식을 시작한 지 5일 만에 셴민촌 서기 장원어(張文娥)와 리구이메이의 남편은 청관진 궈원쿠이의 통지서를 받았는데 댜오어 “전향반”으로 가서 사람을 데려가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전향반”으로 갔다. 리징핑은 리구이메이의 남편에게 450위안을 내야만 사람을 데려갈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호주머니에 260위안 밖에 없어 택시기사에게 줄 돈 50위안을 남겨놓고 나머지 210위안을 주었는데 모자라는 부분은 차용증을 쓰고 나서야 비로소 사람을 데리고 갈 수 있었다. 리구이메이가 집에 도착하여보니 집은 엉망진창이었다. 모든 물건들이 어지럽게 곳곳에 흩어져있었다. 이것을 보는 순간 그녀는 매우 괴로웠다. 큰 아들은 이미 대학에 갔고 둘째아들은 학교에서 돌아왔는데 전에 비해 몹시 수척해져 있었다. 평소에 웃고 떠들기 좋아하던 아들이 말수가 적었다. 그녀는 자신의 가슴에 대고 물어보았다. “전향반”에서 우리 백성들에게 도대체 무엇을 가져다주었는가? 그녀가 집에 온 지 3일이 지나서야 아들은 입맛도 좋아졌고 얼굴에는 웃음이 피어났으며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야기는 끝났다. 파룬궁 수련생들 가운데서 이러한 일들이 너무나도 많은데 이것은 그 중에 한 가지 일에 지나지 않는다. 파룬궁이 92년도에 시작되어서부터 오늘날까지 전 세계 60여개 국가에 전파되었으며 오직 중국에서만 박해를 가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선량한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해 진실로 사색해 보아야 하며 정의의 편에 서서 중국에서 발생하고 있는 이 박해를 저지해야 한다. 이 한 차례의 박해 중에서 국가는 얼마나 많은 인력, 물력, 재력을 투입하였는지, 츠청현에서만 하더라도 2001년에 인민들이 피땀으로 번 돈 80만 위안을 사용하였다. 이렇게 많은 돈을 낭비하면서 박해를 가하고 있지만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은 적어지는 것이 아니라 갈수록 더욱 많아지고 있다. 그래 중국에서 좋은 사람이 많아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닌가? 선량한 세인들이여 어서 빨리 깨어나라! 장씨 집단에게 즉시 박해를 중지하라고 호소하여 하루 빨리 이 박해를 끝내야 한다.
문장완성 : 2004년 3월 16일
문장발표 : 2004년 3월 17일
문장갱신 : 2004년 3월 17일 10:52:13 AM
문장분류 : 박해진상[迫害眞相]
원문위치 : http://www.minghui.ca/mh/articles/2004/3/17/70166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