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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약 파룬궁을 연마하지 않았다면 97년도에 죽었을 텐데 만약 오늘 칼을 나의 목에 들이댄다고 하여도 나는 역시 연마할 것이다!

[명혜망 2004년 1월31일]나는 탠보제(田寶杰)라고 부르며 올해 45살이다. 집은 요녕성 금주시 흑산현 태화진 왕헌촌에 있다.

나는 어릴 때부터 기관지염을 앓고 있어 주사 맞고 약을 먹는 것을 밥 먹듯 하였다. 건강한 신체가 없어 여러 해 동안 병마 속에서 아주 간고한 생활을 하였다. 후에 나의 병은 엄중해졌고 폐까지 확산되어 폐기종으로 변하였다. 매번 치료하는데 드는 비용은 적을 때 몇 백 원이고 많을 때는 천여 원이었다. 97년 신정이후 병이 급속도로 악화되어 폐기종 말기가 되었으며 밤낮으로 기침하고 대량으로 가래침을 뱉었다. 약이 효과가 없어 전신이 부어나고 복부는 아주 크게 부었다. 온 하루 앉아있지도 누워있지도 못함으로써 수면을 취할 수 없었다. 한 쌍의 어린 아들딸을 마주하고 나는 정말로 생사가 어려웠는바 온 하루 눈물이 그치질 않았고 하루를 보내는 것이 일년을 보내는 것과 같이 고달팠다.

타향의 친척이 나의 병이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서 특별히 백여리 밖에서 달려와 나에게 法輪功(파룬궁)을 소개하였다. 법을 얻은 이튿날 나는 곧 약먹는 일을 중단했고 셋째 날부터는 사부님께서 내 신체를 정화해 주셨다. 저녁에는 계속 구토하여 입에서 쓴물이 대량으로 나왔다. 네 번째 되는 날 나는 헤아릴 수 없이 변을 배설하기 시작하였다. 일주일 후 나의 온 몸의 부기와 높이 부어있던 복부는 전부 나아졌으며 100일이 넘도록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던 나는 마침내 회복되었다. 나는 집안일을 하였다. 20일후 마침 봄이 되어 씨앗을 파종하는 시기에 나는 밭에서 일하게 되었다.

내가 새로운 삶을 얻은 경력은 우리 마을에서 아주 큰 진동을 일으켰다. 주위의 마을사람들은 너도나도 대법을 배우는 행렬에 들어섰다. 이로부터 우리 집도 자연스럽게 연공장이 되었고 나의 딸도 연공인이 되었다. 마을사람들은 대법을 수련한 후 몸과 마음이 많은 이익을 얻게 되었다.

99년 5월부터 파출소에서는 끊임없이 집에 와서 나를 괴롭혔는바 내가 마을의 XX의 두목이라고 하였다. 나는 경찰에게 내가 대법 속에서 얻은 이익을 이야기하였고 그들은: “우리가 상관하려는 것이 아니라 위에 명령이 있음이며 공안부의 명령이다.”고 하였다.

99년 7월20일 전국에서는 통일적으로 대체포를 감행하였고 우리는 금주시정부에 가서 청원하여 붙잡힌 法輪功(파룬궁)수련생들을 석방하라고 요구하였다. 이튿날 또 북경에 가서 청원하였고 갓 차에서 내리자 경찰이 파룬궁수련생들을 붙잡는 것을 만났다. 나와 딸은 뛰쳐나갔다. 집으로 돌아온 후 현지파출소에서 나를 찾아왔다. 동시에 나의 대법 책과 사부님의 법상 등 물품을 몰수하고 나를 촌정부에 데려갔다. 경찰은 나더러 서명하여 파룬궁을 연마하지 않겠다고 보증하라고 하였다. 나는: “내가 法輪功(파룬궁)을 연마하지 않았다면 97년도에 죽었을 텐데 오늘 나는 2년을 더 살았는바 칼을 목에 들이댄다고 하여도 나는 연마할 것이다!”고 말했다. 경찰은 화가 나서 나를 2시간이 넘도록 가두었다. 나중에는 나에게 아직 일이 끝난 것이 아니므로 이후에 또 당신을 찾겠다고 하였다.

며칠에 한번씩 파출소에서는 또 나를 찾았고 나더러 수련을 포기하라고 핍박하였지만 나는 그들의 요구에 대답하지 않았다. 9월경의 어느 날 파출소에서 사람이 오더니 나의 신분증을 몰수하더니 지금까지 돌려주지 않았다. 10월말 나와 딸은 촌간부에게 속아 촌정부로 갔다. 원래 전 마을의 몇 십 명 되는 수련생들이 모두 붙잡혀온 것이었다. 진정부에서는 여러 명의 간부들을 파견하였고 또 전체 촌간부를 소집하여 전문적으로 파룬궁을 탄압하고 있었다. 진장(鎭長)은 우리더러 파룬궁과 결별하라고 하며 사람마다 보증을 쓰도록 명령하였다. 나중에 북경에 들어가 청원한 우리 몇 사람들은 불법으로 촌정부에 감금되었으며 날마다 진장(鎭長)이 선두에 서고 한 무리 큰 관리 작은 관리들이 윤번으로 와서 우리를 “전향”시켰다. 나의 딸은 협조하지 않았고 8일 후에 우리는 석방되었지만 유독 나의 딸은 진파출소에 갇혔다. 나중에 집에 와서 하나 밖에 없는 컬러텔레비전을 벌금으로 저당잡고 나서야 비로소 석방해 주었다. 컬러텔레비전은 지금도 돌려주지 않고 있다.

2002년 봄, 악인의 신고로 나는 핍박에 의해 집을 떠나 떠돌아다니게 되었다. 불법무리들은 나의 남편과 어린 아들을 위협하여 곳곳에서 나를 찾도록 하였다. 시어머니는 조급하고 화가 나서 옛 병이 도져 갈수록 병이 심해졌으며 생활은 자립할 수 없게 되었다. 같은 해 9월 나는 타향에서 돌아왔다. 평온한 나날은 한달도 가지 못하였다. 10월8일 나와 아들이 밭에 나가서 일하고 있는데 한 수련생이 다급히 달려와 나에게 알려주기를 집에 사복경찰들이 가득 들이닥쳐 동시에 집을 수색하여 나의 대법자료와 집안의 카세트를 가져갔다고 알려주었다. 경찰은 나를 찾지 못하자 마침 나의 집에 있던 한 수련생을 붙잡아 현간수소에 가두었다고 하였다. 후에 2500원의 인민폐를 갈취하고 나서 석방하였다. 내가 밭에서 나간 후 경찰은 나의 아들을 끌고 20리 밖에 있는 친척집에 가서 나를 붙잡으려 했지만 허탕을 쳤다. 또한 나의 남편을 파출소에 데려가 위협하였다.

나는 또 한번 핍박에 의해 집을 떠나 떠돌아다니게 되었고 시어머니는 이 충격을 감당하지 못해 병세가 악화되었다. 2003년 설날이후 불행히 돌아가셨다. 임종 전에 시어머니는 여전히 나의 이름을 불러 자리에 있던 친척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 가련한 시어머니는 영원한 아쉬움을 가지고 인간세상을 떠났다.

나의 현의 악경은 줄곧 나를 붙잡으려고 하였고 또한 사이트에 올려 나를 수배하였다. 나는 우리 진”610″의 박해 중점대상이 되었다. 지금 나는 집에 돌아갈 수 없으며 유랑의 고달픔을 잔뜩 맛보고 있다.

문장 완성 : 1월31일

문장 분류 :박해진상

원문 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4/1/31/66245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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