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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면적이고 누락이 없는 고험속에서 걸어 지나오다(2)

【명혜망9월5일소식】(전편에 이어 계속됩니다)

정의견(鄭毅堅)은 북방(北方) 모(某) 대학의 졸업생으로서, 원래 다니던 직장에서 우수하고 “전도가 밝은” 청년 엔지니어로 칭찬받고 있었다. 그는 안경을 착용했으며, 어조(語調)는 부드러웠고, 얼굴엔 늘 미소를 띠고 있어 의지가 굳으면서도 점잖은 형상(形象)이었다.

그는 두려움 없이 사악의 박해를 부단히 제압하는 동시에, 사부님께서 요구하신 대로 하기위해 노력하였으며 마치“후더운 德(더)를 갖추었을 뿐더러 그 마음 착하고 큰 뜻을 품고서도 사소한 일에 소홀히 하지 않노라.”(《정진요지–성자(聖者)》)와 같은 모습이었다. 그는 법을 실증하는 것과 생활중의 사소한 부분을 모두 수련의 부동한 방면으로 여기고, 법의 표준에 따라 스스로에게 세밀하고 엄격한 요구를 제기하였다.

정의견이 아래에 나오는 여러 방면으로부터 심성을 수련한데서 볼 수 있다시피 정법수련은 “두려움”만 닦아버리면 끝나는 것이 절대 아니다. 사악한 공포적인 요괴들 속에서 두려움을 닦아버리는 것은 물론 앞자리를 차지하고 제일 기본적인 것이지만 그러나 두려움을 없애버리는 것만으로는 모자란다. 미래의 우주안전(宇宙安全)에 연관되는 미래 우주의 보위자(保衛者)로서 반드시 전면적이고 빈틈없이 자기를 수련해야 하며, 이것은 대법을 진수(眞修)하는 자에 대한 요구이다.

1,대선지심(大善之心)을 닦다.

(1)악행을 저지르는 자에 대한 최대한도의 선

정의견은 설사 자기를 박해하는 사람일지라도 악(惡)으로 악(惡)을 다스리면 안되며, 응당 최대한도로 진상을 똑똑히 알려주고 사람의 마음을 구원해야 한다고 여겼다.

한 수련생은 잔혹하게 박해 당하는 가운데서 악경(惡警)과 범인에 대해 늘 화를 냈다. 그의 모습은 언제나 “화가 나서 눈을 부릅뜬 금강(怒目金剛) “의 형상과 비슷하였으며 자기를 때린 경찰과 범인을 이야기할 때면 미워서 어쩔 줄 몰라하였다. 그도 “엄하게 관리”하는 대상에 속했기에 정의견은 그를 접근할 방법이 없었지만 그래도 여러 번 다른 대법제자들에게 부탁하여 일깨워주었다. 즉, 심태(心態)를 조정하는데 주의해야하며 구체적으로 나쁜 짓을 하는 속인에 대해서도 구도(救度)할 수 있으면 반드시 구도해야 하고, 최대 한도로 선을 행할 수 있어야 하며, 분개하고 증오하는 마음이 있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악경(惡警)을 통제하는 것은 배후에 있는 사악한 인소(因素)이기 때문이다.

그 수련생도 들은 후 도리가 있다고 여겼지만 아주 많은 속인의 마음이 그 속에 끼어있었기에 심태를 바로잡기가 아주 힘들었다. 장기적이면서 극단적으로 간고(艱苦)한 환경속에서, 분노하고 증오하는 마음이 쇠약해졌을 때, 그는 끝내 압력 앞에 굴복하였고 아주 빨리 다른 대법제자를 세뇌시키는 유다(주: 예수님을 배반한 제자의 이름으로 여기서는 대법을 배신하고 사악의 편에 선 수련생을 지칭한다)로 전락되었다.

그러나 정의견은 시종 정념(正念)으로 박해를 대했기 때문에 박해하는 배후의 사악한 인소(因素)가 대량으로 청리(淸理)되었다. 그는 사람들에 대해 되도록 선의(善意)적으로 너그럽게 대해주었으며, 아무리 준엄한 형세라도 관계없이 얼굴에는 언제나 선의적인 미소가 어려 있었다. 때문에 그를 박해했던 아주 많은 경찰들, 특히 보통 노교범들은 모두 그를 제일 탄복하였다. 일부 “강호의 건달들”이나 심지어 일부 경찰을 포함하여 정의견을 “의견형님”이라고 불렀다. 각 중대의 노교범들은 모두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는데 그를 “진정한 대법제자”라고 불렀다.

(2)속인에 대한 선

노교대(勞敎隊)에서, 정의견은 일반적인 노교범들에 대해서도 대선지심(大善之心)을 체현하였다. 일부 늘 얻어맞는 일반 노교범 중의 약자(弱者)들은 정의견의 주위를 둘러싸고 앉아, 정의견이 선과 악의 인연관계를 이야기하고 자기가 법속에서 학습한 간단한 법리를 이야기하는 것을 듣기를 즐겼다. 정의견의 어조는 아주 부드럽고 상화로왔으며 선의적이었다.

물질생활방면에서도, 그는 역시 자기에 대해 엄격히 요구했으며 극단적으로 결핍한 상태에서도 생활용품을 늘 먼저 속인한테 양보하였다.
예를 들면 2000년 초여름, 한번은 중대에서 전대미문으로 “생활개선”을 하였는데,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한 사람 당 한 사발의 콩국을 주었다. 나눠준 후 나머지가 있자 경찰은 모자라는 사람은 스스로 더 담아가라고 선포하였다. 몇 명의 대법제자들도 더 가지러갔다. 정의견은 머리를 저으면서 가볍게 말했다.
“당신이 한 모금 더 마시면 속인들은 한 모금 덜 마시게 됩니다.”
다른 대법제자들도 깨닫고 어느 대법제자도 다시 가서 담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일반 노교범들은 배부르게 마셨으며, 동시에 대법과 대법제자에 대한 이해와 존경이 증가되었다.

여러 해 동안 계속되는 감옥생활 중, 물자가 극단적으로 결핍한 이 특수한 환경 속에서 정의견이 한번이라도 반찬을 버리는 것을 본 사람이 없었고, 반찬을 더 보태 먹는 것 을 본 사람도 없었다. 그한테 담아준 밥의 양이 많든 적든 먹기만 하면 되었고, 그런 후에 수도물을 반 사발 들이켰는데, 물을 더 찾아 먹는 것을 본 사람도 없었다. 추운 섣달에도 금방 밥을 먹고 나서 배가 더운데, 그가 또 살얼음이 섞인 물 반 사발을 마시자 많은 속인들은 물었다. “배가 아프지 않아요?” 비록 그들이 좋은 마음으로 물었지만 그들은 이 간고한 수련 중에서 도달한, 금강불괴지체(金剛不壞之體)가 대응한 위대한 경계를 이해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노교소에서 뜨거운 물을 마시려면 미리 주전자를 사야 하고, 제한된 규정시간 내에 어떻게 뜨거운 물을 조금이라도 얻을 것인가를 따져야 한다. 이런 것이 그에게는, 마치 출가인들이 밥을 빌어먹는 사발에 집착하는 것과 똑같은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는 늘상 한마디 말을 하곤 한다.
“생활은 간단하면 간단할수록 좋습니다.”라고…

그러나 그런 “주먹”들은 노교소 안의 약자에 대해 함부로 “협파(夾把)”(협박하여 재물을 강요하는 것을 말한다)하는데, 만약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면 싸움을 대판 벌였다. 제일 나쁜 사람은 대장(隊長)인데 몇 천원씩 협잡하여 재물을 약탈한다. 그는 심지어 라면이나 세탁용 가루비누까지도 자기돈을 내지 않았다. 세탁과 취사는 물론 다른 사람이 시중들었으며 배불리 먹은 후에는 또 다른 사람이 안마까지 해주어야 했다. 누가 바르고 누가 사악한지는 한눈에 다 알아 볼 수 있는 것이다.

전에 대법제자를 박해하는데 참여했던 소란범인은 노교소에서 나가기 전에 용감하게 이런 의문을 제기했다.
“法輪功(파룬궁)은 텔레비전에서 나온것과 다르다. 法輪功(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들은 왜 모두 이렇게 특별히 좋은 사람들인가?—–내가 나가면 꼭 책을 찾아보아야 하겠다.”

(3)굽은 길을 걸었던 동수에 대한 선

속인과 같은 쟁투(爭鬪)심에 빠지지 말고, 사오자(邪悟者)를 선하게 대해주고, 법리를 깨닫게해야만, 길을 잘못 들어선 수련생을 근본적으로 끌어 올 수 있다. 한 수련생은 이른바 “3서”를 썼고 주동적으로 사오(邪悟)했다. 견정(堅定)한 동수라면 아주 쉽게 그한테 코웃음을 치거나 분노의 눈길로 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한다면 틀림없이 길을 잘못 들어선 사람을 더욱더 대립면으로 밀어 버릴 것이다.

예를 들면 2000년 말∼2001년 초에 노교소에서 있었던 “회개”와 “반회개”투쟁은 두 갈래의 서로 부딪치는 격류마냥 격렬하였는데, 견정한 사람은 더욱 더 견정해졌지만, 동시에 형형색색의 기괴한 궤변이 출현하여, 사람들을 혼미한 속에서 사오와 배반에로 유인해갔다. 그런 법을 배반한 궤변은 들으면 확실히 아주 “화가 치민다.”

2001년 1월, 한 견정한 대법제자가 “4대대”(불법적으로 감금되고 핍박에 못이겨 본의에 어긋나게 태도표시를 한 사람들의 대대)에 배치되어 세뇌를 받게 되었는데, 단번에 그는 자기가 각종 무서운 사오 사상의 구정물 속에 빠져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이전의 동수들이 하나하나 수렁 속에 빠져 있으면서 스스로 옳다고 기뻐하는 모양을 보자, 화가 나서 비난과 질책으로 반격했다……한 달이 지난 후, 그는 확실히 견정하여 의심이 없었지만, 그와 접촉한 법을 배반한 사람들은 한 사람도 깨어나지 못했으며, 그 자신은 도리어 피로해졌다.

사실, 이런 굽은 길을 걸은 사람들도 구성이 복잡하기 때문에 부동한 사람에 대하여 부동한 구원방법을 채용해야 한다. 정의견은 이점에 대하여 정확하게 인식하였다. 예를 들면 2001년 1월, 정의견을 세뇌시키도록 파견되었던 한 사람은 4대대에 돌아 온 후, 정의견이 어떻게 그한테 천천히 도리를 이야기해주었는가를 다른 사람들한테 알려주었다. 견정한 대법제자의 풍모와 모범으로 그를 감동시켰다. 사실이 증명하다시피 이 수련생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정확한 궤도에로 돌아왔으며, 4∼5개월 후, 석방된 그는 또 대법을 실증하는 활동을 시작하였다.
후에 또 박해를 받아 다시 이 노동교양소에 납치되어 왔지만 이번에 그는 사악한테 타협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라! 만약 모든 대법제자들이 다 그를 반역자로 보아 배척하기만 하고, 충분히 선한 마음으로 대해주지 않았다면 그가 어떻게 전변(轉變)할 수 있었겠는가?

“한 대법제자로서, 가장 위대한 한 자비인으로서 인류사회의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가장 대단하며 가장 자비스러운 것으로 생명에 대하여 모두 좋은 점이 있다.”(《북아메리카 대호구법회에서 하신 설법》)

그러나 선념(善念)에 근거하여 중생을 제도하고, 대법을 실증하는 것을 목적으로, 엄격하게 자신의 각방면의 언행을 단속한다면, 최후에 도달한 효과는

“우리 대법제자들이 착한 마음에 입각하여 한 일체는, 역시 세상사람을 감동시켰고 각개 층차의 생명을 감동시켰다. 중국대륙에서 표현되어 나온 사악 역시 각개 층차의 생명을 격노시켰다. 이러한 사악과 우리의 착한 것의 대조는 뚜렷한 것이다.”(《2001년 캐나다 대법법회에서의 설법》)

반대로, 그런 격분하여 이를 가는 상태는, 마치 확고하고 용맹한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일종 사람의 마음이기에, 사악의 공격을 막아내기 어려우며 만약 방종(放縱)한다면 바로 마성(魔性)이므로 더욱 위험하다.

“수련자가 마성을 수련해버리지 않으면 —공은 크게 난잡하게 되어 얻지 못하거나 또는 마도로 들어가게 된다. ”(《정진요지》”불성과 마성”)

2,최대한도로 일체를 포기하다

2001년 가을과 겨울, 노교소 1대대 대법제자들의 집단 단식은 기세가 드높았다. 20∼30여명의 대법제자들이 거의 전부 음식과 물을 끊었고, 노역을 거절했으며, 죄수복을 입는 것이나, 대열을 짓는 것, 세뇌 및 일체 기타 형식의 신체 및 사상에 대한 박해에 대해 항의했는데, 여러 명의 대법제자가 생명의 위험이 있었다.

이 소식이 사회에 전해진 후, 가족들과 각계의 반향이 극단적으로 강렬하여, 사악들을 놀라게 했으며, 시정부도 형세의 핍박으로 이 일에 간섭하였다. 당시에 중대장(中隊長)은 핍박으로 대회에서 공개적으로 선포했다. “이후에 누가 다시 法輪功(파룬궁)을 때리면 그에게 형기(刑期)를 더할 것이다.”

여기에서 기술할 것은, 단식 활동 중에 두 대법제자간에 나눈 한 단락 짧은 대화이다.

—“정법시기는 그리 길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참여하지 않더라도, 때가 되면 그것은 결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참여와 정진(精進)여부는 실제적으로 자신에 대하여 책임지는가 책임지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당시 이 제자는 이미 단식한지 30여 일이 지난 상태였다.)

—옳습니다. 당신은 정말로 잘 깨달았군요!

—어때요? 단식한지 꽤되는데 신체가 감당할만 한가요?

— 아! 나는 이미 깨달았습니다. 한 생명의 최대의 집착은 왕왕 바로 자기신체에 대한 집착입니다. 이 최대의 집착을 없애버리면, 당신의 마음은 아주 홀가분할 것이며, 몸이 어떻게 고통스러울지라도 절대 무섭지 않을 것입니다. 마음속에서 묵묵히 법을 암송하면 도리어 일종 마음의 해탈감이 있습니다!

단식중의 제자가 깨달은 경계는 절대 처음부터 도달한 것이 아니다. 이때 “신체에 대항 집착을 버려야 한다” 는 것을 깨달은 이 제자는 2년 전에 옥중에서 자기 신체에 대해 아주 집착하는 제자였다. 그는 수련 전에 엄중한 심장병을 앓았는데, 비록 대법을 수련하여 아주 빨리 나았지만, 신체에 대한 집착은 마치 고질(痼疾)이 되었는지, 때때로 튀어나오곤 했다. 노교소와 같은 악렬하고 공포적인 환경에서 각종 박해는 직접 신체를 겨누고 있기 때문에 이런 마음을 버리지 않으면 아주 위험했다. 바로 이 대법제자가 신체에 제일 집착할 때도 역시 정의견이 그를 끌어주었다.

2000년 4월 분의 어느 하루, 이 대법제자의 사상업이 두뇌에 반영하는 것이 너무 격렬하였다. 그는 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되자, 신변에서 노동하고 있는 동수 정의견에게 말을 꺼냈다. 정의견은 말했다.
“법에 대한 박해가 시작된 이래, 세계각지의 대법제자들은 모두 법을 위하여 대량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법의 위대함을 생각해보고, 당신의 사명의 중대함을 생각해보고, 법이 만들어낸 우주 창궁(蒼穹)의 박대(博大)함을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이 법 속에 용해된 감각이 있는가 보세요. 이때 당신이 집착하고 있는 그런 작은 것들은 모두 다시는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집착에 잠겨있던 대법제자가 냉정하게 생각해보니 확실히 그러하였다. 무슨 기분전환……완전히 자기를 정법 속에 용해시켰을 때, 이런 작은 집착을 향해 온 사상업은 갑자기 와해되었다. 이 대법제자가 온 마음을 다하여 대법을 실증할 때, 다시 자기가 당시 집착한 상태를 돌이켜보니 너무 가소로왔다. 또 7개월이 지난 후 이 대법제자는 정념으로 노교소를 벗어났다.

아래에 다시 작은 실례(實例)를 하나 들겠다. 대략 2000년 12월 무렵에, 정의견은 갑자기 격렬한 업력 반응이 나타났다.(사실은 다른 공간의 사악들이 가한 중점적인 박해였다) 발바닥 중심이 화농(化膿)하여 고름과 검은 물이 흐르고, 끊임없이 가려웠다. 대법제자 정의견은 시종 정념으로 이 현상을 대하였고, 마음속으로 대법경문을 묵념하였으며, 놀라거나 당황해하지도 않았다. 악경들은 늘 이런 것을 가지고 박해를 진행하였는데 한 무리 노교범들을 시켜, 폭력으로 강제로 정의견한테 주사를 놓게 하였지만 정의견은 종래로 협조하지 않았다.

묘한 것은 당시 중대에 신체가 건장한 노교범이 있었는데 증상이 정의견과 똑같았으며, 그는 적극적으로 주사를 맞고 약을 먹었다. 한달 후 정 의견은 완전히 회복되었고 발바닥 근육도 원상태로 되었지만, 치료와 몸조리를 한달 동안 한 그 속인은 지팡이를 짚어야했다. 이 사실은 대법의 위력을 증명하였고, 동시에 사악한 인소(因素)가 어떻게 박해하든지를 물론하고, 상응한 방면에 집착이 없는 대법제자들에 대해서 그것들은 최종적으로 방법이 없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3,속인의 사상을 떨쳐 버리고, 수구(守口)를 중시하다

사악들은 정(情)을 이용하여 정의견의 의지를 굴복시키려고 하였다. 2001년 초, 당초에 대법을 정의견한테 전해준 수련자이자 당지 보도소의 책임자였던 정의견의 부친이 사오(邪悟)가 나타나, 털레비전에 출연하여 대법을 “적발하고 비판(揭批)”했다. 부친은 또 함께 사오가 나타난 정의견의 형부부와 함께 와서 정의견을 설득하면서 급할 때는 울기도 하고 욕도 하였다. 악경들은 “아주 좋은 시기”가 왔다고 여기고 정의견한테 감정공세를 들이대면서, 빈번히 정의견의 가족들을 데려다 눈물 범벅이 되어 그에게 세뇌를 하게 하였다. 동시에 노교소에서 회개서를 쓰고 나온, 전에 정의견과 관계가 비교적 가까웠던, 한 여성을 연계하여 정의견과 만나서 타이르게 하였다. 이런 이른바 “감정폭탄”들에 대하여, 정의견은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으며, 매번마다 언제나 자신이 깨달은 법리를 그들한테 말해주었다. 한 단계 시간이 지난 후, 사악들은 이 방면에서 어쩔 수 없게 되자 그만둘 수 밖에 없었다. 정에 대한 고험은 이때부터 자멸하였다.

정의견은 유명한 대학의 졸업생이었고 성취가 있는 젊은 엔지니어로서, 직장에 다닐 때 월급이 몇천원이나 되었고, 복지가 후하였으며, 대우가 사람의 마음을 유혹하였다. 그가 전에 향수하였던 물질조건은 경찰들이 부러워 하였고, 그가 이런 것들에 대해 포기한 것도 그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포기하는데도 의력(毅力)이 필요하였는데, 어떤 때는 정의견도 이런 것들이 머리 속에서 튀어나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면 정의견은 주의식을 강하게 하고 자기의 사상을 법 속에 끌어왔다.

예를 들면, 한번은 공(ball)을 깁는 일을 할 때, 옆에 있던 한 보통 노교범이 그한테 물었다. “당신은 한 달에 얼마씩 벌었어요? ” 정의견이 알려주자 그 사람은 경탄해서 말했다. “와, 그렇게 많아요! 그럼 당신의 사업도 아주 대단했겠네요!”
정의견은 조금 의기양양하여 웃으면서 말했다. “이렇게 말합시다. 우리가 쓴 예산에서 소수점의 위치가 아마 몇 천만원에 해당할겁니다.”그 사람이 놀라서 소리칠 때, 정의견은 도리어 갑자기 머리를 살래살래 저으면서 가볍게 중얼거렸다. “안돼, 이건 사업에 대한 집착이야.”

이 때부터 이후의 오랫동안의 공동생활 속에서, 다시는 정의견이 다른 사람과 속인중의 한담을 하는 것을 들은 사람이 없었다. 그는 기타 방면에서의 수구도 극히 잘 파악했다. 예를 들면 노교소 생활이 해가 가고 달이 감에 따라 길어질면서, 어떤 대법제자들은 환경이 완화 될 때 점차적으로, 자신에 대한 요구를 늦추어, 속인들과 한담을 하기도 하였다. 어떤 이는 심지어 속인의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모순 속에 끼워져있었다. 정의견의 한마디 말이 급소를 찌른다.
“속인은 바로 그렇다. 오늘은 나쁘고 내일은 좋다. 때문에 절대로 속인의 시비 속에 끼어들지 말라 !”

4,시간에 대한 집착을 닦아버리다

당초에 1대에 있는 한 수련생은 천목이 아주 똑똑히 보였는데 수련하는 길에서도 많은 신화(神話) 같은 일들을 경험하였다. 그가 노교소에 온 후 놀랍게도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하였다. 1999년 10월에 그는 한 상태 중에서 노교소 중의 전 과정을 경험하였는데, 그 노교소의 환경, 건축, 배치, 그 속의 사람을 포함하여, 더 나아가서 아주 많은 일의 세부가 모두 그가 여기에서 보고, 만난 일과 동일하였다. 그는 2000년 4월까지(그는 4월에 그의 이 특수상태의 경력을 회상해냈는데, 그 특수경험을 금방 체험할 때 그는 하나의 꿈에 불과하다고 느꼈다. ) 노교소 내부에서 발생한 일체가 그야말로 그가 당시에 경험한 데 따라 가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또 다른 사람들한테 알려주었다. 그의 사전 경험에 의하면, 이 일은 어느 때 결속되며, 정 의견은 그곳에서 어떻게 잘 수련하며 …… . 또 4월 이후, 그가 예언한 많은 사소한 부분이 모두 정확했기 때문에, 1대의 일부 수련생들은 그의 진술 속에 빠져서, 그가 당시에 경험한 결속 날자가 도래하기를 기다리는 상태를 초래하였다.
그는 또 말했다. “경력에서는 뻐꾹새가 24시간 우짖는데 그때가 되면 결속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과연 뻐꾹새가 24시간 우짖었는데 밤낮으로 끊임없었다. 이러자 일부 수련 생들은 “결속일자”에 대해서 더욱더 믿어마지 않았으며, 동시에 정의견에 대해서도 더욱 숭배하였다.

이에 대해서 정의견은 도리어 아주 반감을 가졌으며, 조그만 환희심도 나타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아주 우려하였다. 그는 여러 차례 다른 동수들에게 경고했다. —-“공능이란 본디 작은 재간이요, 대법만이 근본이노라.” 반드시 주의식을 강화하고, 법리로 모든 것을 분석해야 한다. 만약 그 결속 기일을 당신이 알게 하고 또 기다려냈다면, 그것을 수련이라 하고 정법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무슨 “제일 우수한 제자”라고 하는데,법 속에서 정진하지 않는다면 아마 대법제자의 칭호도 보장할 수 없을 것이다! 설사 그 수련생이 다른 공간에서 보았고, 일부 일을 경험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과거의 안배와 전면적이 아닌 정보일 뿐이다.

그러나 이 걱정은 끝내 들어맞았다. 7월 이후(그 수련 생이 당시 꿈속에서 경험한 결속시간은 바로 2000년 7월이었다) 형세의 발전은 완전히 달라졌다. 박해는 결속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부단히 심해졌다. 이 수련생의 예언 속에 빠져 결속을 기다리던 사람들은 단번에 아득한 소용돌이 속에 빠져 들어갔다. 게다가 비인간적인 박해와 잔혹한 시달림 속에서 아주 많은 사람들은 견뎌내지 못하고, “회개”서를 썼다. 물론 이른바 예언영향을 깊이 받은 수련생들도 있는데, 다시 심태를 바로잡고, 시간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았으며,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을 암송냈다. 진정으로 법을 기점으로, 정법 길에서 새로이 분발하였다. 그러나 한동안 굽은 길을 걸었으며 시간을 낭비하였다.

그리고 공능이 있는 수련생 본인은 아주 긴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고 나서야 그 속에서 헤어 나왔다. 그사이에 한동안 사악들한테 중점적으로 시달림을 받았고, 잔혹하게 얻어맞았으며, 얻어맞고 시달림을 받고 또 온몸에 옴이 극심하여 의식이 똑똑하지 못할 때, 또 “회개”서까지 썼다. 악인들은 이 기회를 타서 도처에 소문을 내서 대법을 모욕하였다. 물론 이 수련생은 일단 정신을 차리자, 또 아주 빨리 다시금 대법을 실증하였다. 후에 또 다시 박해를 받았지만, 그러나 이때 그는 “특수경력”에 관한 기억을 내려놓았으며, 점차적으로 법학습을 중시하였다. 그러나 과정은 확실히 아주 길고 고통스러웠으며 대가가 너무 컸다.

여기까지 말한 김에, 한가지 강조할 점이 있다. 노동교양소와 감옥같은 그런 고통스러운 환경 속에서, 박해를 받고 있는 제자 가운데서 시간에 대한 집착을 가지고 있는 현상이 너무 보편적이다. 일종 외재적인 역량의 해탈을 바라는데, 이는 실제상 바로 자신이 대법을 수호하는 우주의 보위자라는 것을 잊어버린 것이며, 자신이 바로 이런 해탈의 역량이라는 것을 잊어버린 것이며, 자신이 대법 속의 입자로서 사악을 타파하고 환경을 개변하는 일체가 모두 자기의 정념 속에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 것이다. 이런 동수들은 만약 사상중에 천지가 뒤집어질 정도로 근본적인 변화를 겪지 않는한 대다수는 감옥과 같은 간고한 환경중에서 견지해나가지 못한다. 그리로 이런 천지가 뒤집어질 정도로 사상이 순정해 지려면 “닦음(修)”과 “깨달음(悟)”에 기초한다.

평시에 간고(艱苦)한 환경 속에서, 세월을 고생스럽게 보내면서 되는 대로 살아가는 이것은 참고 견디는 것이지, 근본상에서 닦음이 아니다.
“닦음”을 말하면, 그리 정진하지 못하는 제자는 자기를 위해 구실을 찾는다. 지금은 주요하게 정법인데 자꾸 개인의 “닦음”을 말하지 말라고. 사실 강대하고 견고한 “닦음” (이는 박해가 시작되기 전, 개인수련단계의 수련뿐만 아니라, 매 시각마다, 매 단계에서, 모든 환경하에서, 모든 생각과 일념에서의 닦음을 가리킨다) 을 기초로 하지 않는다면, 어떠한 정법의 거동도 모두 빈말이다.

이 시간에 대한 집착을 놓고 말하더라도, 실제수련 중에서 승화되어 나온 “법속에 용해(溶于法中)” 된 경계가 없다면, 간고한 환경 속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그러나 속인 식의 “어렵게 살아가는 것”으로 오래 견딜 수 있는가? 그러나 진짜로 “법 속에 용해”되면, 도리어 고생스러움을 느끼지 못한다. 이유는 법은 상화로운 것이며, “불광이 널리 비추니 예의가 원만하고도 밝도다(佛光普照 禮義圓明)”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일면으로 속인의 고독한 괴로움을 감당하는 것과, 심태가 상화롭게 마난(魔難)을 대하는 것을 서로 비길 수 있겠는가?

나는 체득하였다. 사실, 감옥에서 사람을 지탱할 수 없게 만드는 인소중에서 얻어맞는 괴로움은 모두 일시적인 것이며, 더욱 주요한 것은 이런 쓸쓸하고 처량하며 고독한 괴로움이다. 한 속인의 개인 공간은 비어 있지 않으며 그 속에는 그의 칠정(七情) 육욕(六慾)과 (욕망과 감정)과 희노애락이 있다. 속인의 환경 속에서, 수련자 개인의 공간마당 중에, 만약 법의 인소가 강하지 못하면, 사람의 칠정육욕이 강해질 것이며, 그의 개인공간 마당에는 하나의 증감(增減)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감옥과 노교대에서 (노교대가 더 심함), 사람의 일체 욕망과 감정은 모두 단절되어, 전부 실현할 방법이 없기에, 사람의 마음이 많은 사람은 일종의 뼈속을 파고드는 고독과 처량함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처량함이 사람을 괴롭히는 것은, 마치 독충(毒蟲)이 가슴을 물어 뜯는 것처럼, 조금씩 조금씩 당신의 의지를 부식시킨다. 이것이 바로 무엇 때문에 어떤 사람은 여러 차례의 미친듯한 구타는 견디지만 오랜 시간의 시달림을 버텨내지 못하는가 하는 원인이다. 반대로, “법 속에 용해”된 제자는 그렇게 고통스럽다고 느끼지 않는다. 이유는 그로 놓고 볼 때, 그는 감옥중에 있는 것도 아니고, 감옥밖에 있는 것도 아니며, 그는 기한 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기한 밖에 있는 것도 아니며, 그는 다만 법 속에만 있기 때문이다. 전에 옥중에서 2∼3년 동안 견지하다가 최후에 정념으로 뛰쳐나온 대법제자를 수련생이 이렇게 평가하는 것을 들었다. “안에서 그렇게 오래 동안 견지하다니 정말 대단해요!” 사실, 그가 만약 정말로 단순히 견지만 했다면, 절대로 “그렇게 오랫동안 견지할 수 없으며”,절대 정념으로 뛰쳐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이미 전에 말씀하셨다.

“여러분 생각해보라! 이렇게 빠른 속도인데 당신의 전반 생명의 역사 속에서, 당신 생명의 영원 속에서 그 무엇도 계산에 넣을 수 없다. 장래에 당신이 뒤를 돌아 이 한 단락 시간을 본다면 곧 한 순간이었고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당신들이 당초에 이번 박해 속에서 모두 하루가 일년과도 같이 느껴졌고, 지금 이 시간을 포함하여 여전히 아주 많은 수련생들이 생각하고 있는데 어느 때에 결속될까? 이 박해가 어느 때면 맨 끝에 이를 것인가?……여러분 생각해보라, 이것은 한 속인의 마음으로 이 일체를 대하는 것이 아닌가?”(《북미순회설법》)

“당신들은 대법제자이며, 역사는 당신들에게 위대한 책임을 부여하였다. 우리는 반드시 이 시간을 잘 이용하여야 하며, 결속되지 않은 이것은 바로 중생을 제도(救度)하는 기회이다……대법제자는 대법이 박해를 받을 때, 여러분은 우선 반드시 생각한 것이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었으며, 생각한 것이 어떻게 하면 대법을 증명할 것인가였다.”(《북미순회설법》)

한 대법제자가 정말로 “완전히 법 속에 있을”때, 그가 아직도 하나의 외재적인 “결속”을 기다리고, 의지할 수 있겠는가?

다른 한 방면으로, 낡은 세력의 사악한 안배는 정말로 틈만 있으면 파고 든다. 그는 시달림으로 대법제자를 박해할 뿐만 아니라, 어떤 때는 또 가능하게 허위적인 광환(光環)으로 대법제자를 부식(腐蝕)시키고 미혹시킨 후 기회를 타서 손을 댄다.

사실 사부님께서는 일찍이 명시(明示)하셨다.

“한 수련자로서, 속인 중에서 봉착하게 되는 일체 고뇌는 다 관(關)을 넘기는 것이고, 만나게 되는 일체 표창은 다 고험(考驗)이다.”(《정진요지 》“수련자는 스스로 그 중에 있다(修者自在其中)”)

(다음 편에 계속 이어집니다)

문장발표:2003-9-5

문장분류 : 호법여정

관련문장 : 《전면적이고 누락이 없는 고험(考驗)속에서 걸어 지나오다(1)》한글 명혜망 9월 14일 문장

원문위치 :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03/9/5/56768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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