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혜망5월23일 소식] 나는 중국의 많은 동수들과 같이 7.20 이후의 피비린내 나는 박해를 친히 목격하고 친히 겪었다. 7.20 전에 우리 어떤 수련생은 전화가 감청당하고, 행동이 미행당했다. 종종 일어나는 많은 현상들은 이득과 건강을 가져다주는 법륜공을 박해하려는 것을 암시했다. 그러나 나와 선량한 동수들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불공정한 대우에 우리는 편지와 우편물의 방식으로 정황을 반영하였다. 그것은 바다에 돌을 던진 격이었다. 7.20일 각 성 보도소에서 동수들이 잡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우리는 정부가 아직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느꼈다. 장춘에 가서 정상적인 경로로 상황을 반영하려 했다. 뜻밖에도 우리는 그들이 계획한 함정에 빠지게 되었다. 당시 장춘에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집식구들은 나의 몸에 이곳저곳 퍼렇게 멍이 든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중국××당 당정 규정에는”중앙 규정에 대하여 부동한 의견이 있으면 상황에 따라 상급에 청원 할 수 있다. 만약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의견을 보류할 수 있다”고 되어있다. 나는 길림성의 당원이었다. 당정 규정에 따라 진지하게 편지를 써서 북경 정치협상 위원회에 상황을 반영하러 갔다. 도착해서 찾아온 뜻을 설명하니 경찰 두 명이 들어와서 나를 북경에 주둔하는 지방 사무소로 압송했다. 불법적으로 창문도 없는 방에 이미 들어온 동수와 같이 밤낮 수갑을 의자에 채웠다. 8일 후, 지방으로 데려다 감금했다. 집으로 돌아온 후 소침해졌다. ‘이미 이렇게 된 바에 의견을 보류하라 하니 보류하겠다.’ 그러나 직장에서는 갖가지 수단으로 나를 “전화”(轉化) 하려 했다. 내가 타협하지 않는 근거와 도리를 말하자 그들은 문화대혁명 때의 투쟁수단을 사용했다. 불법으로 나에 대해 24시간 전화轉化를 강행했다. 낮에는 남자동료들이, 저녁에는 여자동료들이 줄을 지어 왔다. 이웃들은 이 집은 아이가 시험 공부를 한다 저 집은 안정을 취해야 하는 노인이 있다 하며 도처에서 나를 원망했다. 그 정경을 보며 사부님의 가르침이 떠올랐다. “일을 해도 먼저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고통을 참아내야 한다.” 나는 단호히 직장을 떠났다. 나는 천안문에 가련다. 마음 속의 말을 해야겠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우연히 수련생을 만났다. 동수들의 상호 고무와 격려 하에 순조롭게 천안문 광장에 들어섰다. 결국 정정당당하게 플래 카드를 펼쳤다 마음 속 깊이 있던 말을 외쳤다. “법륜 대법은 좋습니다! 사부님의 청백을 돌려주십시오! 대법의 청백을 돌려주십시오!” 나는 악경들의 주먹질, 발길질을 참았다. 그러나 천안문 파출소 마당에 끌려갔을 때, 악경이 사람들 속에서 경찰 방망이를 마구 휘두르며, 나의 앞에 있는 할머니를 때리려 할 때 손을 들어 방망이를 잡았다. 이로 인해 사람들 속에서 끌려 나왔다. 한 악경이 나의 목을 조르며 벽으로 붙이면서 말했다. “내가 너를 목졸라 죽여주마.” 숨이 막히는 순간 나의 머리 속에서 “태어나 바라는 것 없고 죽어 애석할 것 없네.” 가 생각났다, 나는 평온하게 그 사람이 사악에 의해 찌그러진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잠시 후 그 경찰은 기가 빠진 풍선마냥 돌아가 버렸다. 뒤따른 잔혹함은 뼈에 세겨져 잊을 수 없다.
나는 많은 동수들과 같이 북경시 조양구 간수소로 보내졌다. 나는 말했다 “우리는 좋은 사람입니다. 우리를 감금하지 말아야 합니다.” 한 간부같은 사람이 말했다: “여기에 오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 없다. 모두 나쁜 사람이다.” 내가 물었다. “등소평. 류소기도 문화대혁명 때 이곳에 갇혔었는데, 그들도 나쁜 사람입니까?” 그는 나의 따귀를 한차례 때리고는 사람을 불러 나를 한 공터로 끌고 가게 했다. 두 손을 뒤로 하여 투명 테이프로 둘둘 감았고, 입도 테이프로 감았다, 강박으로 나를 바닥에 앉게 했다. 날이 저물어서야 풀어주고 감방에 가두었다. 나와 몇몇 수련생은 이름도 대지 않고 음식도 먹지 않기 때문에, 간수들은 감방의 죄인들을 시켜, 때리고, 뒤로 믂고, 꼬집고, 옷을 벗기고 체벌을 가하도록 했다. 12월 말, 우리를 마당에 옷을 말리는 기둥 밑에 묶어두고, 찬물을 머리에 퍼 부었으며, 맨발로 젖은 콘크리트 바닥에 연속 3일 간 서 있게 했다. 우리가 수그러들지 않자, 수단이 바닥난 경찰은 우리 네 사람을 다른 빈 집으로 끌고 갔다. 집안에는 4개의 길이 180cm, 넓이 50cm 되는 판자가 있었다, 한 수련생이 코에 호스가 꽂힌 상태로 맨 몸으로 눕혀져 있었다. 팔은 벌려져 판자 밑으로 가로지른 몽둥이에 투명 테이프로 꽁꽁 감겼다. 두 다리도 끈으로 완강하게 묶여 있었다. 우리 세 사람도 역시 옷을 벗기우고 그들의 소위는 ‘예수의 십자가’에 묶였다. 장(張) 간수은 우리를 보고 미친듯이 웃더니 두 죄인을 시켜 양쪽 문을 열어 찬 날씨에 우리가 얼도록 했다. 또 다른 동수들을 끌고 와서 참관시키면서 그 분들더러 이름을 대라고 위협했다. 단식도 못하게 했다. 이렇게 꼼짝 못하고 하루를 누워 있으니 근육이 굳고 쪼들리면서 아프기 시작했다. 잠시도 그치지 않고 더욱 더 아파왔다. 맨몸으로 거친 판자에 누워 있으니 등과 엉덩이는 배겨왔고 가슴은 찌어지듯이 아팠다. 아파서 견디기 힘들 때 사부님이 우리를 위하여 얼마나 많고 많은 것을 감당해 주었는가 생각했다. 요만한 고생은 나는 겁나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하니 아픔이 덜했다. 또 몇몇 죄수들은 윤번으로 밤낮 감시하고 있었다, 말도 못하고, 잠도 못 자게 했다, 조금만 눈을 감으면 발로 차고 밟고 했다. 한번은 옆의 수련생을 쳐다 보았다고, 한 죄인은 나의 가슴과 복부를 마구 짓밟았다. 상욕을 멈추지 않았다. 순간에 나의 하체에서는 피가 흘러 나왔다, 피를 보더니 나의 솜옷을 엉덩이 밑에 받치면서, 널판자를 더럽혔다고 욕했다.
하루는 옥의(감옥내 의사) 마(馬)씨가 와서 코에 호스가 꽂힌 동수에게 음식물을 경관 주입했다. 콩가루 한 봉지에 소금 한 줌, 내가 물었다. “왜 호스를 뽑아내지 않는가.” 그는 “편리하다”고 했다. 나는 또 물었다 :”왜 소금 한줌을 넣는가.” 대답 “인체에 필요하다” 내가 말했다 “한 줌은 너무 많다. 물도 주지 않고 입이 마르고 목이 탈 것이다.” 대답 “그러하다!” 이 때 간수는 구둣발로 나의 얼굴을 힘껏 밟으면서 “너만 말이 많다” 간수는 나의 얼굴의 신발 자국을 감상하더니 사람의 길 위로 걸어서 다른 감방 동수에게 음식물을 경관 주입하러 갔다. 죄수는 궤짝 위에 신문지로 완전히 포장되지 않은 호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당신네 늦게 들어온 온 사람들은 덜 한거요. 몇 일 전에 한 사람이 꽂혀 죽었어요. 감히 우리보고 꽂지 못하게 해요. 마의사도 잘 꽂지 못해요. 안 그랬으면 당신들에게도 벌써 꽂았어요.” 어느 하루 갑자기 이불을 가져와서 벌써 떨고 있는 우리를 덮었다, 조금 있더니 간부 모양의 몇 사람이 한 바퀴 돌고는 가버렸다. 몇 일이 지났는 지 모른다. 그들은 대소변도 신경쓰지 않았다. 우리의 옷으로 받쳐놓기만 했다. 판자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 하루는 장(張)간수가 총망히 왔다. 죄인들을 시켜 우리를 풀어주었다. 근육은 굳어서 움직이지 못했다. 한참 지나서야 천천히 움직일 수 있었다. 몸 뒤에 두 곳이나 그동안이 마찰로 헐었다. 팔의 테이프를 떼어낼 때 가죽을 벗기는 것처럼 아팠다. 안쪽에 있던 동수의 테이프를 벗길 때 살가죽이 붙어 나왔다. 몸 뒷면은 심각하게 헐었다. 우리는 또 피와 똥오줌으로 젖은 솜옷을 입어야 했다. 마당으로 끌려 나왔다. 크고 작은 차량들이 줄을 지어서 제각각 많은 동수들을 이동시켰다. 나는 요녕성에 남게 되었다. 이것은 나의 4년 간에 받은 박해의 일부분이다.
글:2003-5-22 발표일:2003-5-23
문장분류[박해진상]
원문위치 http://www.minghui.ca/mh/articles/2003/5/23/50869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