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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길(2)

3. 7월22일 북경에 청원하러 가다

그 전에 있었던 광명일보사건, 4.25 청원과 같은 큰 일이 있을 때면 나는 언제나 일이 발생한 후에야 소식을 알게 되었다. 사부님의 경문을 학습한 후, 나는 자신이 제때에 따라가지 못한 것이 매우 아쉬웠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모두 자신이 아직 표준에 도달하지 못했던 탓이었다. 99년 7월 21일,TV,방송에서는 대법을 크게 모욕하기 시작했는데, 그 당시 학교에서는 이미 방학했지만 나는 다른 일로 집에 가지 않고 있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온 변화에 나는 너무나 놀랐다. 친구들도 의논이 분분하였다. 이때 한 수련생이 나를 찾아와서 제자들이 모두 성정부(省政府)에 갔다고 알려 주었다. 나는 두말할 것 없이 즉시 성정부에 갔는데 내가 도착했을 때 정부 앞은 이미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전성(全省)의 대법제자는 모두 이 곳으로 밀려오고 있었다. 나는 같은 연공장에서 연공하는 수련생을 찾았는데, 모두들 조용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 두, 세시쯤, 하늘에는 큰 법륜이 나타났는데 곁에 있는 태양보다도 더 밝았다.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다 이 현상을 보았는데 이로 하여 우리의 신심은 더욱더 커졌다. 나중에 우리 몇몇 동수들은 상의해서 북경에 청원하러 가기로 결정했다!!

경찰의 심문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방향이 전혀 다른 상해로 가는 열차를 탄 후 도중에천진(天津)역에서 내렸다. 그 때 마침 날씨가 매우 무더웠는데 북경, 천진 등 지방은 몇십 년 이래, 보기 드문 무더위가 나타났다. 공기 중에는 마치 사악이 가득 차 있는 것만 같았다. 주민등록증을 가져오지 않은 제자들이 있어 우리는 또 두 갈래로 나뉘어서 갔다. 주민등록증이 있는 사람들은 열차를 차고 갔고, 없는 사람들은 택시를 타고 갔다. 북경에 도착해서 한 대법제자의 집으로 갔는데 그 당시는 이미 한 밤중이었다. 북경의 수련생은 자신이 알고 있는 정황을 알려주었는데, 북해(北海) 그 쪽에서는, 많은 사람들을 쫓아냈다고 했다. 그 때 명혜망은 이미 봉쇄되었지만 북경의 수련생은 봉쇄 돌파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사이트에 접속할 수 있었고 사부님께서 쓰신 성명을 보게 되었다. 우리는 그 다음 날에 천안문에 가기로 결정했다.

아침 5시에 우리는 먼저 근처에 있는 몇 개의 연공장에 갔다. 연공장에 사람은 많았지만 연공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우리 동수라는 것을 알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몇 바퀴 돌고는 큰길을 따라서 걸어갔다. 길에는 세 걸음에 한사람의 경찰이 지키고 있었고, 다섯 걸음에 한 검문소를 설치해 오고가는 행인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한 경찰이 다가와 나에게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았는데, 나는 경찰의 말을 못들은 척하고는 동수들과 얘기하면서 자연스럽게 지나갔다.

천안문에 도착하니 벌써 점심 시간이었다. 날씨가 무덥긴 했지만 사람들은 아주 많았다. 우리는 천안문 성루 안에서 두 여자 애를 만났는데 하나는 장춘에서 왔고 다른 하나는 하얼빈에서 왔다고 했다. 비록 우리는 한번도 만나 본적은 없었지만 서로 대법제자인줄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중남해 신방국(信訪局)의 간판은 벌써 청원하지 못하게 내려놓았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우리는 또 다른 한 동수의 집에 가서 교류를 하다가 “예수전”이라는 비디오를 보았는데 예수가 수난당한 상황은 당시의 상황과 놀라울 정도로 비슷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때, 그 다음 한 발자국을 어떻게 내디뎌야 할지 몰랐고 다만 대법을 수호해야 한다는 것만 알았다.

나는 일단 집으로 가기로 결정하고는 몸을 열차에 실었는데 집으로 가는 길에서 줄곧 눈물을 흘렸다. 나는 철이 들어서 처음으로 그렇게 많은 눈물을 흘렸다. 사부님의 대법이 이렇게 파괴당하고, 모욕을 당했는데 제자인 나는 무엇도 할 수 없었다. 나의 힘이 그렇게도 작게 느껴졌다.

4. 법을 실증하다

집에 돌아오니 아버지께서는 수년 동안의 경험과 “문화대혁명”을 겪은 경험으로 나에게 포기하라고 권고했다. 나는, 지금 이렇듯 심오한 법리를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으며, 지금 뉴스에서 한 보도가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대법과 부합되는가? 하면서 도리를 따졌다. 대법 책을 읽어 본 아버지께서는 할 말이 없으셨다.

나는 여전히 매우 고통스러웠다. 학교에 돌아오니, 이전의 연공장과 법공부 팀은 모두 파괴되어 있었다. 나는 교실에서 법 공부를 하고, 저녁 자습시간에 학교 운동장에 가서 연공했다. 수시로, 동수들이 북경에 청원 갔다가 체포된 소식을 들을 수 있었는데 나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이런 상태로 99년 12월이 되었다. 겨울밤은 아주 고요했다. 나는 연공을 마치고는 늘 하늘을 쳐다보면서 멍하니 있었다. 때론 달이 굉장히 밝고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는데 눈꽃이 한 송이씩 날리어 나의 머리와 몸에 떨어졌는데 매우 차가웠다. 나는 내가 계속 이렇게 봉폐된 상태에서 수련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 때 마침 한 수련생이 나를 찾아와 나한테 인터넷 봉쇄를 돌파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나는 인터넷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인터넷 봉쇄를 돌파해서 소식을 다른 수련생들에게 전해줄 수 있겠는가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1차 대리서버, 2차 대리서버, 비밀 대리서버로부터 그 후의 자유사이트, 유동사이트 및 현재의 각종 봉쇄 돌파 프로그램에 이르기까지, 인터넷 봉쇄를 돌파하는 이 방면에서만도, 나는 대법이 4년 동안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걸어온 어려운 노정과 금강불파함을 직접 견증할 수 있었다.

어느 하루, 한 학급 친구가 나한테 학생관리를 책임진 당위 부서기가 나를 찾아 담화하자고 한다는 말을 전했다. 나는 고험이 찾아 왔다는 것을 알았다.

서기는 나를 아주 잘 대해주면서 처음에는 이치로 나를 설득하여 법륜공 수련을 포기하게 하려고 했다. 나는 그에게 대법의 진상을 알렸는데, 그는 계속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하다가, 나를 설득하지 못하게 되자 나에게 “돌아가서 잘 생각해봐!”라고 했다.

저녁에 학급의 보도원 선생님이 나를 찾아서, 학급의 학생들 앞에서 나에게 태도 표시를 하라고 했다. 그리고 만약 내가 “보증서”를 쓰지 않으면 구치소에다 보내겠다고 협박했다. 또 집에다 전화를 했는데, 아버지는 소식을 듣고 이튿날 즉시 천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다그쳐 왔다. 보도원 선생님은 나와 아버지가 같이 잘 수 있는 숙소를 마련해 주면서, 아버지가 나를 설득하도록 했다. 그 당시 나는 인터넷에서 많은 진실한 정황을 알게 되어서, 아버지한테 대법의 진상을 알렸다. 아버지는 본래 줄곧 수련을 믿었고, 직접적인 체험도 있으며, 또 사부님을 ‘선생님”이라고 불러왔다. 하지만 많은 집착심을 버리지 못해, 수련의 길에 들어서지 못했던 것이다. 내가 진심으로 아버지께 진상을 알린 후, 아버지는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나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토론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또 어머니가 이 일을 알고서는 울면서 80세가 다 된 할머니가 그 천리 길에서 열차를 타고 와서 나를 말리려 했다고 알려 주었다. 나는 듣고서 매우 괴로웠다.

이틀이 지난 뒤, 학부의 당위서기가 나를 찾아서 이미 나의 이름을 성 정부에 보고 올렸다고 하면서 나에게 “보증서”를 쓰라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결과는 저절로 책임지라고 했다. 내가 또 그에게 도리를 따지자 그는 억지를 부리면서 나를 끊임없이 협박했다. 집에서 너를 대학교 보내기 얼마나 쉽지 않은가, 만약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다면 부모님한테 미안한지 않은가, 그리고 너의 성적은 매우 좋아 본래 전도가 무량하지만 만약 네가 포기하지 않으면, 장래 졸업해서 직업을 찾거나 석사를 하려하면 모두 어렵게 된다. 왜냐하면 모두 정치 심사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법륜공을 수련하는 것은 신체단련을 위해서이고,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이며 전혀 누구를 반대할 생각이 없거니와 국가를 반대할 생각은 더욱 없다. 그것은 나로 하여금 득을 많이 보게 했다. 내가 경험에서나 대법 책에서나 모두 좋지 못한 것을 찾을 수 없는데 당신이 나에게 법륜공이 나쁘다고 말하라면, 나는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나는 비록 이렇게 말을 했지만 그래도 조금은 두려운 마음이 있어 나중에는 문자유희 식으로 “북경에 가지 않고, 청원하러 가지 않는다” 등 몇 가지 ”보증”을 썼다. 후에 법공부를 통해서 그것이 틀린 줄 알게 됐고, 엄정 성명(聲明)을 발표했다.

하지만 학부에서는 나한테 마음을 놓지 않았다. 왜냐하면 학교에 북경에 청원하러 가는 학생들이 끊이지 않고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나도 갈까봐 적정했다. 학급 보도원 선생님이 학급회의를 열고 한 사람씩 하루 동안 나하고 함께 자습하게 했는데 사실은 나를 감시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 때 곧 기말시험이 다가왔다. 나는 “만약 그렇다면 나의 시험 성적이 좋지 않으면 누가 이 책임을 지겠는가, 왜냐하면 당신들이 나한테 이렇게 큰 압력 주고 있으니 말이다.”라고 했다. 나중에 그는 할 수 없어 나보고 매일 학급의 단 지부서기한테 가서 출석을 알리도록 요구했으며, 한 숙소에 있는 학생들에게 나를 감시하게 했다. 친구들은 어처구니없어 하면서 나한테 “네가 북경에만 안 간다면 무슨 일을 해도 괜찮아, 우리도 상관할 것 없지, 허,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이야?”라고 했다.

어찌됐든지 간에 나는 그래도 법공부와 연공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잃지 않았다. 동시에, 나는 인터넷에서 대법제자들이 목숨을 버리고 죽음도 잊어버리고 대법을 실증하는 행동을 보았다. 매 번마다 수련생이 체포되고, 맞고, 참혹하게 박해 받는 것을 볼 때마다. 나의 마음은 찢어지는 것 같았다. 2000년, 사부님의 새 경문이 발표되기 시작했는데, 나는 모두 인터넷에서 보았다. 그 때 원래 같은 법공부 팀에 있었던 한 동수에게 좋은 조건이 있었다. 우리는 그의 집에서 법 공부를 하고 연공하면서 또 교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컴퓨터도 사용할 수 있었다. 오래 동안 연락 못하던 동수들도 연락할 수 있었다. 우리는 진상 알리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학교의 특점을 이용해서, 전단지를 교실에 놓거나 학교의 편지함에 놓았고, 방학을 이용해서 진상자료를 고향에 가져다가 뿌리기도 했다. 후에, 나는 학교의 학생 기숙사에 모두 컴퓨터가 있는 것을 보고, 나는 디스켓을 많이 사왔다. 명혜망에 있는 글을 다운받은 다음 선택해서 분류를 한 다음 디스켓에 복사해 옮기고, 또 낡은 신문지로 포장한 다음에 매게 침실의 문에 붙여 놓았다. 또 소포형식으로 이전의 동창들한테 보냈다.

나는 여러 곳의 동수들과 접촉하게 되었는데, 저도 모르는 사이에 중간에서 조절하는 사람으로 되었다. 나는 기타 지역에서 인터넷을 접촉할 수 있는 동수와 사이트 봉쇄 돌파 경험을 교류하고 자료실에서 프린터 한 자료를 프린터하지 못하는 동수들한테 제공해주고 다른 수련생이 편집해놓은 판면을 기타 지역의 자료실에 제공해주었다. 또 나에게 들어 온 대륙소식과 제자들이 쓴 수련체험을 명혜망에 발표했고 동시에 또 학교에 진상자료를 뿌리는 일을 책임졌다. 후에 두 명의 수련생이 나를 찾아와서, 자료실을 하나 마련하자고 했다. 나는 매일 명혜망 문장을 다운받는 것과 대륙소식을 보내 주는 것을 책임졌다.

그 때는 마침 대학 4학년 때여서 학과정이 그리 빡빡한 것은 아니었지만, 졸업을 앞두고 있어 나는 아주 바쁘게 보냈다. 대륙의 사이트 봉쇄도 갈수록 더 심해졌다. 오늘 이런 방법으로 사이트 봉쇄 돌파했지만 내일이 되면 안 되었다. 그 당시 명혜망의 서비스도 지금처럼 이렇게 완벽하지 않았다. 그리고 디스켓 드라이브가 있는 PC방도 많지 않아 지금 생각해 보니,확실히 그때는 정말 쉽지 않았다. 하지만 큰 문제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는데 만약 사부님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여기까지 걸어올 수 없었을 것이다.

처음에 나는 대법을 실증하는데 대해서 그렇게 깊이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북경에 청원 가는 동수들과 참혹하게 박해를 받으면서도 그렇게 견정하게 수련하는 대법제자들을 탄복했다. 나는 역사가 이 모든 일들을 영원히 기록할 것이라는 것을 믿었다. 나는 대부분 시간을 모두 대법의 일을 하는데 바쳤다. 나는 그 때 설사 내가 체포되고 맞는다 해도, 사부님을 도와 법을 실증했기에 후회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법공부와 연공을 소홀히 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뒤떨어질까봐 걱정했다. 나는 심지어 일자리를 찾는 것과 석사를 포기했으며, 또 자신의 이런 포기를 기쁨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은 틀린 것이었다. 왜냐하면 대법은 우리에게 될수록 원용하게 하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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