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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명의 대법제자와 한 명의 정의(正義)인사가 요녕성 철령시 은주구 법원에 의해 판결 받다

【명혜망】요녕성 철령시 은주구 법원은 2003년 3월 5일 대법제자 장파와 왕걸에게 7년형을, 대법제자 채소걸에게 4년형을 선고하였다.

*장파(張波)- 남, 요녕성 대법제자이다. 1995년 법을 얻었으며, 1999년 9월 7일 북경에 홍법차 나갔다가 30일간 구금당하였다. 개원시 간수소에 수감 중 10일 간 단식하여 풀려 나왔다. 2002년 2월 4일 노동교양 3년을 판결 받았으나 33일 간 단식하여 풀려 나왔다. 2002년 4월 24일 다시 노동교양 2년을 판결 받았다가 40일 간 단식하여 풀려 나왔다. 사악이 폭력으로 세뇌를 행할 때, 어깨․ 허리를 맞아 중상을 당했고 심장이 쇠약해! 져 까무러쳤는가 하면 구타당한 후6일째 강제로 음식물을 투입 당하기도 하였다. 2002년 10월 이위계를 도와 박해증거를 수집하다가 재차 체포된 이래 구금된 채 오늘에 이르러 7년형의 선고를 받았다.

*왕걸(王杰)- 여, 40세이며 간부이다. 1997년 11월에 법을 얻었으며, 2002년 7월 10일 북경에 가서 정법활동을 하다가 체포된 후 심양 용산 교양원에 보내졌다. 사악한 경찰은 전기방망이를 들이대면서 “결렬서”를 쓰라고 핍박하였으며, 또한 이제 겨우 15세밖에 안된 여자 아이에게도 조차 전기방망이를 갖다 대어 온몸에 상처를 입혔다. 여자 아이는 이로 인하여 고열이 나고 경련을 일으켰다. 이에 그들은 단체로 단식하면서 항의하기로 하였다. 단식으로 인하여 수차례에 걸쳐 강제로 음식물을 투입 당하여 피까지 토하게 되었다. 공안국 “자강학교”에 강제로 피송된 후에 다시 공안국 기관원에 의해 마산쟈 강제 노역소에 보내졌다. 강제노역소 문 앞에 왔을 때 노역소의 책임자는 차 안에 있는 왕걸이 거의 빈사상태인 것을 보고는 수용을 거절하였다. 그 후에! 왕걸은 공안국 제 4소에 송치되었다. 왕걸이 돌린 전단지의 수량이 많고 그 출처를 밝히지 않는다고 2년형을 구형하였다. 그녀는 그날부터 단식하기 시작하여 반 달이 지난 후 심양 대북 감옥관리병원에 후송되었다. 그 후에 윤려평, 추계영(이미 박해 받아 죽었음), 주염파와 함께 단식하였는데 병원측에서는 생명이 위급해졌을 때에야 비로소 가족에게 통지하여 120 구급차로 그녀를 홍십자 병원에 보내 치료함으로써 생명을 구하게 하였다.2001년 7월 28일 사악의 배신으로 말마암아 자료실에서 체포된 뒤 5일간 단식하여 귀가조치 되었다. 하루가 지난 뒤 3명의 경찰이 그녀를 잡으러 왔으나 체포하지 못하였는데 그 후로 그녀는 거처할 곳을 잃게 되었다. 그녀는 그녀와 같은 방에 있던 요중의 대법제자인 손홍염이 박해받아 죽을 때의 비참한 장면과 주계영이 세상을 떠나는 상황을 직접 목격하였다. 2002년 10월 이위계를 도와 박해 증거자료를 수집하다가 재차 체포되어 구금 당한 후 오늘에 이르러 7년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채소걸(蔡邵杰)- 1964년 2월 27일생, 북경에 두 차례에 걸쳐 들어가 청원하다가 체포되어 15일 간 구금되었다가 직장으로 돌려보내져 감시를 받게 되었다. 2001년 11월 말 사악의 밀고로 인하여 자료실이 수색 당했을 때 자료실에 있다가 체포되었다. 7일 간 단식을 한 후 사부님의 보호 하에서 정념에 의거해 정정당당하게 구류소에서 걸어 나왔다. 체포를 피하기 위해 거처를 잃고 밖에서 떠돌아 다녔다. 2002년 10월 이위계를 도와 박해 증거를 수집하다가 재차 체포된 이래 오늘에 이르기 까지도 4년형을 선고받았다.

*이위계(李偉繼)- 정의인사(正義人士), 철령지구 대법제자들의 출국 수속을 도와주고 박해 증거를 수집한 이유로 말미암아 8년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구타당하여 두 팔이 잘려졌고허리디스크가 생겨 걷기 힘든 상태로 되었으며 반금 감옥으로 송치되었다.)

재판장:왕비(王菲) 여
전화:86-410-2825946

成文:2003-3-9발표:2003-3-10
文章分類:【迫害眞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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