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如意
[명혜망] 나는 두 번이나 북경으로 들어가 법을 수호하였지만 사부님의 자상한 보호 하에 무사히 돌아 왔다. 자신이 생생세세를 거쳐온 것은 법을 위한 것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아울러 우리 대법 제자들의 천만 년의 기다림은 바로 오늘날에 사부님을 도와 법을 바로 잡는 정법 수련을 위한 것이다.
법을 얻은 초기에 나의 천목은 열려 있었고 元神도 두 차례나 신체를 떠난 적이 있다. 7.20이후에는 적게 보였지만 꿈속에서의 예견만은 매우 정확하였다. 7.20이전에 나는 매우 똑똑한 꿈 하나를 꾼 적이 있다. 동수들이 모두 날아갔으나 나는 육친정(親情)에 대한 아쉬움이 남아서 집으로 돌아가 이별의 인사를 하려고 갔다. 결과 나는 떨어지고 말았는데 후회 막급한 그 고통으로 가슴을 치고 목놓아 울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 때 “관건 적일 때, 내가 당신들더러 사람과 결별(決裂)하라고 할 때, 당신들은 오히려 나를 따라 가지 않는다. 매 한 번 기회가 더 있을 수 없다.”(《뿌리를 캐다》)에 대하여 심각한 이해를 갖게 되었다. 과연 꿈속의 광경과 마찬가지로 모든 동수들이 밤에 기차역으로 가는 택시를 예약하고서 북경으로 청원하러 가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에 어머니는 나더러 남아서 가족을 돌보라고 하였다. 나 또한 가족들과 인사를 하고 가면 마음이 놓일 것 같아서 집으로 갔더니 결과 가족들은 절대로 나를 가지 못하게 하였다. 나는 후회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으며 이 중요한 시각에 사부님께서 또 일찍이 점화를 한 상황 하에서 사부님께 너무나 미안하였다. 그리하여 새벽 3시가 넘자 나는 살그머니 일어나 3백위안의 돈과 신분증을 가지고 기차역으로 달려갔으며 북경으로 들어가는 첫차에 앉았다. 그때 나는 ××당이 6.4천안문사태에서 학생들을 대하듯이 기관총으로 쓸어 넘기고 탱크로 깔아뭉개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朝聞道, 夕可死(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된다)”로서 대법을 얻은 수련생들은 “살아도 구하는 것이 없으며 죽어도 아쉬워할 것 없다(生無所求, 死不惜留)”. 만약 비굴하게 삶을 구걸하며 은혜를 입고서 갚지 않는다면 이것이야말로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하였다.
열차는 가는 길에서 줄곧 자주 멈추었는데 들어보니 1시간이 넘게 지연된다고 하였다. 그때 나는 “아마 사부님께서 어떤 배치가 있겠지”라고 생각하였다. 과연 천안문광장에 도착한 후 어떻게 민원실을 찾아야 할지 한창 고민하고 있다가 얼떨결에 동북에서 온 7~8명의 동수들을 알게 되었다. 후에야 알았는데,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북경으로 들어와서 법을 수호하기 위하여 부동산을 팔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대출을 받았고 또 어떤 사람은 전당을 잡혔으며, 어떤 부부는 두 살 되는 꼬마를 부모에게 맡기고 모든 저축을 들고서 온 사람들이 있었다…. 존경을 받을 만한 이런 동수들에게는 오로지 “사부님과 법을 수호하며, 만약 법이 바로잡히지 않는다면 집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란 하나의 신념만 있었다. 태연자약하고 확고하며 두려움 없는 그들의 언행으로부터 나는 대법을 꼭 바로잡을 수 있으리라는 것을 더욱 확고하게 믿게 되었다. 사부님의 제자들에게는 모두 확고하게 끝까지 수련하려는 하나의 마음이 있다. 다행히 사부님께서 나를 그들과 만날 수 있게 배치하였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동서남북도 어디에 있는지 가늠 못하는 처녀가 경계가 삼엄한 이 대도시에서 정말로 어찌할 바를 몰랐을 것이다.
그 해 7월의 북경은 고온에 폭서였는데 백년에도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온 북경성은 마치도 떡시루처럼 지글지글 끓어서 숨쉬기조차 어려웠으며 까무러친 교통경찰들도 몇 명 있다고 한다. 더 많은 수련생을 찾기 위하여 우리는 골목마다 돌아다녔다. 돈을 절약하기 위하여 우리는 거의 모든 공원과 역전에서 잠을 잤으며, 후에 왕푸징에서 기다리고 있던 많은 동수들을 만났다. 또 일부의 사람들과 연락을 취한 후에 우리는 길을 나누어 국무원 민원실에 가서 봉쇄를 뚫고 청원을 하려고 계획을 세웠다. 우리 몇 명은 먼저 북해공원으로 갔는데 생각밖에 경비가 즐비했으며 사복경찰들도 물을 파는 장사치로 가장하여 도처에서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동수들도 적지 않게 도착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수색 당하였고 신분증을 빼앗겼다. 많은 동수들이 잡혀서 차로 운송되었으며, 우리는 다행히 교묘하게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북경 전체가 테러에 휩싸였다. 도처에 흩어져 있는 사악의 물질을 나는 감수할 수 있었으며 마치도 하늘땅 사이에 충만 된 듯하였고 사람을 심하게 억압시켰다.
우리는 갈 곳이 없었다. 역전도 엄하게 단속되고 있으니 아예 공원에서 노숙하자고 생각하였다. 역에서 누워 잘 때에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모기가 적어 보였으나 공원의 모기는 너무 많아 온 밤 잠을 잘 수 없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많은 수련생을 만났으며 또 사부님의 새로운 경문 “나의 한가지 생각”을 얻어 보게 되었다. 우린 또 경문을 가져다주러 갔으며 또 감동적인 동수들의 정법이야기도 전해주었다. 한가지 일은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내가 도서관에서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도중 무심결에 노스트라다무스의 《제세기》를 보게 되었다. 손이 가는 데로 펼쳤더니 바로 “1999년 7월 안골모아 왕을 부활시키기 위하여 공포의 대왕이 하늘에서 군림하리라…”라고 적혀있는 그 페이지였다. 이는 나로 하여금 더욱 명석하고도 확고하게 하였다. 사부님과 법을 수호하는 것은 우리 대법제자들의 본분으로서 공포의 대왕이 하늘에서 군림하여도 두렵지 않았다.
7~8일이 지나가자 내가 가지고 있던 돈으로는 집으로 돌아가는 차표만 살 수 있었다(식사비용은 모두 동북의 동수들이 지불했다). 나는 조심하지 않아 또 발을 다쳐서 절뚝거리며 그들을 따라 이틀동안 걸어다녔더니 발이 곪아서 고름이 흘러내렸으며 아파서 몹시 괴로웠다. 그들은 매일 사처로 돌아다니면서 동수들과 연락을 취했고 저녁에는 또 공원을 찾아서 노숙을 하였다. 돈을 아끼기 위하여 그들은 공공버스도 더는 타지 않았으며 이글거리는 태양을 무릅쓰고 도처로 걸어다녔다. 나는 너무나 지쳐서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내가 집으로 돌아갈 때에 1전 한푼 남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니 가족들에게서 받아야 하는 시끄러움은 말할 필요가 없었다. 우리 몇 개 연공장의 동수들만 하더라도 택시를 타고 몇 키로 가지 않아서 공안에게 모두 납치 당하고 말았다. 동수들마다 不法적인 심문, 감금을 당했고 벌금을 물어야 했으며 우리를 태웠던 택시기사마저도 몇 천위안의 벌금을 물어야 했다. 나는 이튿날 홀몸으로 북경을 향해 떠났기에 비로소 안전하게 되돌아 올 수 있었다. 내가 북경에서 겪었던 일, 그리고 동수들이 어떻게 대범하고 두려움 없으며 선량하고도 인내성 있고 확고하고도 변함 없이 사부님과 법을 수호한 사적들을 그들에게 알려주었을 때 그들은 모두 고무격려 되었다. 그때 나는 대법제자들의 마음은 함께 있으며 천리, 만리 떨어져 있어도 또한 환경이 어떻게 험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모두 한 사부님을 모시고 있고 한 부의 동일한 대법을 수련하고 있기 때문에 친척이 아니지만 친척을 능가하였다. 서로 만나서 인사를 나누면 심득을 나누고, 관심하며, 신임하고 어떠한 매듭도 없었다. 이것이 바로 眞善忍을 수련하는 드넓은 흉금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후 이튿날 저녁, 북경공안들이 모든 공원에서 야간에 대 수사를 하였다는 보도를 TV에서 보게 되어 동수들이 매우 걱정되었다. 동수들의 보살핌 아래 나는 3백위안으로 북경성을 거의 누볐다. 서로간에 알거나 혹은 모르는 동수들께서도 “정념으로 바르게 행하고 정진하며 멈추지”말기 바란다. “법정인간이 눈앞”으로 다가왔으니 그 날은 이미 멀지 않았다.
문장발표 : 2003년 3월 9일
문장분류 : 호법여정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3/3/9/4608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