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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馮)언니가 3년간 정법한 경력들

[명혜망] 2000년 구정, 나의 집에서 법회를 열었을 때 초면에 펑(馮, 가명)언니에 대하여 조금 인상이 있었다. 얼굴은 검지만 붉었고 뚱뚱한 전형적인 농촌 부녀자였다. 법회에는 북경에서 대법을 실증함으로써 불법감금된 후 막 풀려난 수련생이 있었는데 그녀는 북경에 들어가 법을 실증한 경력과 법리상에서의 인식과 승화를 이야기하였다. 그 당시 모두들 마음속으로 많은 감동이 있었다. 그후 얼마동안은 펑 언니의 소식이 없었다. 다시 그녀를 보았을 때 조금 수척해졌다. 그러나 정신상태는 아주 좋았다. 그녀는 나에게, 전번에 법회가 끝난 후 집으로 돌아가 정리하고 북경에 가서 청원하였다고 말했다. 이전에 그녀는, 대법과 사부님께서 비방과 공격을 받을 때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는데 지금은 알게 되어 가서 행하였다. 그녀는 북경에 들어가 법을 실증 한 후 그 지역 간수소에서 얼마동안(시간이 정확치 않음) 갇혔다. 집에서 2천 원의 보증금을 내고 석방되었다. 그후 부터 그녀는 몸과 마음이 모두 정법의 홍류 속으로 뛰어들었다.

펑 언니는 처음 시작할 때 시에서 진상자료를 가져다 스스로 배포하였다. 처음엔 적었으나 많아졌으며 아울러 그 지역 수련생을 이끌고 함께 걸어나와 대법을 실증하였다. 그 지역에서는 잇따라 북경에 올라가 청원하는 이가 있었고 어떤 이는 맨발로 주 북경사무실에서 뛰쳐나왔다. (그 당시 아직 발정념을 몰랐고 오로지 청원할 때 무리한 감금을 당하지 말아야 함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집은 유리실소하는 수련생들이 머무는 곳이 되었다. 매 사람마다 심성의 높고 낮음이 다름으로 일부 관을 넘는 일들이 발생함을 면치 못하였다. 그녀는 여러 사람들을 데리고 함께 법공부를 하고 안을 향하여 찾았다. 심성이 제고된 후 함께 나가서 자료를 배포하였는데 그녀는 또한 다른 지역으로 자료를 보내는 일을 책임졌다. 후에 그녀는 철사로 인쇄하는 기술을 배워 처음에는 자신이 전단지를 인쇄하고 접착테이프를 인쇄하고 현수막을 인쇄하여 저녁에는 모두다 나가서 배포하였다. 어떤 때는 큰 가방을 들고 하룻밤을 걸어다녀야 자료를 전부 배포할 수 있었으며 접착테이프를 부치고 현수막을 걸었다. 아울러 또한 연락할 수 있는 지방 수련생들에게 철사인쇄기술을 가르쳐주는 것을 책임졌다. 이렇게 함으로써 시 자료점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또한 전달하는 과정 중에 불안전한 요소도 없게 되었으며 (기차를 타거나 차를 탈 때 늘 가방을 열어 검사한다) 많은 수련생들이 진정으로 정법에 투입되어 진상을 알리는 홍류 속에서 모두들 배우기를 비기고 닦음을 비기어 공동으로 정진하게 하였다.

이 때 그녀의 남편은 북경에 들어가 청원할 것을 제기하였다. 펑 언니는 마음속으로 비록 기뻤지만 조금 걱정되었다. (그녀의 남편은 성격이 좋지 않았고 99년에 비로소 정식으로 수련하였다.) 북경에 들어가 청원할 때 잘 파악할 수 있을까? 다른 사람과 싸워 대법에 먹칠을 하면 안 되는데. 그녀의 남편이 말했다. “걱정 말아요. 내가 평소에 잘하지 못하였다고 보지 말아요. 이번에는 무엇하러 가는가? 대법의 억울함을 청원하는 것이고 반드시 진선인(眞善忍)에 따라 자신을 엄격히 요구할 것이요.” 일주일 후 그녀의 남편은 무사히 돌아왔다. 그는 천안문광장에서 현수막을 펼치고 북경경찰에게 붙잡혔는데 악경이 몽둥이를 들고 마구잡이로 그를 때렸다고 말했다. 그의 눈 주변은 하나의 큰 상처가 나 아주 많은 피를 흘렸다. 파출소로 붙잡혀 간 후 파출소 경찰이 보니 어찌된 영문인지 피가 멈추지 않았다. 책임을 질까봐 두려워 두 시간 후에 그를 풀어주었다.

펑 언니의 아들은 타 지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집으로 돌아온 후 역시 북경에 들어가 청원하겠다고 하였다. 이번에 그녀는 정말로 조금 내키지 않았다. 온 가족이 이제사 다 모였는데, 아들이 또 북경에 들어가려고 하였다. 모자는 마음이 통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그녀는 아들에게 한가지 요구를 제기하였다. >을 두 번 읽은 후 다시 가라고 하였다. 아들이 북경에 간 후 그녀는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였고 책을 보아도 들어오지 않았으며 공도 연마할 수 없었다. 이 기간에 그 지역 파출소에서 그녀의 집에 와서 그녀에게 아들이 북경에 갔는가 물었다. 그녀의 마음은 또 움직였다. 아! 아들이 붙잡힌 것이 아닌가? 그는 잘 파악할 수 있을까? 매를 맞는 것이 아닌가? 그때 내가 그녀를 보았을 때 관을 넘는 것이 아주 어려웠다. 우리는 함께 법공부를 하였다. 사부님께서는 >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육친정(親情)에 집착함은, 기필코 그로 인해 지쳐버리고 얽매이며 마에 사로잡히게 됨이라. 그 정사(情絲)를 잡아 쥐여 일생토록 방해받나니, 나이가 지나면 후회하여도 이미 늦은 것이로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이 정을 나는 원래 괜찮게 닦았다고 생각하였는데 진짜로 닥치자 비로소 아직도 멀었음을 알게 되었어요. 마음 한번 단단히 먹고 이 정을 반드시 내려놓겠어요.” 일주일이 지나서 그녀의 아들이 북경에서 전화를 걸어왔는데 이미 법을 실증하였고 아울러 주 북경사무실에서 뛰쳐나왔다고 하였다.

2000년 11월 그녀는 또 한번 북경에 가서 청원하려고 하였다. 그 당시 아주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았는데 아주 많은 일들을 그녀가 협조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또 일부 정법일들을 분담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은 나를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북경에 정법하러 가는 것이며 정법하고 나서 나는 돌아올 것입니다.” 마침 그녀가 가기 전에 말했듯이 천안문 광장에서 현수막을 펼치고 붙잡힌 후 단식 항의하였으며 여러 차례 음식물을 주입 당하였지만 성명을 말하지 않았다. 10여 일 후 조건 없이 석방되었다. 우리는 그녀에게 물었다. “음식물을 주입 당할 때 아파요?” 그녀는 웃으면서 말했다. “아프지 않으면 이상한 것이죠. 그러나 사부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렇게 많은 것을 감수하셨다고 생각하자, 그다지 아프지 않았어요.”

언젠가 한번, 그녀와 몇 명의 수련생들은 함께 농촌에 가서 스피커를 걸어 대법 방송국의 진상방송을 내보냈다. 같이 간 몇 명의 동수들이 스피커를 거는 과정에서 환희심이 생겨 마에게 틈을 타게 되었으며 진상을 모르는 농민이 경찰에 신고하였다. 그 당시 마을에는 한 갈래의 길만 있었고 경찰차가 앞에서 막고 뒤에서 쫓아왔다. 두 명의 수련생은 붙잡혀 경찰차에 올랐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사부님께서 도와주세요. 저는 붙잡혀서는 안됩니다. 밖에는 아직도 아주 많은 정법일들이 저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는 옆의 바닥구덩이의 호스로 기어들어갔다. 경찰차가 지나간 후 그녀는 쉽게 기어나왔다. 사실 호스는 아주 비좁았고 정상적인 이치에 따르면 전혀 들어갈 수 없었다. 호스 안은 아주 더러웠지만 그녀의 몸은 한 점의 먼지도 없었는데 그녀는 아직도 멀고 먼 길을 걸어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오늘 선생님 법신께서 보호하셨으니 말이지 그렇지 않으면 이 어려움을 피해가기 아주 어려웠을 것이다.’ 붙잡힌 이가 그녀의 이웃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집에도 돌아갈 수 없었다. 그 후로 유리실소하였는데 조건은 아주 간고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늘 자신을 엄격히 요구하였으며 매일 새벽 2, 3시에 법공부, 연공, 발정념을 시작하였다. 낮에는 대법일에 바빴고 법회를 열고 타 지역에 가서 교류하고 그 지역의 정법일을 이끌었다.

2001년 12월 말, 그녀의 남편은 한 자료점에 자료금액을 전달하다가 망을 보던 경찰에게 붙잡혔다. 그녀는 이튿날에 알게 되었으며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보아하니 나는 정을 계속 내려 놓아야겠어요. 평소에 함께 있을 때 나는 그를 늘 걱정하였고 그가 정진하도록 독촉하였는데 이번에는 그 자신에게 달렸어요.” (그녀의 남편은 붙잡힌 후 아주 단호하였고 다른 동수들이 연루되지 않았다). 후에 긴 시간이 지나서야 그녀의 남편이 이미 불법으로 노동개조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2002년 구정을 그녀는 남방에서 일하고 돌아온 아들과 함께 지냈고 명절을 지내는 이 며칠동안 먹은 것은 배추 한 포기와 몇 개의 감자였다. (이 때 그녀의 아들은 월급을 그녀에게 이미 주었다.) 정월 초닷새 날, 내가 그녀를 만났을 때 두 모자에게 화식을 개선해 주려고 하였다. 그녀는 “필요 없어요. 우리는 방금 전에 먹었어요. 돈은 그래도 요긴한데 쓰세요”라고 말했다. 2002년 4월 중순 내가 마지막으로 그녀를 보러 갔을 때 그녀는 나에게 아주 많은 것을 이야기하였다. 그녀가 법을 얻고, 이익을 얻고, 관을 넘고 어려움을 넘은 것을 이야기하였고 그녀가 명혜에서 아침 5, 6, 7시 발정념을 요구한 후 하루도 멈춘 적이 없었다고 말했으며 그녀가 법을 얻은 후 한번도 텔레비젼을 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텔레비젼을 보지 않아도 되지만 매일마다 법공부를 하지 않으면 마음속이 텅 빈 것 같아요. 오로지 법공부를 해야만 비로소 일체 집착을 타파할 수 있고 비로소 나의 정념을 단호히 할 수 있으며 비로소 고생하는 것이 두렵지 않아요. 내가 지금 고생스럽다고 보지 말아요. 나의 마음은 법을 얻기 전보다 몇 배 달콤한지 몰라요. 나는 당신이 나에게 사다준 빵, 만두, 라면, 오리알과 쏘시지를 모두 유리실소하고 자료를 만드는 그 몇몇 아이들에게 가져다 줬어요. 그들의 연령은 나의 아들과 같은데 만약 사악이 우리에 대한 박해가 없었다면 그들은 집에서 편안한 생활을 할 거예요. 나는 그들보다 어렵게 생활한 나날이 많아서 괜찮아요. 맛있는 것은 그들이 맛보게 하세요.” 그리고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집에 있는 제자도 반드시 자신에게 엄격히 요구하여 정법의 기회와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사부님을 도와 세간행을 해야 합니다.”

그 후부터 더 이상 그녀와 연락이 되지 않았다. 얼마전 명혜망에서 본 소식에 의하면 그녀는 이미 불법으로 심판되었다고 한다. (결과는 상세하지 않음)

여기서 단지 펑 언니가 3년간 정법한 경력들을 써내어 동수들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발표일자 : 2003년 2월 28일

문장분류 : 護法歷程 (호법역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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