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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반드시 법(法)과 함께 있다 – 한 정부관료의 정법수련의 길

[명혜망] 나는 정부관료이다. 수도 모 위원회 사무실에서 근무를 한 적이 있으며, 북경시 모 관리처 부처장에 재직한 적이 있다. 나는 법륜공 수련을 견지한다 하여 ’99년 7월이래 불법적인 납치·구류·재산몰수·강제세뇌·장기 거주감시 등 여러 가지의 박해를 받았다. 2001년 7월 1일 공안은 다시 한번 나의 사무실에 와서 불법적이고 강제적으로 나를 잡아 세뇌하려고 했으나 나는 지혜롭게 빠져 나왔다. 공안의 추적·체포를 제지하기 위하여, 나는 어쩔 수 없이 집을 떠나 장기간 표류·유랑하면서 온갖 고난과 어려움을 다 겪었다. “진·선·인(眞·善·忍)”에 대한 견정한 정념(正念)을 위하여, 천만년의 기다림을 위하여, 이 마음은 반석 같이 확고하였다. 나는 반드시 앞으로 용감히 나아가야 하며 일체 가난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견정하게 사부님이 안배한 회귀의 길을 끝까지 걷겠다.

1. 행운스럽게 정법제자(正法弟子)가 되다

1996년 5월, 나는 그 당시 아직 군대에 있었다. 우연한 기회에 나는 《전법륜》을 한 권 얻게 되었다. 나는 군인출신으로서 군대에서 25년 간 복역한 적이 있고, ’97년 6월 이전에는 해방군 정단직상교군관에 재임한 적이 있었으며, ’97년 7월에는 지방정부일로 전업하였다. 나는 처음으로 불법수련을 접했다. 책 속에서는, 사람을 선을 향하도록 이끄는 완전히 새로운 이론은 나로 하여금 호기심과 탐구하는 사상을 지니고 수련장에 들어서게 하였다. 우호적이고 착하며 상화로운 사람들이 함께 연공하는 것을 보았다. 한 시간 동안 배우고 연마를 거쳐 신체는 생각하지도 못한 변화가 발생하였다. 20년 간 만성 장염도 치료하지 못했었는데 완치가 되었고, 간과 비장 등의 건강하지 못한 요소로 일어났었던 얼굴에 나타난 짙고 검은 점도 점차적으로 사라졌으며, 사람은 활기차게 변하였다. 담배·술·도박 및 기타 불량한 기호들이 기적같이 끊어졌다. 특히 담배를 끊는 과정은 더욱 신기하다. 나는 몇 십 년간 담배를 피워 담배에 갈수록 인이 박혔다. 이전에도 여러 차례 끊은 적이 있었는데 그러나 매번 반복되므로 모두 이전보다 더 심해졌었다. 연공을 하고 법을 배운 그 시각에 책에서 말한 대로 피우던 담배를 끊은 후, 5년이래 다시는 담배를 피우고 싶은 생각이 들어본 적이 없다.

책을 보고 법공부를 끊임없이 증가시킴에 따라, 점차적으로 불법진리의 신성함과 위대함을 느꼈다. 수련인이란 심성수련을 중시하고 좋은 사람이 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덕을 중히 여기고 선을 행하여 최후에 선타후아(先他後我), 무사무아(無私無我)의 정각(正覺)으로 수련성취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다시 자신에게서 부패되고 탐욕스런 관료 습관을 깨끗이 제거하기 시작했고, 지휘와 권력에 따라 끊임없이 팽창되던 사욕을 억제시켰다. 어떤 사상들은 이전에 잘못 되었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예를 들어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자신을 위하여 일하는 것 이것은 현재 중국사회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러나 수련인으로서는 마땅히 공과 사를 분명히 해야 한다. 명리 앞에서 점차적으로 다투지도 않고 아귀다툼도 하지 않으며 욕심을 내지도 않고 손해를 보아도 후회나 원망도 없었다. 2000년 자신이 책임지는 회사에서 최후 한 차례 복지 차원에서 집을 분배하는 일이 있었는데, 나 자신도 집을 분배하는 대상이 되었다. 수많은 아귀다툼과 첨예한 모순 앞에서, 한 편으로는 여러 사람에게 대국(大局)을 고려하라고 교육시키면서 한 편으로는 이신작칙(以身作則)하였다. 그리고 주동적으로 자신의 방의 등급을 낮추었다. 정차장급 표준에서 정과장급 표준으로 낮추었으며 이익을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였다. 최후에 이런 복잡하고 골치 아픈 일들은 아주 빨리 해결되어 여러 사람들도 모두 비교적 만족하였다. 나는 수련인의 표준에 따라 선의(善意)적으로 사람을 대하고 일을 공평하게 처리하여 상급 영도와 아래 직원들의 옹호를 받았다. 강(江)씨 우두머리 쓰레기가 법륜공을 박해한 후 회사에서는 여러 차례 나를 보호해 주었다. 비록 승급시켜 주지는 않았지만, 줄곧 나의 직위를 보류시켜 주었다. 작년 초에 상급조직 부문에서는 우리 영도 몇 명에게 설문조사를 했는데 내가 가장 많은 점수를 얻었다.

무의식간에 법을 얻었지만 오히려 평생 기다렸던 것이었다. 나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하다!

나는 수련에 대해서 열정이 아주 높아서 여러 사람들은 나를 보도원으로 추천하였고 후에는 또 내게 지역 책임자일을 하라고 하였다. 항상 여러 사람들을 조직하여 법공부와 교류를 하였으며 많은 국·내외 수련생들을 접대해 본적이 있다.

나는 법륜대법을 확고부동하게 수련하였다. ’98년 초 북경TV방송국의 청원활동에 참가하여, 투기정치로 소위 원사가 된 하조휴(何祚)의 TV에서의 법륜공 모함을 우리는 바로 시정해 주기를 요구하였다. ’99년 4월 25일, 나는 만 여명의 법륜공수련생의 법에 따른 평화적 단체 민원 전달에 참석하였다. 강택민 총우두머리 쓰레기가 법륜공을 박해한 이래, 나는 국내외 동수들과 정신(正信)을 견정히 하고, 각종 부동한 방식으로 평화적으로 정부와 세상사람들에게 진상을 밝혔다. 우리에게는 법공부팀이 있는데, 잔혹한 환경하에도 단체 법공부를 2년 남짓 견지하였다. 여러 사람들은 서로 격려하고 서로 도우며 정법에 함께 참여하여, 효과가 아주 좋았다. 우리 법공부 팀의 동수들은 현재 거의 연락이 끊겼으며, 대다수는 핍박 때문에 정처없이 떠돌아다니게 되었다. 또 많은 사람들은, 다만 북경 교외의 묘봉산(妙峰山) 교류회에 갔다는 이유로 경찰에게 납치되어, 몇 명의 동수들은 20여일 간 단식·단수로써 불법적인 구금에 항의를 하였다. 긴긴 4개월 남짓한 잔혹한 학대를 받았으나 동요되지 않았으며 최후에 전부 불법적인 노동교양 판결을 받았다. 그들은 모두 인품이 고상하다. 직업에서, 학술에서 모두 공적이 있으며, 뭇 사람보다 뛰어나고 젊고 한창 젊고 풍채가 넘치는 우수한 인재들이다. 명혜망에서 금년 2월 1일에 “묘봉산에서 납치된 동수들에 대한 글”에 이 안건을 보도하였다. 이 기회를 빌어서 나는 다시 한번 아직도 난을 겪고 있는 동수들을 위하여 외친다. 사악을 제거하고 감옥을 뚫고 나오자!!!

나는 몇 년의 수련을 거쳐 신체도 부단히 정화되고 있었고, 심성은 제고되고 있었으며, 일체 모두 《전법륜》 책에서 말씀하신 대로 승화되고 있었고, 끊임없이 나 자신을 완벽히 하고 있었다. 비의도적인 이런 심신변화의 실천 중에서 나는 불법진리에 대한 열정을 더욱 불태웠다. 이런 공부와 실천을 왕복 순회함에 따라, 나는 비할 바 없이 광활하고 새로운 영역을 보게 되었다. 인생을 알고 보니, 그렇게 중요한 의의가 있고 이렇게 아름다운 미래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런 아름다움은 “진·선·인(眞·善·忍)”의 표준에 따라 수련한 후 생명의 각성과 정화였다.

2. 견정히 수련한다는 이유로 강택민 집단의 박해를 받다

’99년 7월 20일 강택민 정치깡패 집단이 대면적으로 법륜공연구회 책임자 및 각지 보도소 참장을 불법 체포했을 때 나도 파출소에 불법적으로 체포·구금을 당했다. 나는 책임자였었고 또 현지 관원이었기 때문에 특별히 “관심”을 받았다. 전화가 도청되고 행동의 제한을 받았으며 장기적으로 거주감시를 당했다. 공안은 마음대로 나를 소환하고 심문하였으며 심지어 구금까지 하였다. 같은 해 7월 하순에 명혜망 자료를 전파한다고 하여 두 번째로 파출소에 구금되었는데, 많은 공안들이 번갈아가며 심야까지 심문하고서야 비로소 풀어주었다. 이후에 무릇 민감(敏感)일 (소위 민감한 날이란 즉 신정, 춘절, “5월 1일 노동절”, “10월 1일 국경절”, “6월 4일 천안문사태일”, “4월 25일 중남해 사건”, “7월 20일 법륜공 불법탄압 시작”, “4월초팔일”, “5월 13일 세계법륜대법의 날”, “10월 26일”, “양회(兩會)의 기간”, “국제인권의 날”, 원연구회책임자를 불법 재판한 날, 외국 중요한 수뇌들이 중국을 방문한 날 등등을 모두 민감일이라고 여긴다) 파출소 소장과 우리 지역의 경찰은 항상 나를 잡아다가 감금시켰는데 적을 때는 하루 이틀, 많을 때면 3-5일 간이었다. 때로는 회사에 와서, 때로는 심야에 집에 들어와서 핍박하고 감시하며 심하게 교란을 하였다. 2년이래 불법적 체포·감금이 수 십 차례가 되는데, 나의 일부 중요한 명절이나 휴일에는 모두 공안부문이나 혹은 국가안전부문의 불법적 감금 속에서 지냈다. 매번 이런 날이 되면 가족들은 공포 속에서 나를 위해 마음을 조마조마하게 졸이면서 나날을 보냈으며, 아이들은 항상 나를 찾지 못해서 걱정하고 놀라며 두려워했다. 새천년의 밤에 아이들은 친척집에 가야 했고, 나 혼자서 우리 지역 경찰에게 파출소로 끌려가 도리에 맞지도 않는 비방을 받은 후, 불법적으로 날을 밝을 때까지 구금을 당했다가 풀려났다. 이 인간세상의 기쁜 경축일에 나는 핍박으로 나의 골육들과 헤어져야 했으며, 아이들은 내가 이 때 어디에 갇혀 있는지도 몰라서 망망한 어두운 밤을 마주하고 속상해 눈물을 금치를 못했다. 정부에게 묻고 싶다. 공도(公道)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99년 7월 20일 이후, 대량의 북경 이외의 수련생들이 끊임없이 북경에 와서 민원을 전달 하였으며,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정부에게 청원을 했던 바 정부가 진정으로 법륜공을 요해하고 대법에게 청렴결백을 돌려주며, 우리 사부님의 청렴결백을 돌려주고 법륜공의 합법적인 수련환경을 회복해 줄 것을 희망하였다. 북경의 많은 수련생들은 적극적으로 외지의 동수들을 접대하였으며 그들에게 적당한 도움을 제공해 주었다. 12월 20일 해외에서 두 분의 수련생이 북경에 가서 진상을 밝히고 대법을 증실하러 왔다. 우리 집에서 며칠 머물렀는데 공안국에게 미행을 당하게 되었다. 성탄절에 나는 갑자기 체포되어 공안국의 음침하고 공포스러운 지하에 감금되었는데 국장 2명과 18명의 경찰관이 번갈아 가면서 하룻밤과 낮을 꼬박 심문했다. 그 당시 상황은 아주 위급하였고 나는 일체를 잃을 준비를 하였다. 그들은 위협하고, 핍박하고, 유도하고, 속이는 등의 반복전술, 나를 잠을 자지 못하게 하는 등등의 수단으로 나로 하여금 강제로 따르게 하려고 했다. 나는 대법을 위배하지 않고 동수들을 배반하지 않는 원칙에서 그들을 상대하였다. 그들의 이름과 주소를 모른다고 견지하였으며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고 견지하였다. 그들은 비록 믿지 않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어 최후에 나를 풀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뒤로부터 회사에서는 나의 출국기회를 취소했으며 출장을 통제하였고 직무승급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잔혹한 박해 앞에서 나는 머리를 수그리지 않았다. 더욱 많은 중국 동포들로 하여금 진상을 알게 하도록 하기 위하여 나는 전세계 대법제자들처럼 거의 모든 월급과 수입, 저축을 세상사람들에게 진상을 밝히는데 사용하였다.

2001년 3월 1일 나는 광주에 출장가는 도중에 공항의 안전검사에서 몸에 지니고 있던 연공음악테이프가 발견되었다. 그 당시 바로 북경에서 “양회(兩會)”가 개최될 무렵이라서(양회 즉 매년 1번 열리는 전국인민대표대회와 전국정치협상회의를 일컫는다) 북경과 광주(廣州) 양 지역의 공안들을 뒤흔들었다. 광주 공항에서 공안에게 구금당하고 8시간 동안 심문한 후 나에게 항공편을 고쳐 북경으로 돌아가라고 하였다. 비행기가 북경 수도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북경시 여러 명의 공안과 우리 회사의 영도들이 보위 처장 등 많은 사람들이 큰 적을 맞이하듯이 비행기 출구에서 지키고 있었다. 내가 비행기 출구에서 나오자마자 2명의 경찰이 양쪽에서 나의 팔을 붙잡고는 앞뒤 각각 여러 명의 경찰들이 나를 수도공항 파출소로 압송하여 다시 새로 몸수색을 하고는 가방을 뒤져서 검사했으며 전화번호부와 작은 종이조각 마저도 지나치지 않고 샅샅이 뒤졌다. 한 시간 넘도록 소동을 부린 후 나를 회사 회의실로 압송하여 본격적인 심문을 시작하였다. 이때서야 나는 우리 사무실의 문서 캐비넷이 이미 열려져 물건이 다 뒤집어 내진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나서 경찰은 불법적으로 우리집에 쳐들어와서 사부님의 법신상, 전법륜 책, 음악자료 및 나 개인적인 연공과 관련된 사진 등을 압수해 갔다. 새벽 5시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회사 관리자가 보위 처장 일행을 데리고 나를 북경교외 회유현(懷柔縣) 산 속에 있는 비밀 장소에 감금해 두었다. 회사에서는 전문적인 안건 조사팀을 설립하고 매일 한 명의 관리자가 사람을 데리고 와서 번갈아 가며 나를 찾아 면담을 하면서 나에게 수련을 포기하라고 하였다. 연속 7일 동안 나는 모두 착한 마음에 입각하여 인내심을 가지고 나를 설득하는 매 하나의 영도에게 대답을 해주었다. 내가 수련한 후 몸과 마음이 이익을 얻은 사실, 그리고 법륜공은 어떻게 덕을 중시하고 선을 행하게 하므로 능히 사회로 하여금 도덕이 승화되는 도리를 그들에게 알려주었다. 나를 설득하려고 온 거의 매 하나의 관리자 마다 나의 사실과 진심에 감동을 받았다.

사악이 목적에 도달하지 못해서 1주일 후 나를 납치하여 대흥(大興) 단하(團河) 노동교양소의 세뇌반에 집어넣었다. 그곳에서 나는 무엇이 정신학대라고 하는가를 보았고 무엇이 “삐뚤어진 영혼”이라는 것을 보았다. 이런 노동교양소의 “홍의인(紅衣人)”(노동교양범인)에게서 그들이 겪은 육체상과 정신상의 시달림의 고난을 알게 되었다. 여기에 감금된 법륜공 수련생들은 더욱이 각종 혹형을 받았으며 어떤 이는 고온의 땡볕을 쬐게 하였으며, 어떤 사람은 독한 형벌을 당했으며, 구타는 너무나 흔한 일이었다. 호장안(胡長安)이라고 부르는 수련생은 열 몇 개의 전기몽둥이로 장기간 동시에 전기충격을 받아 마음이 찢어지는 비참한 소리를 냈으며 나와 만났을 때에도 얼굴에는 여전히 상처가 남아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장기간 동안 잠을 못자게 하며 어떤 사람들은 가족들까지 연루시켰다. 북경 교외의 수련생 부부는 동시에 잡혀가 노동교양을 받았으므로, 집에는 초등학교 다니는 아들 2명이 남겨져 돌볼 사람이 없어 정말 사람으로 하여금 걱정하게 하고 불쌍한 생각이 들게 한다. 아무튼 강택민 사악한 깡패집단은 각종 비열하고 악랄한 수단을 모두 법륜공수련자들에게 써먹었다.

나 자신도 정신적 학대를 받았다. 거기에서 경찰은 내가 외부와의 연결을 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대법책도 보지 못하게 하였고, 연공도 하지 못하게 하였고, 마음대로 행동하지 못하게 하여 마치 죄인과 같았다. 매일 우리들을 그곳에다 한데로 모아놓고 경찰들이 전기봉을 가지고 옆에 서서 한 무리의 마음이 비뚤어진 “홍의인”을 지휘하여 이 꾸며놓은 왜곡되고 스스로를 속이는 삿된 깨달음 등의 거짓말들을 끊임없이 나의 귀에다 주입시켰다. 만약 그들에게 순종하면 편안한 대우를 받는다. 확고하게 불복하지 않는 사람은 징벌을 받게 되는데 매일 연속으로 15시간 이상의 세뇌까지 증가된다. 적게는 몇 사람, 많으면 열 몇 사람이 둘러싸고 한도 끝도 없이 거칠고 야만적인 비뚤어진 삿된 말로 속이며 잠을 자지 못하게 한다. 공직에서 사퇴시키고 노동교양시키고 형벌을 언도하고 가족들을 연루시키는 등으로 위협한다. 이런 악독한 경찰과 영혼이 비뚤어진 사람을 직면하고 무엇이 정치박해인지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만약 자신이 직접 겪지 않았다면 정말로 집권자 및 그의 하수인들의 이토록 누추한지를 감히 정말로 믿지 못할 것이다. 나는 기타 8∼9명의 확고하여 굴복하지 않는 사람들과 그들이 소위 백분의 백으로 전화한다는 거짓말을 타파하여 시의원 영도들에게 난감하게 되어 노동교양국을 엄격히 혼냈고 그들에게 압력을 가하였으므로 우리를 박해하는 노동팀을 바꿔버렸다. 이것은 우리에게 마침 기회를 가져다 주었다. 노동교양소는 자신들의 압력을 감소시키기 위하여 임무를 완수했다고 거짓말을 하고는 타협을 했다. 한 달이 지난 후 나를 회사에서 마중하여 데리고 갔다. 이후로부터 나는 예전보다 더욱 야만적인 감시를 받았다.

나는 줄곧 핵심인물이었으므로 2년 남짓이래 아직도 능히 관리직 위치에서 대법을 견정하게 수련할 수 있는 자체만 해도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상급과 아랫사람들이 모두 나를 주시하고 있었으며 전 직업분야에서는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곳곳마다 수련인의 표준으로 잘 하였다. 5년 남짓이래 병이 없었으며 의료비용으로 돈을 받지 않았으며 신체는 건강하며 얼굴에는 불그스름하게 혈기가 돌고 나의 흉금은 넓고 거리낌이 없었으며 정직하고 선량하여 여러 사람의 칭찬을 받았다. 여러 사람들은 비록 말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법륜공이 좋은 것이라고 말했다. 나의 한 상급자는 국가요직인사의 부인이다. 처음에 나에 대해서 아주 경계하고 있었으며 나에게 압력도 가한 적이 있었다. 후에 태도도 변했고 나를 더 이상 난처하게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관건적인 시기에는 나를 도와 말까지 해주었다. 나는 이것이 내가 대법을 수련하는 정념으로 움직여졌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공안과 국가보안국은 늘 나를 괴롭혔고온갖 방법과 수단을 다하여 나의 잘못을 찾으려고 했다. 각종 자료를 수집하는 동시에 잡아온 수련생들을 통해서 나에 대해 조사를 했다. 나에게 죄명을 강제로 씌워 나를 불법적으로 형벌을 언도하려고 망상하였다.

2년 남짓이래 받은 모욕과 박해는 사람으로 하여금 몸서리 쳐질 정도에 이르렀다. 우리는 자신을 수련하므로 사회에 대하여 백가지 이로울 뿐 한가지 해로움도 없으므로 사악의 근거 없는 무리한 박해에 순종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작년 6월 달에 국가안보분국 오경(吳京), 공안분국 왕회장(王會章)이 나를 찾아 담화를 하였는데 나에게 그들에게 협조하라고 요구하였으나 나는 엄숙하게 거절하였다. 그랬더니 사악한 자들은 나에 대한 새로운 박해와 모함을 구상하였다. 7월 2일 아침 8시 30분에 파출소 경찰은 차를 몰고 사무실에 와서 나를 잡으려고 왔다. 나는 이번에 가게 되면 얼마나 위험하고 사악할 것인가를 깊이 알았다. 그래서 상의할 여지도 없이 확고한 말씨로 그들에게 명령했다. “당신들은 기다리고 있으시오. 내가 일을 다 처리한 후에 봅시다” 이때 다른 한 경찰은 어쩔 수 없이 나의 사무실에 와서 나를 지키고 있었다. 나는 한편으로 전화를 걸어 일을 처리하고 한편으로는 기회를 노려 몸을 빼내려고 했다. 동시에 나의 큰 사무책상이 경찰의 시선을 가로막을 수 있는 조건을 이용하여 신속하게 몸에 지니고 있던 전화번호부, 진상자료, 핸드폰, 호출기 등 중요한 물품을 사무책상의 각각의 서랍 속에도 옮겨놓았다. 바로 경찰이 신경이 무뎌져서 우리 사무실에 있는 잡지를 볼 때 나는 문입구에 가서 부하직원 보고 경찰에게 차를 따라주라고 하였다. 말을 하자마자 나는 이미 복도에 들어서 뒤를 돌아보니 경찰은 여전히 방안에서 움직임이 없어 날 듯이 아래층에 내려왔다. 아래층에서 지키고 있는 경찰을 피하여 큰 앞마당으로 뛰어나와 마침 내 옆에 도착한 택시를 잡고 신속하게 사악한 곳을 떠났다. 공우(功友)들의 도움으로 그 당일로 바로 북경을 떠났다. 정말로 아주 위험했다. 자신이 능히 위험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이후로부터 나는 직장을 잃고 집이 있어도 돌아갈 수 없는 유랑인이 되었다.

3. 핍박으로 인해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다

30년 간 노력을 거쳐 얻은 직장의 직위와 사업이 공안이 와서 나를 잡으려는 그 순간에 바로 잃어버렸다. 자신은 홀로 한 사람이 망연하여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바로 나의 신분을 공개해서는 안 된다는 이 한 점은 분명했다. 그 당시 딸이 막 외국에서 유학하고 귀국하여 동수들의 도움으로 부녀는 총총히 만났는데 심정은 아주 무거웠다. 딸은 아직 학교 다니고 있어 아직은 독립적으로 생활하지 못하는데 내가 직장이 없어 딸은 또한 경제 래원을 잃었다. 딸은 마음속으로 알고 있다. 아빠는 북경에서 도망쳐 나올 수 있지만 오직 중국에 있기만 한다면 수시로 잡혀가고 구타받을 위험이 있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경찰손에 들어가기만 하면 후과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번에 일단 이별하면 언제 다시 만날 수 있겠는가! 참으로 생이별이다! 이때에 딸은 이미 흐느끼며 울었다. 내가 차를 타려고 할 때 딸은 갑자기 카메라를 꺼내어 거의 애원하듯이 “아빠, 우리 사진 한 장 찍어요”하고 말했다. 나의 마음은 갑자기 움찔하더니 눈물을 참지 못하고 흘러내렸다. 생각밖에도 이전에 영화나 소설에서 나왔던 생이별, 이산가족의 슬픈 이야기가 뜻밖에도 우리의 부녀사이에서 발생하였다. 나는 이 7척의 사나이가 딸과 이별할 때 눈물이 옷자락을 적셨다. 동수들은 우리를 도와 이 처량한 화면을 담아 역사의 견정으로 되었다.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는 것은 놀라고 두려운 것을 감당해야 할 뿐만 아니라 또한 아주 고생스럽다. 막 시작할 때 친구의 도움으로 남방의 어느 한 작은 섬에서 저렴한 방세로 시골집에 머물렀다. 남방의 여름날은 너무 더워서 견디기 어려웠으며 저녁이 되면 항상 모기떼들이 습격하고 땀은 돗자리에 자욱을 남겼다. 비록 수련하는 사람은 고생하는 정신이 있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필경 이 몇 년간 편안한 생활에 적응되었다. 다행히도 마음속에 견정한 정념이 있기 때문에 가끔 습격하는 고생과 고독감은 빨리 사라지게 하였다. 곤란을 극복하고 용감하게 사회를 향해 나가서 자신의 방식으로 세상사람들에게 진상을 밝히기로 결심하였다. 그래서 전후 동창과 친척들부터 시작하여 말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사악을 폭로하고 거짓말을 타파하였다. 나는 끊임없이 걸었고 끊임없이 말했으며 반년의 시간동안 절반이상의 중국을 다 다녔다. 엄동설한이든 아니면 무더운 여름이든지를 막론하고 설령 길바닥을 잠자리로 삼고 바람을 먹고 이슬을 먹더라도 나는 자신이 몸소 겪은 경력과 생명으로 사람들에게 “법륜대법은 좋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위험에서 벗어난 후 공안은 줄곧 불법적으로 나를 추적하였다. 내 딸을 위협하고 핍박하였다. 이로 인하여 딸은 어쩔 수 없이 앞당겨 외국으로 돌아갔다. 회사도 안의 압력 하에 도처에서 나를 찾았다. 가족들은 걱정하는 마음과 진상을 알지 못하는 상황 하에서 나한테 도움을 준다는 것이 오히려 방해가 되었다. 나로 하여금 행동이 더욱 곤란하게 하였고 여러 차례 하마터면 경찰손에 들어갈 뻔했다. 참으로 놀람과 공포가 끊이지 않았고 위험한 상황이 겹겹이 나타났다.

현재, 이번 큰 재해는 여전히 강택민 총 쓰레기의 조종 하에 미친 듯이 계속되고 있으며 사악한 자들은 사악한 자들은 법륜공에 대한 박해가 끊임없이 승급하고 있으며 우리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는 동수들은 이미 갈수록 어려워진다. 현재의 기차역, 부두, 철도 등 교통요지에서는 모두 경찰들이 신분증명서를 검색하는 검문소가 설치되었다. 거리, 여관, 주민거주위원회에는 모두 외부에서 온 인구를 조사한다는 명의로 실질적으로는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는 대법제자들을 찾고 있다. 일부 친척과 친구들은 내가 맞다는 것을 알지만 그러나 연루될까봐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친척과 만날 수가 없다. 바로 이런 어떻게 할 수 없을 때 어느 친구가 나를 도와 중국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였다.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사악이 나에 대한 장기적인 추적과 살해하려는 것을 따돌렸다. 나는 마음속으로 알고 있다. 이것은 또 한차례 나를 구해주셨다는 것을 나는 마음속으로 알게 되었다. 나는 처음으로 국외의 연공장에서 오랫동안 듣지 못했던 연공음악을 들었을 때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어 통곡하였다. 우리도 이런 상화한 연공상황이 있었고 얼마나 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거기에서 구원을 받았는가. 그러나 사악한 강택민 집단은 이유없이 우리를 탄압하여 각종 악독한 계략을 다 취해서 우리를 박해하고 있다. 얼마나 많은 동수들이 핍박으로 가정이 파산되고 사람이 죽었으며 처자식과 헤어졌는가. 얼마나 많은 동수들이 인격과 정신적 모함과 육체적 학대를 겪었는가. 얼마나 많은 동수들이 박해를 반대하는 속에서 학살되었는가. 2년 반 남짓한 잔혹한 박해 속에서 나는 이런 장기적인 정신적 학대와 억압 중에서 갑자기 해탈되어 나와 국외의 동문제자들과 상봉하고 당신들의 보호를 받아 나는 얼마나 행운인가. 그러나 수천 수만의 국내 동수들은 여전히 난 속에서 고생을 받고 있다. 나는 당신들을 만난 것이 가장 가까운 가족을 만난 것 같다. 당신들에게 장기적으로 마음속에서 억눌려져 있던 천만의 억울함과 고통을 “국내의 제자들은 너무나 고생스럽습니다!”라고 한 마디로 모아서 말하고 싶다.

사악한 박해 하에 나는 집이 없어졌으며 중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게 되고 나는 심지어 합법적인 신분도 없으므로 일체를 잃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위대한 진리를 안았으며 생명은 이미 각성하였다. 나는 반드시 법과 함께 있으며 진정한 집으로 향해 회귀할 것이다.

완성시간 : 2002년 2월 6일

문장분류 : 護法歷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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