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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 3대 시기의 천명관(天命觀)에 관해(4)

[밍후이왕] 3대 시기의 천명관을 가졌던 고대인이 보기에 ‘제(帝)’와 ‘천(天)’은 만물을 적시고 양육했을 뿐 아니라, 자연계의 비, 구름, 천둥, 번개는 물론, 홍수와 가뭄, 농작물의 생산과 수확, 그리고 왕조의 흥망성쇠, 사람의 빈부귀천, 길흉화복 등 온 세상의 모든 것을 주재했고, 아득한 하늘 위의 ‘제(帝)’와 ‘천(天)’의 안배에 따르지 않는 것이 없었다. 당시 사람들은 하늘과 자연에 대해 감사와 경외의 마음을 품었다.

하늘에 대한 감사, 경외, 기원과 관련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도 중요한 형식이었지만, 봉선(封禪, 천자가 천지에 올리는 제사)도 중요한 형식이었다.

고대 중국의 가장 성대한 국가 대사는 태산에서 하는 봉선이었다. 봉(封)은 ‘하늘에 올리는 제사’, 선(禪)은 ‘땅에 올리는 제사’였다.

고대인은 여러 산 중에서 태산을 ‘천하제일의 산’으로 여겼고, 그래서 인간의 제왕이 마땅히 가장 높은 태산에 가서 천제에게 제사를 올려야만 하늘의 명을 받은 것으로 여겼다. 태산 위에 흙을 쌓아 제단을 만들고 제사를 올려 하늘의 공덕에 보답하는 것을 ‘봉’이라 칭했다. 태산 아래 양부(樑父)나 운운(云云) 등의 작은 산 위에 자리 잡고 땅에 제사를 올려 땅의 공덕에 보답한 것을 ‘선’이라 칭했다. 이는 고대 제왕의 가장 큰 제전이었지만, 조대가 바뀌어 강산의 주인이 변하거나, 오랜 난리가 끝나고 천하가 평화로워져야만 천지에 봉선할 수 있었다.

고서 중 가장 먼저 봉선을 언급한 것은 춘추시기의 ‘관자(管子) 봉선편(封禪篇)’인데, 책 속에서 관중(管仲)이 말했다. “옛적에 태산에서 ‘봉’하고 양부에서 ‘선’한 가문이 72개였지만, 진나라 혜공이 기록한 바로는 12 가문뿐이다. 옛날 무회(無懷)는 태산에서 봉제(封祭)를, 운운에서 선제(禪祭)를 올렸다. 복희(虙羲)는 태산에서 봉제를, 운운에서 선제를 올렸다. 신농(神農)은 태산에서 봉제를, 운운에서 선제를 올렸다. 염제(炎帝)는 태산에서 봉제를, 운운에서 선제를 올렸다. 황제(黃帝)는 태산에서 봉제를, 정정에서 선제를 올렸다. 전욱(顓頊)은 태산에서 봉제를, 운운에서 선제를 올렸다. 제곡(帝嚳)은 태산에서 봉제를, 운운에서 선제를 올렸다. 요(堯)는 태산에서 봉제를, 운운에서 선제를 올렸다. 순(舜)은 태산에서 봉제를, 운운에서 선제를 올렸다. 우(禹)는 태산에서 봉제를, 운운에서 선제를 올렸다. 탕(湯)은 태산에서 봉제를, 운운에서 선제를 올렸다. 주나라 성왕(成王)은 태산에서 봉제를, 사수(社首)에서 선제를 올렸다. 모두 하늘의 명을 받은 후에 봉선의 제를 올렸다.” 그들은 모두 천명(天命)을 받은 후에야 봉선의 제전을 거행했다. 이로써 우리는 봉선 의식이 ‘삼황오제’ 시기에 이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3대 제왕 중 하나라의 우, 상나라의 탕과 주나라의 성왕이 모두 태산에서 봉선을 했다.

그렇다면 하나라의 우, 상나라의 탕과 주나라의 성왕은 왜 봉선을 했을까? ‘오경통의(五經通義)’에서는 “성을 바꾸어 왕이 되고 태평을 이루니 반드시 태산에서 ‘봉’하고, 양부에서 ‘선’하여 천명을 왕에게 내리고 만물을 이롭게 하며, 하늘에 태평을 고하고 뭇 신의 공덕에 보답한다”라고 했다. 바로 고대의 제왕이 봉선하는 목적은 태평성대, 또는 하늘이 길조를 내릴 때 천지를 향해 천하를 재정비한 자신의 위대한 업적을 보고하고, 동시에 천명을 받아 인간 세상을 다스리겠다는 의사를 표시하는 것이었다. 이는 다시 한 가지를 분명하게 표명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들에게 하늘은 자신이 포함된 모든 사람이 반드시 감사하고 경외하고 기원하는 대상이라는 것이다.

(계속)

 

원문발표: 2019년 8월 6일
문장분류: 천인지간>문사만담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8/6/39046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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