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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사가 미리 정해지다

[밍후이왕]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이 내일 할 일을 정확하게 볼 수 있고 심지어 자세히 볼 수 있다면 그것은 과학으로는 전혀 해석할 수 없다. 현대과학은 시간이 한 방향으로 흘러가며, 앞의 1분에서 다음 1분으로 흘러가므로 이후 시간과 아직 발생하지 않은 일을 정확히 알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인식한다.

그렇다면 현대과학의 인식이 우주의 절대적인 진리일까? 아래의 같은 사람이 겪은 여러 가지 일은 중화 전통문화에서 나온 것인데, 혹시 당신에게 세계와 인류에 대해 다른 인식방식을 제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후사가 미리 정해진 황제의 하사 빵

한황(韓滉)은 당나라 중기의 재상으로 현종, 숙종, 대종, 덕종 등 4대 황제를 겪은 사람이다. 그는 성격이 강직하고 청렴하고 검소했으며, 사람을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잘 썼다. 그는 서예에도 능했는데 소 그림을 잘 그려 절세의 작품으로 평가받는 ‘오우도(五牛圖)’로 많은 추앙을 받았다. 원나라 서예가 조맹부는 “대단히 신기한 희대의 명필”이라며 한황을 칭송하기도 했다.

한황이 중서부(中書府)에 있던 어느 날 관원 한 사람을 불렀는데 그가 지각했다. 한황이 그를 처벌하려 하자 그가 용서를 구하며 말했다. “저는 상관에 대한 관리를 겸하고 있어서 제때에 올 수가 없어서 늦었습니다.” 한황이 문책했다. “너는 재상 수하의 사람인데, 누가 또 너를 관할하느냐?” 그가 말했다. “저는 인연에 따라 또 저승의 일도 관리합니다.”

한황은 그의 말을 믿지 못하고 캐물었다. “이왕 저승을 관리한다고 하니 구체적으로 무엇을 책임지느냐?” 그가 말했다. “저는 세간에서 3품 이상 관원의 음식을 책임집니다.” 한황이 그 말에 이어서 물었다. “기왕 그렇다면 내가 내일 무엇을 먹게 되느냐?” 그가 말했다. “이 일은 작은 일이 아니라 함부로 누설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미리 종이에 적어두었다가 나중에 확인할 수는 있습니다.”

한황은 곧 그를 용서하고 놓아주었다. 이튿날 아침 황제가 갑자기 한황을 불렀다. 그가 황제를 만날 때 마침 태관(太官, 황제의 음식을 담당하는 관리)이 황제에게 수라를 바치고 있었다. 황제는 빵 한 접시의 반을 덜어 한황에게 하사했다. 한황은 참으로 맛이 좋아 맛있게 먹었다. 그러자 황제가 나머지 반도 그에게 먹게 했다.

한황은 집으로 돌아온 후 배가 부풀어 오르는 느낌이 들어 의원을 불러 진맥을 하게 했다. 의원이 말했다. “음식이 체한 것이니 귤껍질 차를 조금 마셔서 통하게 하시지요. 밤에 묽은 음식을 드시면 내일 날이 밝은 후에 나을 것입니다.” 한황은 그때 저승의 일을 겸직하는 그 하급 관리의 말이 생각났다. 다시 그를 불러 그가 적은 종이를 보았다. 종이에 쓰인 것은 오늘 먹은 것과 차이가 없었다.

한황이 다시 그에게 물었다. “인간의 음식이 모두 이미 책에 나와 있는가?” 그가 대답했다. “3품 이상의 관원은 음식이 날마다 정해지고, 5품 이상은 열흘에 한 번씩 정해지고, 6품에서 9품까지의 관원은 계절마다 한 번씩 정해지고, 봉록을 받지 않는 일반 백성은 매년 한 차례 정해집니다.”

천 년 후의 자로

사람이 일생에 무엇을 할 것인가가 잘 정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생명 윤회의 긴 과정에서 한 사람이 어떤 배역을 맡을 것인가도 인연에 따라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다.

공자 문하의 수제자 10명 중 한 사람이고, 72현인 중 한 사람인 중유(仲由)는 자가 자로(子路)이며, 성격이 강직하고 용맹스러워 장검을 차고 다니는 것을 좋아했는데, 효도로 이름을 떨친 24효자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역사에는 한황이 자로로 환생하기 위해 천 년 전의 솔직하고 곧은 성격과 ‘자신에 대한 남의 비판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좋은 말을 들으면 즉시 행하는’ 품행을 그대로 지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덕종 정원(貞元) 2년, 한황은 조정에 들어가 재상이 되었다. 한황의 청렴함은 조정과 세간에 널리 알려졌지만, 당시 지위와 권력이 높았던 한황에게는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않는 생각이 있었으니, 바로 마음속에 불충한 반역의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머리 석 자 위에 신령이 있어서 그의 불충한 마음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득도하여 하늘로 돌아간 중니(仲尼, 공자)가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여전히 세간에서 윤회하는 제자를 일깨워주려고 했다.

다른 공간을 통해 공자의 친필 편지를 얻다

어느 날, 이순(李順)이라는 상인이 경구(京口, 현재의 전장시) 부두에 배를 정박시키려 했다. 그런데 강에 갑자기 강한 바람이 불어 부두의 받침돌에 묶여 있던 줄이 끊어졌고, 상선은 바람을 따라 새벽까지 표류해 어느 산기슭에 정박했다. 바람과 파도가 잠잠해지자 이순은 언덕에 올라 구조를 요청한 후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순이 언덕에 올라 좁은 오솔길을 따라 5, 6리를 걸어가다가 머리에 흑두건을 쓴 이마가 드러난 사람을 만났다. 옷은 소박하고 고풍스러워 당시 당나라의 옷차림과 달랐으므로 이순은 지금까지 이런 옷차림을 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이순을 산 위의 한 궁전 앞에 오르게 했다. 누대와 전각을 보니 화려함이 예사롭지 않았고, 인간 세상의 왕궁 같지 않은 크고 화려한 궁으로 보였다. 이순이 궁전으로 들어가 겹겹의 문을 통과하자 정원이 나왔고, 궁전 내부가 대단히 넓었는데, 안내자는 멀리서 대전을 향해 깊이 절을 올렸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대전의 문발을 제치고 나와서 이순에게 말했다. “당신 편에 서신을 보내려고 하니 금릉(金陵)의 한황에게 전해주십시오. 이번 일로 수고를 끼쳐 드리게 된 것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말을 하면서 편지 한 통을 꺼내어 이순에게 주었다. 이순이 인사를 하며 받자, 그는 이순에게 궁전 밖으로 나가 곧장 하산해 배에 타라고 했다.

전체 과정에서 호기심이 동한 이순이 떠나기 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여기가 어디입니까? 만약 한황이 ‘누가 편지를 보냈느냐’고 물으면 제가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

안내인이 말했다. “여기는 동해의 선도(仙島) 광산산(廣桑山)입니다. 과거 노나라 선부(정관 11년, 당 태종 이세민은 공자를 선부(宣父)로 추앙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중니께서 득도하여 신선이 되셨는데 하늘이 그에게 이 선도를 다스리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한황은 바로 그의 제자 중유의 환생입니다.”

“한황은 성품이 강하고 오만한 사람이라, 성인께서 그가 인간 세상에서 죄를 지어 업을 빚을까 걱정해서 편지를 써서 그를 일깨우려 하십니다.”

아홉 자 충언, 한황이 읽고 충절을 지키다

이순이 배로 돌아오니 선계의 한 사자가 배에 있던 사람들에게 말했다. “모두 걱정하지 말고 자리에 앉아서 절대로 배 밖을 보지 마시오. 아주 빨리 여러분이 온 곳으로 돌아갈 것이오. 만약 밖을 본다면 배가 뒤집힐 것이오.” 그 말은 아주 효과가 있어 배 안의 사람 누구도 감히 밖을 보지 못했다. 순식간에 배는 시공을 뛰어넘은 것처럼 경구의 부둣가에 닿았고, 정말 만 리가 일순간의 지척이었다.

이순은 한광의 관저를 찾아가 편지를 전했다. 한광이 펼쳐보니 편지에는 올챙이처럼 생긴 고대 문자 아홉 자만 쓰여 있어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한광이 이순에게 연유를 묻자, 이순은 한광에게 선경에서 겪은 일을 상세하게 말해주었다. 한광은 너무 불가사의하다고 느꼈고, 이순이 요사스러운 말로 자신을 기만한다고 생각해서 그를 포박하여 엄하게 심문하려고 했다. 그러나 아홉 글자는 한광의 눈앞에 선명하게 놓여있었다. 한광은 고대의 전서체와 주나라 글자를 아는 사람을 데려와 보였지만, 그들은 누구도 아홉 글자를 알아보지 못했다.

어느 날, 미간에 사마귀가 있는 고대 복장을 한 사람이 한광을 찾아와 배알하면서, 자신이 고대 문자를 안다고 했다. 한광은 그를 맞이해 편지를 보여주었다. 편지를 본 그는 편지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리고 한광을 향해 절을 하며 말했다. “이것은 선부 공구의 서신이며, 하나라 우왕 시대의 올챙이 문자로 쓴 것입니다. 이 아홉 글자는 ‘한광에게 고하노니(告韓滉) 신하의 절개와 지조를 지키고(謹臣節) 경거망동하지 말라(勿妄動)’는 내용입니다.”

한황은 그에게 깊은 존경을 표하고 그에게 큰절을 올렸다. 그가 문밖을 나서자 곧 보이지 않았다. 한광은 망연자실하여 아주 오랫동안 앉아 있다가 개과천선하기로 했고, 이순에게 후하게 감사를 표했다. 그때 이후 한광은 공손하고 신중하게 조정을 보위하면서 충절을 지켜 청사에 이름을 남겼다.

신전문화는 하늘과도 통한다

신이 전한 중화문화는 넓고 심오해서 현대과학의 이론과 기술로는 조금도 엿볼 수가 없다. 춘추시대의 성자가 시공을 뛰어넘어 당나라 재상에게 충고한 것은 마치 공상 영화와 같다. 만약 그중 윤회의 인과관계를 똑똑히 밝힌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사실 인류 자체가 바로 한 막의 연극인 것이다. 그러나 무신론에 속은 사람들이 그 배역에 너무 깊이 빠져서 생명의 진실한 의미를 망각한 것이다.

무신론과 유물주의 세계관에 중국공산당의 당 문화가 더해져 현대 중국인의 지혜는 먼지와 때로 두텁게 덮여 가려진 것이다. 무신론과 당 문화의 교란으로 사람들은 더 이상 인류사회의 일체를 신이 통제하고 있음을 믿지 않는다. 인류 개체의 운명도 신이 생명을 다른 공간 속에 배치한 데 따른 것이며, 그가 윤회하는 동안 쌓은 덕과 업력이라는 두 가지 미시적 물질의 많고 적음에 따라 잘 배치된 것이다.

중화의 전통문화는 신이 인류에게 전한 것이다. 인류는 오로지 전통으로 회귀하고, 신전문화를 존중하고, 선행으로 덕을 쌓고, 중국공산당을 멀리해야, 진정한 나를 찾아서, 왔던 길을 똑똑히 볼 수 있고, 반본귀진(返本歸眞)할 수 있다.

출처:1. 종로(鐘輅): ‘전정록, 한진공’2. 태평광기, 신선19 한광

 

원문발표: 2019년 7월 5일
문장분류: 천인사이
원문위치: http://big5.minghui.org/mh/articles/2019/7/5/38959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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