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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의 수덕(水德)은 후세에 전해준 귀감

[밍후이왕] 물에는 생명을 양육하고 천지에 스며드는 덕이 있다. 선진(先秦)시대 제자백가는 모두 물의 덕행을 찬미했다. 공자는 물을 보고 ’천지에 널려 있으며 무위이며 덕행이 있다’고 했고, 노자는 ‘만물에 이로워도 다투지 않으니 도에 가깝다’고 했다. 관자(管子)는 물은 만물의 본원이고 종실의 역할을 한다’고 했다. 물은 만물을 탄생하게 하지만 낮은 지위에 만족해한다. 무위로 통치하고 또 승리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사기, 봉선서’에는 ‘오늘의 진(秦)나라가 주(周)나라를 대체한 것은 수덕(水德·오행 중 물에 상응하는 왕자의 덕)에 힘입은 것이다. 진문공(秦文公)이 사냥을 나갔다가 흑룡을 얻었는데 이는 그 수덕의 길상물이었다’고 했다. 본래 진나라의 번영은 하늘의 뜻이었다. 진시황은 부지런히 덕정(德政)을 수행하여 이런 상서로운 길조를 한 단락 휘황찬란한 역사로 만들었다.

기원전 246년, 진나라 동쪽에 이웃한 한(韓)나라 환혜왕(桓惠王)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진시황에게 수리공정 전문가를 파견했다. 징허(涇河)강의 물줄기를 낙양으로 잇는 운하를 건설해 농업 관개수로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이때는 진시황이 즉위한 해로 그의 나이 13세였다. 운하를 만드는 공정은 방대해서 하루아침에 완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나라 왕은 진나라의 어린 왕을 기만하여 진나라의 인력과 재력을 소모시키고, 동으로 토벌하는 힘을 없애려고 했다. 운하가 절반 만들어졌을 때 총명한 진시황은 이 책략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정(鄭)나라는 ‘운하가 성공하면 진나라에 이익’이라며 계속 시공할 것을 청했다. 진시황은 10년 동안 동서로 길이 300여리(약 120㎞)에 이르는 정국거(鄭國渠)를 건설했다. 진흙과 모래가 많은 징허강에서 4만 헥타르(400㎢, 서울시 전체면적의 2/3에 해당)의 흙을 파 관개수로를 만들었고, 많은 농경지에 조를 심었다. 이로부터 가물고 척박했던 중원 토지가 비옥한 농경지로 되었고, 진나라는 도리어 더욱 부강해졌다.

정나라의 관개시설은 진나라의 농업을 번영하게 했고, 100여 년 동안 관개수익을 얻게 했다. 더욱이 징허강을 끌어들여 관개하는 첫 사례를 만들었다. 이후 역대 왕조들은 이 기초 위에서 수리시설을 건설했다. 오늘날에도 이런 수리시설은 여전히 중화에 복을 가져다 줘 진정 천추에 남을 공덕으로서 선의 덕행이다.

2천년 전 진나라는 이웃 국가의 음모에 대해, 비록 왕이 소년이지만 이미 국왕의 풍모를 갖춰 사적인 원한을 극복하고 일시에 재부를 내놓아 만민의 복지로 바꾸었다. 그는 국가와 백성을 위해 현자를 추천하고 덕행을 베풀었다. 운하를 정나라 명의로 세상에 전하였는데, 이는 얼마나 넓은 흉금인가? 명리를 버리고 얻은 것은 넓은 용량과 기백이며, 담력, 지략이다. 정나라는 운하 건설로 한나라의 수명을 연장해주었고, 또 진나라를 도와 세상에 이롭게 하는 공적을 이루었다.

유유히 흐르는 물은 현자의 인풍(仁風)과 같다. 정나라의 수로가 중원의 메마른 토지에 흘러들 때, 진나라의 수덕(水德)은 표면과 내면으로 모두 점차 널리 퍼져나갔다.

물의 성질은 조용하면서 동적인데, 조용히 흐를 때는 만물을 적신다. 낙수는 댓돌을 뚫고, 성난 물은 세차게 흘러 낡은 먼지를 깨끗이 씻어낸다. 진시황은 집권기간 동안 더욱 기세가 대단했으며 승승장구해 물의 위덕을 남김없이 체현 해냈다.

기원전 237년, 진시황이 집권하여 모사인 울료(尉缭), 이사(李斯) 등 문신을 중용했다. 천하를 통일할 계획을 세워 왕전(王翦), 왕분(王贲) 등의 무장을 파견, 전쟁을 일으켰다. 진시황은 “천하가 고락을 같이 하고 싸웠으며, 이로써 왕이 되었다.”는 말을 통해 전쟁을 겪는 백성들의 비참한 처지를 가엾이 여겼다. 진시황의 천하통일은 단순히 권력을 키우려는 목적이 아닌 사회의 폐단을 다스리는 선한 의도로 천하를 곤경에서 구하려는 것이었다. 이때 진나라는 군세가 강하고 강성하여, 문무를 겸비했다. 모든 형세가 점차 진나라가 제왕의 자리에 오르도록 흘러갔다. 이렇게 진시황은 천시와 지리, 인화를 모두 갖춰 17년만에 6국을 통일하는 대업을 완성했다.

진시황은 하늘의 수덕을 이어받아 만물을 양육하는 사명으로 난세를 평정하고 후세의 태평성세를 이루기 위해 정사에 근면했다. 결국 6국을 항복시켜 새로운 왕조를 건설했다. 천하통일 이후 진시황이 걸어야했던 길은 역사상 참고하거나 본받을 수 없는 전혀 새로운 길이었다. 그는 이 과업을 완성하기 위해 정사에 더욱 집중했다. 천하의 대사, 크고 작은 모든 문제에 대해 답을 주어야 했다. ‘사기’에 의하면, ‘진시황이 상소를 보고 비준하는데, 밤낮으로 상소가 올라와 휴식할 시간이 부족했다’고 한다. 진나라의 문자는 죽간에 새겼다. 진시황이 봐야할 상소는 저울로 중량을 재서 그 양을 가늠했는데, 매일 일정한 중량의 상소를 보아야 휴식할 수 있었다고 한다.

진시황은 천하통일 후 통일제국을 건설하는데 힘썼다. 진시황은 왕이 죽은 후 그 공덕을 찬양하여 추증하는 호인 시호를 폐기했다. 사망 후 생전의 공과를 논하는 것 자체가 무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울러 군현을 새로 만들고, 영토를 더욱 확대했다. 문자와 도량형도 통일해 통일국가로서의 기틀을 만들었다. 이러한 일련의 여세를 몰아 중원대지가 개변되었다.

진시황은 또 하늘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기 위해 ‘수덕’을 국가 제도의 근본으로 삼았다. 오행에서 물은 겨울과 북쪽, 검은색과 대응한다. 이에 따라 10월 초하루를 1년의 시작으로 보았고, 의복과 부절 및 깃발의 색깔을 모두 검은색으로 통일했다. 또한, 물은 오행 가운데 숫자 6과 대응하므로 숫자와 관련된 제도에는 6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 많았다.

황하의 물은 천상에서 온 것이고, 수덕에 순응한다. 진시황은 황하를 ‘덕수(德水)’로 개칭, 수덕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렸다. 그가 통치하는 진왕조의 덕은 거센 파도처럼 성대했다. 후대의 군왕들도 모두 진나라의 제도를 계승하여 덕정을 행하고 천하를 다스렸다. 후대의 신하와 백성들은 충절과 인의의 유학의 가치관을 받아들여 제왕을 보좌하고 나라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쳤다. 진나라 왕조가 창설한 황권 체제, 법률, 경제, 문자 체제는 이후 각 왕조들에 의해 부단히 채택돼 2000여 년이나 이어졌다.

진시황이 집권한 37년은 역사상 새로운 길이었으며, 그의 천하통일은 법률 측면뿐만 아니라 경제적, 문화적 측면을 포괄한 전면적인 통일이었다. 진나라가 세운 기초가 없었다면 이후 중국의 역사도 달라졌을 것이다. 진시황의 업적은 후대에 길이 남았다.

(대기원에서 발췌)

 

원문발표: 2018년 5월 11일
문장분류: 천인지간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8/5/11/36508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