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후이왕] 진시황의 업적을 당태종 이세민(李世民)은 이렇게 평했다. “근대에 천하를 평정하고 변방을 개척한 자는 진시황 한무(漢武) 뿐이다.” 당나라 대시인 이백(李白)의 ‘고풍(古風)’이라는 시 중에서도 이렇게 읊었다. “진왕이 6합(六合)을 제압함은 웅장한 범[虎]의 기세네! 구름 위에 검을 휘두르니 서쪽에서 제후들이 모여들고, 천계를 명확히 판단하니 지략으로 세상을 호령하네. 군대 거두어 인재를 양성하여 함곡관이 동으로 향하네! 춘추산맥에 공적 새기고 말 달려 ‘랑야대(琅琊台-3천명의 선남선녀를 거느리고 장생불로초를 구하러 바다 건너 동쪽으로 출발했다는 전설적인 장소)에 오르네.“ 역사학자 류다이즈(柳詒徵)는, 진시황이 최초의 황제로 등극한 것은 2천 수백 년 전의 역사적이 사건이 아닐 수 없다고 평했다.
《사기·권6·진시황본기》고적각본(Bjoertvedt/위키디피아)
진시황제에 대한 역사는 2천여 년 동안 잘못 평가해왔다. 그는 영웅적인 황제임에도, 모든 걸 폭정으로 이룬 폭군으로 묘사한 것이다. 후세에 진시황을 폭군이라고 지적한 근거와 평가는 ‘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학정으로 궁형을 당한 노역자가 70여만 명에 달했고, 사치는 아방궁(阿房宮)과 리산(驪山) 등으로 극치를 이루었다고 했다. 그 전의 해석 역시 진시황이 리산과 아방궁을 세우면서 노예와 범죄자 70만 명을 동원했다고 했는데, 목재 등 자재를 촉, 초나라에서 운반해 와야 했기 때문에 수많은 인력, 재력, 물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평했다.
그러나 정확한 해석과 평가는 그것과 다르다. 리산과 아방궁을 건립하는데 동원된 인원이 70여만 명이라고 해도, 관리와 일부분 군대가 동원됐으며, 6개국의 전쟁포로와 범죄자들이 동원됐을 뿐이지, 보편적으로 일반 백성들은 동원되지 않았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궁’은 궁형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고대 궁중의 관원(隱宮)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진나라의 병역과 부역제도는 어떤가? ‘한서’에 의하면 진나라의 남자는 일생 중에 병역의무를 져야하는데, 병역 1년, 둔병 혹은 예비역의 1년 복무를 마친 후 매년 1개월씩 복무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20세 남자가 병역을 시작해서 50세가 될 때까지 국가를 위해 총 4년 반 동안 복역하는 것이다. 이는 현재의 병역제도와 비교해 봐도 별로 큰 차이가 없다.
어떤 사람이 취합한 통계에 의하면, 진시황은 11년간 모두 2백만에서 2백5십만 명을 징집하여 전쟁, 건축, 변방 둔병에 투입한 것으로 집계했다. 그 전의 전쟁 상황으로 보아도 많은 인원을 동원한 것이 아니다. 기록에 의하면 진소왕(秦昭王) 8년의 전쟁기간에 진나라와 그 외 다른 국가의 병력 수는 총 5백만 명에 이른다. 전쟁에 투입된 5백만 명과 통일 후 공사에 투입된 2백만 내지 2백5십만 명을 비교할 때, 우리는 하나의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후 병역과 부역은 크게 경감된 것이고, 따라서 다치거나 사망한 수도 크게 줄어들었다. ‘진나라 규율’ 규정에 의하면 부역자에게 일정액의 봉급과 식사와 의복을 제공했고, 한 가정에서 동시에 2명이 복무하는 것을 금했다.
어떤 기록에는 진나라의 형벌과 그 종류가 참혹한 것으로 기록돼 있지만, 그런 형벌은 당시 진나라가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춘추전국시대에 제후열국들이 모두 사용한 것들이었으며, 진나라는 오히려 형법과 대민법을 만들어 국가, 사회, 각계각층에 따라 순조롭게 운영한 것으로 되어 있다. ‘사기’에도 진시황이 사용한 혹형 종류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진시황의 법치사상은 태산 바위에 명확하게 새겨 놓았는바, “치국은 도로써 운영하고, 여러 방면의 생산은 적절하고 모두 법치주의 형식으로 한다.”고 되어 있다. 국가의 운영은 대의를 기본으로 법률에 의해 각계각층이 상호 협조하여 발전시켜야 한다고 했다. ‘랑야구’의 돌에 새긴 명문은 “공평한 법률은 만물의 기강”임을 명시하고 있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분명해야하며 부자(父子)는 합심해야 한다고 했다. 대의는 공평한 법률에서 나오고, 만사만물의 기강이며, 자식은 부모에 효도하고, 부모는 사랑으로 관계를 이루어야 사람과 사람 간에 화목이 있다고 했다.
물론 진시황이 6개국을 통일한 후 짧은 10년간에 진행된 일련의 공사와 제도개선은 확실히 빠르게 지속적으로 추진되었기 때문에 무리가 있을 수 있었을 것이고, 또 진시황이 남은 생에서 나라의 기틀을 다지고, 자신의 업적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기세 있게 추진하는 가운데서 도가 지나친 경우가 있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진시황의 ‘폭(暴)’의 문화는 결국 중화문화에 거센 힘을 주입했다. 그러므로 후세에 겸손하고 온화한 유가문화에 미리 강한 기세를 주입시켜 강한 생명력을 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중화문화는 2천여 년 동안 온갖 풍상과 전쟁의 고초 속에서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분서갱유’의 진상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를 말하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건 폭정이 아닌가?” 하고 말한다.
우선 ‘분서’와 ‘갱유’는 두 가지 다른 사건이다. ‘갱유’라는 말은 동진(東晉)사람이 한조시대 학자 궁안궈(孔安國)의 위작인 ‘고문상서(古文尚書)’의 머리말에서 처음 등장한다. 물론 진나라와 한나라는 모두 ‘갱유’와 ‘분서’를 동시에 연결해서 말한 적은 없다는 것을 설명해준다.
‘분서’와 ‘갱유’는 기원전 213년에 발생했으며, 전국통일 후 8년이 되어서인데, 하나는 기원전 212년에 발생한 것이다.
◇ ‘분서’에 관한 ‘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진시황이 함양궁에서 생일연회를 개최하여 70여 명의 박사가 술을 올리며 생일을 축하했다고 했고, ‘한서-백관의 공경표’에서 말하길, 고금에 정통한 6백 명의 석·박사, 진관, 관원이 수십 명이라고 했다. 또 ‘한지(漢志)’에는 박사, 제자를 교육하는 교사가 있었고, 국가대사가 있을 시는 문답을 했다고 했다. 말하자면 진나라의 박사제도는 전국시대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며, 그들은 국가정책토론회에 참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지위는 매우 높았던 것이다.
주연이 베풀어지는 연회에서 교육담당박사 주청신(周青臣)이 먼저 축사를 하면서 진시황의 공적을 칭송했다. 그는, 진나라는 과거에는 천리도 안됐지만 진시황이 전국을 평정하고, 오랑캐를 추방하고, 군현에 제후를 봉하니 전쟁과 우환이 없어 사람마다 안락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는 상고시대 이래 어느 누구도 폐하의 덕에 미치지 못한다고 칭송했다. 이에 진시황은 매우 기뻐하였다. 그러나 박사 재인 순어월(淳於越)은, 반박의 말로 아첨이라고 나무랐다. 상주(商周)를 예로 들며, 분봉제가 좋으니 모든 일은 고대의 전통을 따라야 장구할 수 있다고 반박했다고 전한다.
공개적으로 옛 것을 중시하며, 현재를 경시하는 순어월의 기백은 참으로 컸다. 현재 실시 중인 군현제를 반대했는데, 그것도 진시황의 생일연회장에서 발언한 것이다. 이는 당시의 박사들은 자신의 견해를 말할 수 있었으므로 언로가 상당히 자유로웠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진시황의 반응이었다. ‘사기’의 기록에서 진시황은, “여러분은 논의하고, 토론하라”고 말했다. 만약 폭군이었다면 그런 장소애서 진시황의 면전에서 어떻게 진시황의 시책과 다른 의견으로 논박할 수 있겠는가!
며칠 후 승상 이사(李斯)가 순어월이 옛것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면서 현재의 새로운 제도를 비방하는 것은 불순하다며 하, 상, 주(夏, 商, 周)의 제도를 모방하지 못하게 하는 고금의 ‘분서령(焚書令)’을 상소로 올렸다. 그러나 이미 그 전에 각 제후들이 분쟁을 일으키며 각기 사람을 끌어 모아 유세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현재 천하가 평정되고 법령이 제정되어 모든 시책은 폐하 한 분에게서만 나오므로 모두가 안정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백성은 집에서 농공생산에 주력하고, 공부하는 사람은 법령과 형벌금지 등을 읽어야 한다고 역설했고, 또 진시황에게 사설학교 설립을 금지하고, 사관에게 전국에 지시하여 고서경전이 아니면 전부 없애라고 상소했다. 그러므로 박사관에 소장하고 있는 것을 제외한 천하에 산재해 있는 시(詩), 서(書)와 제자백가 저작을 전부 수거해 지방관이 불살라 태우라고 지시했다. 다만 의약, 점괘, 농서(農書)만을 제외하도록 했다.
이사의 상소를 받은 진시황은 ‘제어(制曰) 가(可)’라고 재가했다. 그러나 그것은 엄밀히 따지면 그렇게 하라는 재가의 뜻이 아니다. 작은 차별이 있지만, 큰 문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통상적으로 말하자면 ‘제어’는 오직 백관에게만 사용하는 것이고, 일반 백성에게는 시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조서’는 천하에 알려야 하는 것이다. 이중성을 띤 진시황의 재가는 승상 이사의 충심을 받아들이면서도 금서의 범위와 정도를 암시한 하나의 묘수를 나타낸 것이다.
한나라가 건립된 후 전문서적은 진나라 문서를 제외하고는 모자람이 없었다. 해당기관에서 수요에 긴급을 요할 때 복사를 했다. 현재 후베이(湖北)에서 출토된 진나라의 문물로 볼 때 진나라 시대에 대규모의 분서사건이 발생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캠브리지 중국진한서’ 편에 진나라가 분서로 손실된 것은 그렇게 심하지 않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보다는 많은 전란에서 훼손된 것으로 보고 있다.
승상 이사는 진시황의 재가의 뜻을 알아차리고 전국적으로 금서령을 내리지 않았던 것이다. 오직 수도 함양에서만 소규모로 진행한 것이다. 주의할 점은 박사관에 보존된 대량의 서적은 불태우지 않았다. 물론 순어월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
우리는 이 역사적인 사건을 통해 볼 때, 진시황이 유생에 대해 너그러움과 관용을 베풀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의 재능이 뛰어나 전반 국정을 올바로 심사하여 문화를 계승하겠다는 책임의식이 있는 훌륭한 성품의 군주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진시황은 인격이 빛나는 매력이 있을 뿐인데, 어디가 폭군 같은 모습인가?
◇ 갱유에 관하여 ‘사기’에 기록하기를, 방사(方士-점성술사) 노생(盧生)과 후생(侯生)은 평소 진시황의 신임을 얻었다. 그러나 그들은 뒤에서 “진시황이 고집불통이고, 파벌을 조성시켜 박사들을 중시하지 않고, 오직 권세와 탐욕에만 정신을 팔고 있다.”는 등의 비난을 했다. 그러면서 “그런 황제를 위해 영약을 만들지 않겠다.”고 했다. 사실 그들은 실제로 영약을 만들지 못했으므로 두려웠던 것이고, 그래서 그런 말로 시황제를 비방하다가 몰래 도망쳤다.
‘사기’에서는, 이 사실을 알게 된 시황제가 매우 진노했다고 했고, 어사를 파견해 함양의 다른 방사들을 심문해 진상을 밝혀냈는데, 영약연단제조에 참여한 방사들이 상호 제보한 진술로 460여 명이 적발됐고, 그들은 모두 진시황의 명령으로 생매장시켰으며, 동시에 앞으로는 군왕을 기만해 군신의 도리를 위배한 자들은 응징할 것을 천하에 공고하며, “방사들의 악행을 거울로 삼으라.”고 고시했다. 각 지역별로 말의 뜻이 다소 차이가 있는데, ‘생매장’은 당연히 죽인 후 매장을 말한 것이다. 현대에서 인식하는 ‘생매장’이 아니다
‘사기’에서는 “구덩이에서 방사를 살해했다.”고 기술돼 있을 뿐, 유생을 살해했다는 내용은 없다. 진시황이 유생 순어월을 대하는 태도를 보아도, 진시황이 유생을 생매장했다는 말은 구덩이에서 죄인 방사를 살해한 것을 유생으로 기만한 것이다. 불로장생의 신약을 만든다는 그 방사들을 정말로 460명이나 생매장했는가 하는 것 역시 의문이 든다. 왜냐하면 진시황이 “천하에 알려 이후를 징벌한다!”는 뜻과는 다소 모순이 있는 것이다. 진시황이 자기의 살인행위를 스스로 천하에 고시한단 말인가? 숫자가 와전되었거나 날조한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라 역사적 탐구가 필요하다.
성안의 백성은 학살하지 않았고, 공신을 죽이지 않았다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진시황이 6개국을 정벌해 소멸시키는 20여 년간에 적을 학살하거나 참수한 기록이 아주 적다. 연나라 태자 단(丹)이 형가(荊軻)를 밀파해 진시황 암살을 시도했어도, 진나라 군대가 연나라 계성(薊城)을 점령한 후에도 불지르거나 학살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연나라 대신들도 살해하지 않았다. 역사서에 의하면 진시황은 연나라 왕으로부터 연나라 태자 단의 수급을 받았을 뿐이다. 진나라 군대는 다른 나라의 수도를 점령했을 때도 역시 학살은 하지 않았다. ‘사기’를 포함한 모든 역사서에 모두 진나라군대가 성을 점령한 후 학살한 잔인한 기록이 없다. 진시황은 우대정책 위무정책을 썼던 것이다.
진시황은 6개국의 왕족과 귀족을 우대했을 뿐만 아니라 진나라 공신들을 후하게 대접했다. 그가 즉위한 37년 중에 단 한 명의 장군이나 대신도 죽이지 않았다. 대장인 왕전(王翦)이 죽을죄를 졌어도 진시황은 그가 부귀영화를 향수하고 천수를 다하도록 해주었다. 왕전의 두 아들도 진시황은 총애하고 임용했다. 이 역시 확실히 폭정과는 다른 것이었다.
만약 진나라가 폭정을 했다면 가혹하게 당한 관리가 많았을 것이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사기-혹사열전(酷吏列傳)’에서 진나라 관리는 선발되지 못하고 오히려 한나라 관원들이 선발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필자는, 2천년 이후 무수한 사람들이 모두 위대한 진시황을 오해하고 역사를 오독함으로써 진시황에게 천고에 억울한 누명을 씌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기원에서 발췌)
원문발표: 2018년 5월 7일
문장분류: 천인지간>문학 역사 만담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8/5/7/36508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