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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하고 관대한 곽원평

곽원평(郭原平)은 자는 장태(長泰)이며, 송조(宋朝)의 회계(會稽) 영흥현(永興縣) 사람이다. 그는 천성이 정직하고 관대했으며 선한 일을 즐겨했다. 늘 각 방면에서 먼저 다른 사람을 생각해 주었으며 개인의 사리를 탐내고 다투지 않았다.

곽원평은 매우 효도했고 그는 꼭 자신의 힘에 의거해 부모님을 봉양하려 했다. 그는 목공일을 할 줄 알았기에 늘 다른 사람에게 일을 해주며 양친을 부양했다. 그는 천성이 겸손해 매번 다른 사람들에게 일을 해주고는 다만 일반 목공들이 받는 공전을 받았다. 고용주가 그를 접대해 밥을 먹일 때, 곽원평은 자신의 집 형편이 가난해 부모님들은 고기 요리를 먹은 적이 없기에 자신도 다만 짠지에다 밥만 먹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어떤 때는 집에 먹을 밥이 없었다. 그는 온종일 빈속으로 일을 하면서 가족들과 함께 굶주렸다. 저녁에 일을 끝내고 공전을 받고 집으로 돌아올 때, 마을에서 쌀을 산 후 불을 지펴서 밥을 지었다. 아버지가 꼬박 1년 동안 중병에 걸리자 곽원평은 옷을 벗지 않고 자고, 소금에 절인 야채를 맛보지 않았다. 이렇게 겨울과 여름을 보냈는데 잠도 한 번 누워서 잔 적이 없었다.

곽원평은 매번 물건을 팔러 시장으로 가서 다른 사람이 얼마냐고 물으면 그는 늘 시장가격의 절반으로 팔았다. 이렇게 시간이 오래되자 시내 안 사람들까지도 모두 그를 알게 됐다. 그래서 원래 가격에 더 보태 그에게 주어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이 늘 서로 밀면서 사양했다. 곽원평은 늘 사람들에게 가격을 좀 깎아주려고 했으며 가격을 깎은 다음에야 돈을 받았다.

곽원평이 살고 있는 집 아래는 아주 축축했는데 그는 곧 농가를 돌아 도랑을 파서 고인물을 소통시켰다. 그는 집옆에 일부 대나무를 심었는데 봄날 밤에 어떤 사람이 와서 대나무를 훔쳐갔다. 어느 한 번은 곽원평이 우연하게 일어났다가 대나무를 훔치던 사람과 마주쳤는데 그 도둑은 도망가다가 물도랑에 떨어졌다. 곽원평은 자신이 선행을 널리 펼치지 못해 도둑이 넘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나무를 심은 곳 도랑 위에 작은 다리를 하나 놓아주어 훔치는 사람으로 하여금 다니기 편리하게 했다. 그리고 또 일부 대나무를 꺾어서 울타리 밖에 놓았다. 대나무를 훔치던 사람은 매우 부끄러워 이로부터 다시는 그의 집으로 가서 대나무를 훔치지 않았다.

곽원평은 참외를 심는 일을 했다. 송세조(宋世祖) 대명(大明) 7년에 큰 가뭄이 들어 그가 참외를 운송하는 뱃길은 더 이상 다니지 않았다. 현령(縣令) 유승수(劉僧秀)는 그가 가난하고 연로한 것을 가엾게 여겨 다른 도랑의 물을 그에게 풀어 주었다. 곽원평은 말했다. “만천하에 큰 가뭄이 들어 백성마저도 아주 어렵게 됐는데 어떻게 논밭에 대는 물을 줄여서 참외를 운송하는 배를 통행하는 데 쓸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도보로 자신이 가야할 길을 걸어서 전당(錢塘)으로 가서 물건을 팔았다. 매번 배를 타고 전당으로 올 때 옆의 배가 제방 아래에 막혀서 가지 못한 것을 보기만 하면 곧 신속하게 노를 잡고 다가가 도와주었지만 자신의 배는 스스로 잡아당기면서 옆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 만약 자신의 배가 이미 제방을 지나왔지만 뒷면의 배가 아직 따라잡지 못한 것을 보면 배를 멈추고 기다렸는데 마치 이렇게 습관이 된 것 같았다.

곽원평의 덕행이 사람들을 탄복시키자 태수(고대에 지방의 최고 행정 관리) 왕승랑(王僧朗)은 그를 ‘효렴(孝廉)’으로 추거(推擧)했지만 곽원평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태수 채흥종(蔡興宗)도 곽원평의 사람됨과 행실에 대해 아주 놀랍게 생각했다. 그래서 곧 자신의 쌀을 곽원평과 역시 청렴하기로 소문난 산음현(山隂縣) 주백년(朱百年)의 아내에게 선사했다. 곽원평은 확고하게 거듭 사양하며 죽어도 받지 않으려 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했다. “부군(府君)께서 당신의 덕행을 표창해 상을 내리시고, 또 당신이 연로하시고 가난함을 가엾게 여기시기 때문에 봉양함을 선사하는 일이 있게 됐는데 어찌 사양할 수 있겠습니까?” 곽원평은 말했다. “부군께서 만약 제 행위 때문에 하사하신다면 저 혼자만이 잘한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마음대로 이런 상을 받을 수 없습니다. 만약 제가 가난하고 허약해진 것 때문에 상을 내리신다면, 80~90세 되는 노인이 아주 많습니다. 집집마다 모두 매우 가난한데 다만 저 혼자만이 아닙니다.” 그는 시종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고 주백년의 아내도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곽원평은 어려서부터 어른이 되기까지 사람과 관계에서 전혀 대드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와 함께 살아온 사람들은 수십 년을 함께 지내면서 그가 좋았다 나빴다 하는 얼굴색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아들 셋에 남동생 하나가 있었는데 모두 덕행이 있었다. 맏아들 백림(伯林)은 효렴으로 추거됐고, 둘째 아들 영복(靈馥)은 유림(儒林) 제주(祭酒)로 모셔졌으나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송서(宋書)』에서)

문장발표: 2011년 03월 04일
문장분류: 고금담론> 주보 204호
원문위치: http://zhoubao.minghui.org/mh/haizb/204/A05/831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