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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傳文化】따지거나 원망도 없이 덕으로 이름을 날린 승관

[밍후이왕] 승관(承宮)은 자(字)가 소자(少子)이며 동한(東漢) 낭야고막(琅邪姑幕 지금의 산동성 제성)사람이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가정이 몹시 가난했지만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근면하게 학문에 임했다. 결국 학문에 성취를 이룬 후 고향에서 글을 가르치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

천하가 크게 혼란한 때를 만나자 승관은 학생들을 이끌고 한중(漢中)으로 피난을 갔다. 나중에는 처자식을 데리고 몽음산(蒙陰山)으로 갔는데 그곳에서 농사를 지었다. 그러던 어느 날 승관이 심은 곡식이 성숙하기 직전에 갑자기 어떤 사람이 나타나 그 곡식이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승관은 그와 조금도 따지지 않았고 곡식을 그에게 넘겨준 후 그곳을 떠났다.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하면 일반인들로서는 감당하기 어렵겠지만 승관은 따지거나 원망하지 않았고 자신의 절실한 이익 앞에서도 담담하게 양보했다. 사실 이는 나약(懦弱)한 것이 아니라 참고 양보하는 큰 미덕의 일종이다. 이는 학문과 덕행이 있고 수양한 사람만이 해낼 수 있는 것이다. 승관은 이 사건을 계기로 조야(朝野)에 명성을 날렸고 사서(史書)에도 그가 아름다운 덕으로 이름을 날린 것을 찬양했다. 그러자 삼부(三府)에서 잇달아 그를 벼슬길에 나서도록 했지만 승관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영평(永平 58-75년)연간에 승관은 조정의 부름에 응해 서울로 갔다. 명제(明帝)는 그에게 박사를 제수했고 오래지 않아 중랑장(中郎將)으로 승진시켰다. 그는 조정에 들어가서도 수차례 충언(忠言)을 하며 솔직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조정신료들은 모두들 그의 기개를 두려워했다. 그의 위명(威名)은 멀리 흉노에까지 퍼졌으며 선우(흉노의 왕)가 따로 사자를 파견해 그를 만나볼 정도였다.

* 역주: 삼부(三府란 동한시대 주요관직인 태위(太衛), 사도(司徒), 사공(司空)의 부(府)를 말한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중앙집권적인 관료기구가 아니라 주요 책임자들이 자신이 필요한 사람을 선발해 일을 맡겼는데 이를 부(府)라고 했다.

(English Translation: http://www.clearwisdom.net/emh/articles/2007/4/25/84900p.html)

문장발표 : 2007년 4월 13일
문장분류 : 천인사이>문사만담
문장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7/4/13/152403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