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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傳文化】 절개를 지키고 검약하여 복을 누리다

글/청언(清言)

[밍후이왕] 선병(宣秉)은 자(字)가 거공(巨公)이며 동한시기 풍익(馮翊) 운양(雲陽 지금의 섬서성 순화 부근)사람이다. 젊을 때부터 덕행(德行)과 절조(節操)를 중시해 인근에서 명망이 아주 높았다.

서한 말기 애제(哀帝), 평제(平帝) 시기 간신 왕망(王莽)이 정권을 잡자 정국이 어둡고 혼탁해졌다. 선병은 이에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은거했으며 관에서 여러 차례 불렀지만 병을 핑계대고 나오지 않았다. 왕망은 그를 재상으로 임명하고 싶어 했지만 그는 여전히 응하지 않았다. 나중에 왕망이 제위를 찬탈한 후 또 다시 사람을 보내 그를 불렀다. 그러나 선병은 병이 깊다는 핑계를 대며 끝내 관직에 나서지 않았다.

하늘의 이치는 밝게 드러나고 선과 악에는 보응이 따르기 마련이다. 공명(功名)과 이록(利祿)이란 몸 밖의 물건이라 만약 눈앞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악인과 더불어 타락하고 악행을 저지른다면 조만간 악보를 받는다. 명리에 담담했던 선병은 선행을 지키며 절개를 지켰으며 부귀나 권세에 굴하지 않는 기개가 있었다. 사실 장기적인 안목에서 보자면 이것이야말로 총명하고 멀리 내다보는 것이다.

간신 왕망은 결국 패망했고 갱시제(更始帝) 유현(劉玄)이 즉위했다. 선병은 비로소 조정의 부름에 응해 시중(侍中)이 되었다. 건무(建武) 원년에는 어사중승(御使中丞 지금의 감사원 부원장에 해당)이 되었다.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는 특별히 조서를 내려 그를 사예교위, 상서령과 함께 황제 앞에서도 좌석에 앉을 수 있게 했다. 그러자 수도 백성들이 이들 3인을 가리켜 ‘삼독좌(三獨坐)’라 불렀다. 다시 말해 언제든 황제와 독대를 할 수 있을 만큼 신임이 두터운 신하라는 뜻이다. 선병은 이듬해 사예교위로 승진했고 나중에는 대사도(大司徒 승상)에 이르렀다.

선병은 비록 직위가 높고 권력이 막중했지만 여전히 절약이 몸에 배어 있었다. 자신이 받는 봉록(俸祿)이 있으면 모두 친척이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나라에서 하사받은 토지도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었고 자신은 단 한 석(石)의 양식도 축적하지 않았다. 그는 몸에 비단옷을 걸치지 않았으며 일반 백성들이 입는 보통의복과 거친 이불을 사용했다. 음식을 먹을 때도 금이나 은으로 된 고급 그릇은 사용하지 않았으며 투박한 질그릇을 사용했다. 한번은 황제가 그의 집에 들렀다가 그의 검소한 모습을 보고는 “옛날 초(楚)나라에 청빈하게 절개를 지킨 공승(龔勝)과 공사(龔舍) 두 사람이 있었다고 하지만 그들도 경만 못할 것이다!”라고 찬탄했다.

사람의 돈과 재물 등은 모두 전생에 고생스럽게 쌓은 덕으로 바꿔온 것이다. 여기에는 분명히 정해진 수가 있으니 결코 무궁무진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 어찌 절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자신의 내생을 위해 고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울러 사치, 음란, 폭력은 덕을 손상시키는 동시에 자신에게 재앙과 천벌을 초래하며 절개와 지조를 갉아먹는다. 때문에 자고이래로 자신의 덕행과 수양을 중시한 사람들 중 검약을 중시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다시 말해 검약이란 덕을 쌓고 복을 늘리는 행동이다.

문장발표 : 2007년 4월 8일
문장분류 : 천인사이>문사만담
문장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7/4/8/152347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