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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傳文化】 수양과 대의를 중시했던 공분

[밍후이왕] 공분(孔奮)은 자(字)가 군어(君魚)로 동한 초기 부풍(扶風) 무릉(茂陵)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덕행과 수양을 아주 중시했다.

광무제(光武帝 BC 6-AD 57) 건무(建武) 연간에 전란이 발생하자 공분 일가는 하서(河西)로 피난을 떠났다. 그는 오래지 않아 고장(姑臧)이란 지방을 책임지는 관리가 되었다. 당시 고장은 하서에서 가장 안전하고 부유한 현으로 꼽혔고 이곳 사람들은 모두 적지 않은 재산이 있었다.

하지만 공분은 이곳에서 4년동안 재임하면서 자신의 재산을 조금도 늘리지 않았다. 당시는 천하가 아직 안정되지 않을 때라 많은 독서인(讀書人)들이 모두 그를 비웃었다. 부유한 지방에 관리로 있으면서 자기 집은 부유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분은 여전히 엄격하게 자신의 덕과 지조를 수양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현(縣)을 다스리는 것도 어질고 평화롭게 했으며 평소 생활이 아주 검소했다. 뿐만 아니라 아주 공손하고 세심하게 모친을 모셨으며 자신과 처자식들은 일반 음식을 먹어도 모친에겐 좋은 음식을 봉양했다.

공분의 이런 덕행은 당시 군 태수로 있던 양통(梁統)의 중시를 받았다. 태수는 종래로 그를 부하로 대한 적이 없었으며 늘 대문 앞까지 나와 직접 맞이했다. 또한 자신의 모친께 인사 시키곤 했다.

전란이 평정된 후 하서의 관리들은 모두 서울로 불려갔다. 이때 그들의 재물을 실은 수레가 끝없이 이어져 도로를 가득 메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공분은 가진 재산이 없어 혼자 수레를 타고 길을 떠났다.

현지 백성들이 이 모습을 보고는 모두들 “공분은 청렴할 뿐만 아니라 어질고 인자하시니 우리 현 사람들은 모두 그의 은혜를 입은 셈이다. 그러니 어찌 그냥 보낼 수 있는가? 우리 함께 찾아가 그분의 은혜의 보답하자.”라고 했다. 이에 자발적으로 소나 말, 물건을 모아 수백리 길을 따라가며 공분에게 선사했다. 그러나 공분은 단지 감사 인사만 드리고 단 하나의 물건도 받지 않았다.

수도인 낙양에 도착하자 공분은 무도군(武都郡)의 군승(郡丞 태수를 도와 군의 행정업무를 총괄하는 직책. 우리나라의 행정부지사에 해당)으로 승진되었다. 어느 날 도적들이 침입해 관아에 있던 관리들을 죽이고는 관군이 추격해올까 두려워 공분의 아내와 아들을 인질로 잡았다. 당시 공분은 50이 넘은 나이에 아들이라곤 하나밖에 없었지만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고 대의(大義)를 위하여 도적 체포에 전력을 기울였다.

현지 관리들과 백성들은 그의 이런 모습에 감동받아 앞을 다퉈 그를 도와주었다. 도적들은 도망갈 길이 없게 되자 공분의 아내와 아들을 앞세우고 관군의 공격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공분은 관병들을 지휘해 더욱 맹렬히 공격하게 했고 결국 도적을 완전히 소탕할 수 있었다. 나중에 황제가 이 사실을 알고는 특별히 조서를 내려 그를 표창하고 무도군 태수로 승진시켰다.

공분은 태수로 임명된 후 시비(是非)와 선악(善惡)을 분명히 가리고 악을 징벌하고 선을 선양했다. 아름다운 덕을 지닌 사람을 보면 마치 자기 가족을 만난 것처럼 좋아했다. 그의 감화를 받아 전 군(郡)의 사람들이 모두 덕행에 힘쓰게 되었다. 이후 그가 다스리던 지역은 더욱 태평해졌고 칭찬의 소리가 널리 퍼졌다.

그는 관리로서 청렴하게 복을 만들어준 한편 대의(大義)를 지켜 곳곳에서 전체를 중시해 백성들의 행복을 꾀했다. 공분은 이처럼 뛰어난 덕행으로 청사(靑史)에 이름을 남겼고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의 칭찬을 받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되고 관리가 됨에 마땅히 공분처럼 “도(道)를 근심하되 가난은 근심하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자신의 덕행을 중시하고 수양에 힘쓴다면 덕과 재주를 겸비해 큰일을 이룩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의 존경도 얻을 수 있다.

문장발표 : 2007년 3월 29일
문장분류 : 천인사이>문사만담
문장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7/3/29/151581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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