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육진(陸真)
【명혜망 2007년 2월 4일】 김성탄(金聖歎 1608-1661)은 명말청초의 저명한 문학평론가이다. 어릴 때부터 재주와 명성이 있었으며 비평을 좋아해 《수호지》, 《서상기》 등에 평을 달았다. 또 시에도 능통해 《침음루시선(沉吟樓詩選)》을 저술하기도 했다.
청나라가 권력을 잡은 후 ‘항량곡묘안(抗糧哭廟案)’에 참여해 관아에서 사형판결을 받았다. 그의 피살에 대해서는 역사학자들의 평가가 따로 있겠지만 여기서는 논외로 하고 본문에서는 다른 측면에서 이 일에 얽힌 인연관계를 말해보고자 한다.
청나라 때 주량공(周亮工)이 쓴 《뇌고당척독신초(賴古堂尺牘新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한 사군(師君 지방 감찰관)이 있었는데 김성탄이 비평한 ‘재자서(才子書)’를 보고 그에 대해 크게 탄복했다. 이에 김성탄의 고향에 따로 사람과 수레를 보내 그를 초빙해 오도록 했다. 하지만 김성탄은 마침 당시(唐詩)에 대한 평론을 저술하고 있던 관계로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서 나중에 꼭 찾아뵙겠노라고 사양했다.
다음 해에 이 사군이 꿈을 꾸는데 김성탄이 머리를 산발하고 맨발을 한 채 나타났다. 그는 책상으로 뛰어들면서 복면을 한 채 눈물을 흘리면서 “저 김성탄입니다!”라고 말했다.
사군이 새벽에 일어난 후 “성탄이 죽었구나!”라고 말했다. 다시 김성탄의 고향에 사람을 파견해 알아보니 그가 꿈을 꾸던 날 저녁이 바로 김성탄이 처형당한 시간이었다.
이외에도 청대 장유모(章有謨)는 《경선재잡기(景船齋雜記)》의 기록에 따르면 김성탄은 전생에 항주(杭州) 소경사(昭慶寺)의 승려였다고 한다. 김성탄이 사망한 후 오군(吾郡) 주미방(朱眉方)의 꿈에 찾아와 이렇게 고백했다는 것이다. “나는 전생에 승려였습니다. 늘 사랑에 빠져 노는 것을 좋아하다 이런 겁난을 당했습니다.”
이상 두 가지 이야기는 모두 《고금필기정화록(古今筆記精華錄)》 제8권 중《김성탄 사후의 기이한 일(金聖歎身後異事)》이란 문장에 실려 있다.
불가(佛家)의 말에 따르면 사람은 생생세세 윤회하며 끊임없이 인과응보를 받아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업력윤보(業力輪報)이다. 김성탄은 전생에 승려였으므로 이치상 마땅히 색욕을 끊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계율을 지키는데 엄격하지 않았고 남녀 간의 사랑놀음에 빠져 계율을 위배한 일이 있었다. 이는 승려로서 큰 잘못을 범한 것이며 이 때문에 금생에 목이 잘리는 큰 겁난을 당했던 것이다.
수련인으로서 마땅히 색욕심을 담담히 여기고 부부간에 서로 공경하며 사랑하는 도리를 지켜야 한다. 설사 수련하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부부간의 윤리를 저버리고 여색을 탐하거나 혹은 다른 사람의 여인을 더럽히지 말아야 한다. 이를 어기는 사람은 반드시 징벌을 받게 마련이다.
◇ 참고자료
항량곡묘안(抗糧哭廟案)은 청나라 순치제 때 지방의 탐관오리가 백성들에게 줄 식량을 착복하자 불의를 참지 못한 김성탄 등 몇몇 수재(秀才)들이 문묘 앞에 찾아가 대성통곡하며 백성들의 억울함을 호소한 사건이다.
문장발표 : 2007년 2월 4일
문장분류 : 천인사이>문사만담
문장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7/2/4/148279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