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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전문화】 의(義)를 중시한 선인들

【명혜망 2007년 1월 21일】 중국 전통문화 중에서 ‘의(義)’란 아주 중요한 개념 일뿐만 아니라 선인들이 몹시 중시했던 도덕수양과 인격의 경지였다. ‘의’란 도의(道義)를 가리키는데 다시 말해 행위가 정의롭거나 혹은 도덕규범에 부합하는 것이다. ‘의(義)’와 ‘인(仁)’의 관계는 매우 밀접하기 때문에 ‘인의(仁義)’라는 두 글자는 늘 함께 사용된다.

어떤 의미에서 말하자면 ‘인’은 바로 ‘의’가 내포된 것이며 ‘의’는 곧 ‘인’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다. 고대에 ‘의’는 또 늘 ‘이(利 이익)’와 대비해서 말했다. 의리(義)를 앞세우고 이익(利)를 뒤로 하며 의로써 이를 다스리는 것은 유가의 중요한 사상이다.

공자는 “군자는 의를 깨닫고 소인은 이익을 깨닫는다(君子喻於義,小人喻於利)”(《논어(論語)·이인(里仁)》) “의롭지 못한 부귀는 내게 있어 뜬구름과 같다(不義而富且貴,於我如浮雲).”라고 했다.

맹자는 ‘목숨(生)’과 ‘의리(義)’를 둘 다 얻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차라리 목숨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겠노라(舍生而取義)고 했다.

공자는 “이익을 보면 의를 생각한다(見利思義)”고 했고 또 “이득을 보면 의를 생각한다(見得思義)”고 했다. 이익이란 사람이 얻고자 하는 것이지만 이익을 보고 의를 망각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만약 취할 수 있는 이익이 있다면 우선 도의에 부합하는지 고려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이득을 취함에 도가 있고 이익을 보고 의를 망각하지 않는 큰 이치이다.

이에 대해 공자는 일찍이 춘추시대의 제 경공을 예로 들었다. 제(齊)나라 경공(景公)은 본래 제환공의 뒤를 이어 제나라를 다시 한 번 패자(覇者)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나중에 사치하고 부패하여 어질지 못하고 의롭지 못한 일들을 많이 저질렀다. 때문에 제경공이 사망할 때 비록 4천 필의 말이 있었음에도 민중들은 도리어 그에게 무슨 칭송할 만한 덕행이 있음을 찾을 수 없었다.

만약 한 사람이 불의(不義)한 일을 너무 많이 저질렀다면 우리는 그에게 “불의한 짓을 많이 저지르면 반드시 스스로 멸망한다”고 말한다. 이 말의 내원은 《춘추좌전(左傳)》에서 유래한 것이다. 대략적인 뜻은 도의에 부합하지 않는 일을 하면 결국에는 반드시 징벌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 말에는 한 가지 이치가 담겨 있는데 어떤 사람이 불의한 짓을 저질렀다 해도 혹 일시적으로 요행을 얻을 수는 있다. 하지만 불의한 짓을 지나치게 많이 저지르면 최후에는 반드시 징벌을 받게 된다.

선인들은 “선에는 선한 보응이 있고 악에는 악한 보응이 있다. 보응이 없는 것이 아니라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석 자 머리위에 신령이 있으니 사람이 선을 행하건 혹은 악을 행하건 반드시 인과응보가 있게 마련이며 단지 시간의 문제일뿐이란 뜻이다.

맹자는 “자신의 정당한 소유가 아닌 것을 취하면 의가 아니다(非其有而取之, 非義也)”(《맹자·진심상(盡心上)》)이라고 했다. 반대로 ‘의에 부합하는’ 상황 하에서 마땅히 얻을 수 있는 이익은 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공자의 제자인 자로(子路)가 일찍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한 적이 있다. 이때 물에 빠졌던 사람이 그에게 소 한 마리를 주며 감사를 표시했다. 자로는 아주 즐겁게 선물을 받았다. 공자가 이 말을 듣고는 아주 기뻐하며 “앞으로 노(魯)나라에서는 앞을 다퉈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즉 모든 이익을 취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의에 부합하지 않는’ 상황일 때에만 이익을 취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맹자는 또 “목숨도 내가 원하는 바요 의리 역시 내가 원하는 바이나 둘을 함께 얻을 수 없다면 목숨을 버리고 의리를 취할 것이다.”(《맹자·고자상(告子上)》)라고 말했다.

이것은 ‘의’와 ‘이’에 관한 맹자의 말이다. 사실 이 구절의 앞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물고기는 내가 원하는 바요 곰발바닥 역시 내가 원하는 바이나 만약 둘을 동시에 얻을 수 없다면 물고기를 버리고 곰발바닥을 취할 것이다.”

이는 사람들이 현실 생활 속에서 늘 부닥치게 되는 양자택일의 곤란한 상황 하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논하고 있다. 마치 물고기와 곰발바닥처럼 둘 다 내가 원하는 것이지만 오직 한 가지만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이해득실을 따져보아야 한다.

선인들은 이런 선택의 상황에서 비록 자신의 생명이 소중하긴 하지만 도의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겼다. 도의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생명까지도 희생할 수 있었으니 이래야만 비로소 ‘인의(仁義)’지사가 될 수 있다.

한(漢) 대의 유명한 학자 동중서(董仲舒)는 “의에 관한 법은 나를 바로 잡는 것에 달렸지 남을 바로 잡는 것에 달린 것이 아니다”(《춘추번로(春秋繁露)·인의법(仁義法)》)라고 했다. 다시 말해 도의의 법칙은 자신을 단정히 하는데 있지 남을 단정히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동중서가 보기에 유가의 ‘인’은 ‘남을 편안하게’ 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인을 강조한다. 반면 ‘의’란 자신을 바로잡는 것으로 바로 도의로 자신을 바로잡는 것이다.

남송 시대의 사상가 육구연(陸九淵)은 “군자는 의를 중시하기에 의를 얻은 사람이 존중받고 의를 잃은 사람은 제기할 가치조차 없다. 의를 따르면 영광이 되고 의를 위배하면 치욕이 된다.”고 말했다.

육구연이 말하는 유가의 ‘의’는 사람들의 모든 행동거지가 마땅히 의를 표준으로 삼아야 함을 요구하는 것이다. 즉, 도의에 부합하는 일은 반드시 해야 하고 이것은 사람의 영광이지만 도의에 어긋나는 일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하는바 이는 사람의 치욕이기 때문이다.

문장발표 : 2007년 1월 21일
문장분류 : 천인사이>문사만담
문장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7/1/21/146505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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