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신전문화】 좌절에도 굴하지 않고 천하를 걱정한 유우석(劉禹錫)

【명혜망 2006년 12월 29일】 유우석(劉禹錫)은 당나라 때의 저명한 시인(詩人)이자 작가이다. 낙양(洛陽) 사람으로 대대로 유학을 공부한 학자 가문에서 성장했다. 이런 가문에서 성장한 탓인지 유우석은 문장에 익숙하고 배움을 좋아했다. 여기다 타고난 총명함이 더해져 어릴 때부터 학문에 뛰어났고 기개가 범상치 않았다.

그는 19세 되던 해 당시 수도인 장안(長安)에 유학 가서 조정에 상서를 올렸다. 정원(貞元 785-805) 9년 과거에 나가 진사(進士)에 급제한 후 감찰어사(監察御使) 등의 관직에 임용되었다. 그는 당시 환관들이 권력을 전횡하고 번진(藩鎭)이 할거하며 붕당(朋黨) 사이에 다툼이 끊이지 않는 사회현실에 불만을 품고 개혁운동에 동참했으나 결국 실패로 끝났다.

이후 그의 인생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여러 차례 관직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그는 권력에 굴하지 않고 문명(文明)에 뜻을 품었으며 자신의 강직하고 아첨하지 않는 품격과 활달한 흉금을 표현했다. 몸은 비록 역경에 처했지만 마음은 자신을 근심하기보다는 천하를 걱정했다.

영정(永貞) 원년인 서기 805년, 유우석은 연주(連州 지금의 광동성 연현) 자사(刺史)로 좌천되었다. 그가 강릉(江陵)에 이르렀을 때 다시 조서가 내려와 낭주(朗州 지금의 호남성 상덕) 사마(司馬)로 또 좌천되었다.

한번은 그가 조서를 받들어 수도로 되돌아온 후 ‘유현도관(游玄都觀)’이란 시를 지었는데 이 시 내용이 조정에서 아첨하는 무리들을 분노하게 했다. 결국 이 때문에 그는 또 다시 연주 자사로 좌천되었다. 나중에 그는 기주(虁州), 화주(和州) 자사를 거쳤다. 하지만 유우석은 그 어떤 경우에도 의기소침해지지 않았으며 도리어 적극적이고 낙천적인 태도로 세태의 변화와 관료사회의 부침을 지켜보았다.

그가 안휘성 화주에 있을 때의 일이다. 당시 규정에 따르면 자사인 그는 마땅히 관아(衙門) 내에 있는 세 칸짜리 큰 집에 거주해야 했다. 하지만 화주현의 최고 책임자인 책(策)씨 성을 가진 지현(知縣 현의 우두머리)은 권력에 아첨하는 소인배라 자기 눈앞의 이익만 고려해 유우석을 홀대하고 여러 방면에서 그를 괴롭혔다.

우선 유우석의 집을 성(城) 남문에 위치한 강가에 마련해주었다. 본래는 그를 골탕 먹이기 위해 한 짓이었지만 유우석은 자신의 거처가 큰 강을 마주한 것을 보고는 원망하기는커녕 도리어 아주 기뻐했다. 그리고는 특별히 대련(對聯)을 지어 방문에 붙여놓았다.

“큰 강을 마주해 흰 돛을 바라보니 몸은 비록 화주에 있어도 마음은 조정의 다툼에 있구나(面對大江觀白帆,身在和州思争辯).”

그의 이런 거동을 본 지현은 몹시 화가 났다. 다시 서리(書吏)에게 명령을 내려 유우석의 거처를 남문 밖에서 북문으로 옮기게 했다. 또 집도 3칸에서 1칸 반으로 축소시켰다. 그런데 이 1칸 반짜리 집은 마침 덕승하(德勝河) 근처에 위치해 있었는데 이 부근에는 온통 수양버들로 가득해 자못 독특한 풍취가 있었다. 유우석이 이런 환경을 보더니 아무 생각도 없이 여전히 편안히 거처했다. 그리고 또 한편의 대련을 적어 붙였다.

“강가에 수양버들 청청하니 몸은 역양에 있으되 마음은 경성에 있구나(楊柳青青江水邊,人在歷陽心在京).”

지현은 그가 여전히 유유자득한 것을 보고는 더욱 화가 나서 다시 그의 거처를 조정해 성안에 들어와 살게 했다. 아울러 겨우 한 칸짜리 작은 집을 주었다. 집이 작다보니 겨우 침대 하나와 탁자 한 개가 들어갈 정도로 좁았다. 유우석은 이렇게 반년 동안 무려 3차례나 이사를 다녀야 했다. 옮길 때마다 거처가 작아졌고 마지막에는 겨우 단칸방에 불과했지만 그는 여전히 독서와 작문에 열중했다.

그는 자신의 남루한 거처에 ‘누실명(陋室銘 누추한 집에 붙이다)’이란 이름을 붙이고 사람을 청해 돌에 글자를 새긴 후 문 앞에 세워놓았다. 이리하여 누실명이란 아름다운 이름이 천고에 남았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세속의 시끄러움 속에서도 마음의 안정을 느낄 수 있게 했다.

여기서 잠시 그의 시를 감상해보자.

“산이 높지 않아도 신선이 있으면 이름난 산이요.

물이 깊지 않아도 용이 있으면 신령한 물이라네.

이곳은 비록 누추한 집이나 오직 나의 덕으로 향기가 난다네.

이끼 낀 계단은 푸르고 풀빛은 발을 통해 더욱 파란데

담소하는 선비가 있을 뿐 왕래하는 백성은 없도다.

거문고를 타고 불경을 뒤적이니

음악은 귀를 어지럽히지 않고 관청의 서류로 몸을 수고롭게 하지 않는구나

남양 제갈량의 초가집이나 서촉 양자운의 정자와 같으니

공자께서도 ‘(군자가 거처함에)무슨 누추함이 있으리오.’라고 하셨다.”

(누실명[陋室銘])

山不在高,有仙则名;

水不在深,有龙则灵。

斯是陋室,惟吾德馨。

苔痕上阶绿,草色入帘青。

谈笑有鸿儒,往来无白丁。

可以调素琴,阅金经。

无丝竹之乱耳,无案牍之劳形。

南阳诸葛庐,西蜀子云亭。

孔子云:“何陋之有?”

한편 유우석은 백거이와 동년배이다. 두 사람은 좌천된 기간에 만난 인연으로 좋은 벗이 되었다. 나중에 유우석이 화주 자사를 마치고 도성으로 돌아가는 길에 양주에 들러 백거이를 만났다. 백거이는 그가 장기간 좌천되었음에도 불평하는 마음이 없는 것을 보고 ‘취증유이십팔사군(醉贈劉二十八使君 술에 취해 유우석에서 주다)’이란 시를 지어 “재주와 명성이 번번히 좌절을 당하니, 지난 23년간 그대가 당한 좌절이 너무나도 많네 그려.(亦知合被才名折,二十三年折太多)”라고 위로했다. 실제로 유우석이 두 차례 조정에서 쫓겨난 기간을 다 합하면 총 23년이나 된다.

이에 유우석은 ‘양주에서 백거이를 처음 만나 술자리에서 답하다(酬樂天揚州初逢席上見贈)’라는 시를 지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물에 잠긴 배 옆으로 많은 돛배 지나가고, 병든 나무 앞으로는 온갖 나무들이 봄을 맞네.(沈舟側畔千帆過,病樹前頭萬木春)” 즉, 자신을 물에 잠긴 배와 병든 나무에 빗대 백거이에게 적막함과 고난에 근심하지 말도록 일깨워주었다. 그의 이런 일깨움은 백거이의 만년(晩年) 생활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나중에 유우석은 다시 조정에 돌아와 동도(東都 낙양) 상서성(尙書省)의 주객낭중(主客郎中)이 되었다. 이때 장안에 돌아와 ‘다시 현도관에서 노닐다’를 지어 숱한 타격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굴하지 않은 자신의 의지를 표현했다.

그 후 유우석은 집현학사, 예부낭중을 거쳐 소주(蘇州), 여주(汝州), 동주(同州) 등 3주의 자사를 역임했다. 그는 관직에 있으면서 늘 백성들의 고통에 관심을 가졌고 천하 창생(蒼生)들을 구제하는 것을 자신의 소임으로 여겼다.

유우석이 소주자사로 있을 때의 일이다. 당시 소주에 큰 물난리가 나자 그는 창고를 열어 굶주린 백성들을 진휼(賑恤)함과 아울러 세금을 면제하고 노역을 줄여 주었다. 이에 소주 백성들이 빠른 시간 내에 재난을 극복하고 편안히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해주었다. 소주 사람들은 그를 몹시 떠받들고 그의 처사에 감격했다. 때문에 역대 소주 자사들 중 위응물(韋應物), 백거이(白居易)와 더불어 ‘3걸’로 칭했다. 황제도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해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했다.

유우석은 만년에 낙양에 돌아와 태자빈객(太子賓客)이 되었고 또 검교(檢校) 예부상서(禮部尙書)를 겸했다. 그는 23년에 걸친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승화된 경지를 표현했다.

‘늙음을 노래한 낙천에 화답하다’란 시에서 “상, 유의 별자리에 해저문다 말하지 마오 / 그 빛이 노을되어 온 하늘을 물들일 수 있으니(莫道桑榆晩,爲霞尙滿天)”라고 노익장을 과시했다. 이 시는 달관의 경지에 도달한 유우석의 인격과 경지를 잘 드러내준다.

이처럼 유우석의 순정(純正)하고 아름다운 기품은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 되었고 그의 사심(私心) 없는 경지와 드넓은 흉금은 천지와 함께 존재할 것이다.

문장발표 : 2006년 12월 29일
문장분류 : 천인사이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6/12/29/144416p.html  

ⓒ 2024 명혜망.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