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혜망 2005년 7월 22일】
이사겸(李士謙)의 자(字)는 자약(子約)으로 수나라 조군(趙郡) 평극(平棘) 사람이다. 그는 천성이 공손하고 효성이 지극했는데 어려서 부친을 여의었다. 모친이 세상을 떠난 후 3년 동안 상을 치렀고 자기 집을 사찰에 기증했으며 이후 더는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사겸은 집이 매우 부유했으나 가난한 사람들보다 오히려 더 근검절약했으며 늘 다른 사람을 돕는데 힘을 기울였다. 가령 어떤 사람이 초상이 났는데 장례 치를 돈이 없다면 자기 일처럼 나서서 도와주곤 했다. 한번은 어느 형제가 있었는데 재산을 나누는 과정에 다툼이 생겨 소송이 생겼다. 이사겸이 이 소식을 듣고는 자신의 돈으로 재산이 부족한 쪽에 돈을 보태주니 그들 형제들이 감동했다. 결국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낀 형제는 소송을 취하하고 서로 재산을 양보했다.
어느 날 이사겸이 자기 논에서 곡식을 훔쳐가는 도둑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는 소리를 지르거나 도둑을 잡는 대신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자리를 피해주었다. 사람들이 그의 행동을 이상하게 여기자 그는 “천재인화(天災人禍)가 이어져 어쩔 수 없어서 한 짓인데 어찌 그 사람을 탓하겠는가!”라고 말했다.
어느 해 기근이 들어 마을 사람들이 먹고 살 길이 막막해졌다. 이에 이사겸은 집에 보관하고 있던 수천석의 곡식을 꺼내 끼니를 잇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빌려주었다. 하지만 다음해에도 흉년이 들어 곡식을 꾸어간 사람들이 상환할 방법이 없었다. 그들은 이사겸의 집에 찾아와 사죄의 뜻을 전했다.
하지만 이사겸은 그들에게 빌려간 곡식을 상환하라고 요구하는 대신 그들을 집으로 초대해 함께 식사를 했다. 그리고는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곡식을 빌려가면서 쓴 차용증서를 꺼내 모두 불태워 버렸다. 그리고는 사람들에게 “우리 집에 있던 곡식은 본래 다른 사람들이 재난을 당했을 때 구제하기 위해 준비한 것이지 매점매석을 하거나 이익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제 여러분들의 채무는 다 해결되었으니 더는 이 일로 마음을 쓰지 않았으면 합니다.”
또 한 해가 지나자 대풍년이 들었다. 전에 곡식을 빌려갔던 사람들이 형편이 좋아지자 모두들 빌려간 곡식을 갚고자 했으나 이사겸은 전부 거절하고 받지 않았다.
또 몇 해가 흘러 다시 큰 기근이 들었다. 이사겸은 가산(家産)을 소모해가며 많은 죽을 만들게 했다. 이렇게 하여 그는 약 1만여 명의 사람들을 먹여 살렸다. 이듬해 봄에 이사겸은 또 많은 식량을 꺼내 가난한 농민들에게 나눠주었다.
어떤 사람이 그의 행실을 칭찬하며 “당신의 음덕(陰德)은 실로 너무나 큽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이사겸은 “음덕이란 말의 본래 의미는 마치 이명(耳鳴)처럼 단지 자신만 알뿐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한 일을 당신이 이미 알았으니 거기에 무슨 음덕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겸손해 했다.
또 어떤 사람이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인과와 윤회의 도리를 믿지 않고 책에도 이런 기록이 없다고 하자 이사겸이 그에게 말했다.
“선(善)을 쌓은 집에는 반드시 경사가 있기 마련이고 불선(不善)을 쌓은 집에는 반드시 재앙이 있게 마련입니다. 윤회(輪廻)에 관해서는 역사 서적과 고서 중에 기재된 것이 아주 많습니다. 예를 들어 곤(鯀)이 누런 곰으로 변하고 두우(杜佑)가 두견새가 되고, 포군(褒君)이 용이 되고, 우애(牛哀)가 짐승이 되었다는 기록 및 양호(羊祜)의 전생이 이(李) 씨의 아들이었다는 기록들은 모두 윤회를 입증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사겸은 이처럼 30년 동안 선행을 즐기고 베푸는 것을 좋아했으며 수 문제(文帝) 개황 8년에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그가 살던 조주(趙州) 일대에서 만여 명이 장례식에 참석했다. 나중에 이사겸의 자손들이 크게 번창하자 사람들은 모두들 그가 덕을 쌓은 결과라고 여겼다.
(자료출처 :『수서(隋書) 열전(列傳) 제42』)
문장발표 : 2005년 7월 22일
문장분류 : 천인사이
원문위치 :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05/7/22/106696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