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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전문화(神傳文化)】 구준 모친의 유훈(遺訓)

글/육남 정리

【명혜망 2005년 2월 15일】

황제 앞에서도 충언을 굽히지 않았던 북송의 명재상 구준(寇准)은 어릴 때 부친을 여의었다. 때문에 그의 모친은 베를 짜며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야 했다. 어려운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구준의 모친은 늦은 밤까지 베를 짜는 한편 어린 아들에게 책을 읽혔다.

다행히 구준은 총명하고 배움을 좋아해 모친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열심히 공부에 정진한 끝에 구준은 겨우 19세의 나이에 과거(진사시)에 급제했다. 하지만 아들이 우수한 성적으로 과거에 급제했다는 기쁜 소식이 들려왔을 때 구준의 모친은 이미 위독한 상태였다. 그녀는 죽기 전에 아들을 보지 못할 것을 미리 알고 임종 직전 자신이 손수 수를 놓아 만든 한 폭의 그림을 류(劉)씨 성을 가진 시녀에게 맡겼다. 그리고는 훗날 아들이 높은 관리가 되어 잘못을 저지를 때가 있으면 그때 이 그림을 전해주라고 당부했다.

나중에 구준은 관운(官運)이 좋아 승진을 거듭했고 조정 대신이 되었다. 한번은 구준이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거창한 잔치를 준비했다. 이때 이 모습을 본 류 씨 여인이 마침내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여겨 구준에게 모친이 생전에 맡긴 그림을 바쳤다. 구준이 받아 보니 그림에는 ‘한창과자도(寒窓課子圖)’란 제목이 있었고 그 아래 모친이 직접 쓴 시가 적혀 있었다.

어두운 등잔불 아래 독서하느라 고생이 많겠지만

이 어미는 네가 몸을 닦아 만백성을 위하길 바란다

근면하고 절약하는 가풍은 어미의 가르침이니

언젠가 부귀해지더라도 가난을 잊지 말거라.

孤燈課讀苦含辛,

望爾修身爲萬民,

勤儉家風慈母訓,

他年富貴莫忘貧。

구준은 반복해서 이 그림과 시를 보고 또 보았다. 한순간 그의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눈물이 쉼없이 흘러내렸다. 그는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곧 자신의 생일잔치를 취소하도록 했다.

이후 구준은 부귀영화에 연연하지 않고 온 마음과 정성을 기울여 정사(政事)에 임했으며 청렴하고 공정하며 깨끗한 청백리로 청사에 길이 이름을 남겼다.

◇ 참고자료: 구준(寇准 961-1023)은 북송의 저명한 정치가이자 시인이다. 자는 평중(平仲)이며 화주(華州) 하방(下邦 지금의 섬서성 위남) 사람이다. 송 태종 태평흥국(太平興國) 5년인 980년에 19세의 나이로 진사에 급제했고 순화 5년인 994년에 참지정사(參知政士)가 되었다. 경덕(景德) 원년인 1004년에 재상이 되었다. 거란족의 요(遙)나라 군사들이 북송을 침입했을 때 화평을 주장하던 많은 사람들과 달리 단호히 맞서 싸울 것을 주장했다.

아울러 진종(眞宗) 황제가 직접 전투에 나서 독려하게 하여 요나라와 강화를 맺었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전연(澶淵)의 맹이다.

오래지 않아 주화파인 왕흠약 등에 의해 재상에서 쫓겨나 지방관으로 좌천되었으나 만년에 다시 조정에 기용되었다. 천희(天禧) 4년인 1020년 다시 모함을 받고 지방으로 좌천된 후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는 강직하고 공정한 성품에 청렴하며 뛰어난 업적을 많이 쌓아 북송을 대표하는 재상으로 이름을 날렸다.

문장발표 : 2005년 2월 15일
원문위치 :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05/2/15/95271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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