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탄진(撣塵)
【명혜망 2008년 1월 5일】 문학은 인류 문명의 중요한 전달매체로 사람들이 아주 좋아하는 예술형식이다. 수천 년의 문명 세례를 거치며 풍부한 역사 풍모와 문화 정수를 간직한 중국 고전소설 중에서 가장 찬란하고 천고에 빛나는 작품을 꼽으라면 『수호전(水滸傳)』, 『삼국연의(三國演義)』, 『서유기(西遊記)』, 『홍루몽(紅樓夢)』 등 사대명작을 꼽을 수 있다. 이들 작품은 인류문명을 풍부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인류 발전의 발자취를 기록했고 사람의 사상을 자윤(滋潤)하며 사람의 도덕과 지조를 도야(陶冶)하게 했다. 이들 사대명작의 역할은 이뿐만이 아니다. 인류 발전의 전반 과정을 놓고 볼 때 지금은 인류가 신기원(新紀元)으로 나아가는 경계점에 해당한다. 뒤돌아보면 성현(聖賢)과 선철(先哲)들이 우리에게 남겨놓은 마음의 양식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는데 단지 정신적인 측면의 요구만 해결할 수뿐만 아니라 복잡한 세상일의 미혹 중에서 사람들에게 미래로 나아갈 길을 암시해준다.
인생이란 연극과 같다. 사실 인간 세상도 한편의 연극이며 전반 인류 역사의 흥망성쇠, 왕조의 교체, 전쟁과 평화 등도 모두 연극이다. 단지 사람들이 연극 속에서 늘 자신의 역할을 망각하고 진정으로 자신이 ‘연기’하고 있다는 것을 망각할 뿐이다. 몸은 비록 연극 속에 있어도 마음은 연극을 벗어난 사람의 ‘조용한 관조(靜觀)’만이 이것이 진실로 연극임을 인식할 수 있게 해줄 뿐이다.
이런 경지에 도달하자면 오직 마음을 수련하며 ‘도를 닦지 않아도 이미 도(道) 속에 있는’ 그런 사람만이 해낼 수 있다. 그들은 세속을 멀리 떠나 혼자 수련하거나 혹은 온갖 창상(滄桑)을 두루 겪으며 마음이 담담해졌다. 이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은 반드시 세상일을 통찰하고 생사를 꿰뚫어보며 인생의 의미를 투철히 깨달은 대덕지사(大德之士)만이 가능하다. 동시에 그들은 세상 사람을 제도하려는 큰 뜻을 품었지만 오히려 당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천기(天機)를 통찰할 수 있음에도 말할 수 없었고 단지 ‘야사(野史)’에 속하는 소설을 이용해 ‘농담이나 촌스런 말’로 ‘말겁(末劫)’시기의 세인들에게 경고하고자 했다.
역사의 연관성(連貫性)은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시간상으로 표현될 뿐만 아니라 역사상 출현한 각종 사물의 연계에서도 표현된다. 사람에 대해 말하자면 후자가 전자보다 더 의미가 있다. 매 하나의 사물, 매 하나의 인물은 역사의 수레바퀴처럼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다. 이는 역사에 대해 계승하고 총결하며 미래에 대해 전달하고 열어주는 작용을 한다. 어떤 것들은 역사상 천년이 지난 후에 그 속에 함축한 진정한 함의가 비로소 드러나기도 한다. 사대명작이 바로 이런 역할을 맡았다.
사람은 어디에서 오는가? 또 어디로 가는가? 왜 지금을 ‘말겁’시기라고 하는가? 간단하게 보이는 이런 문제들이 도리어 끝없는 내포를 함축하고 있다. 대법 법리의 지도하에서 사대명작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해본다면 일부 답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 사대명작의 주제 분석
(1) 『삼국연의(三國演義)』–천고에 관통된 ‘의(義)’
사람은 신(神)이 만든 것이다. 중국문화 역시 신이 사람에게 전해준 것이다. 『삼국연의』속에는 신전문화(神傳文化)의 자취가 도처에 존재한다. 천상의 변화, 세사(世事)의 변천, 기인이사(奇人異事), 신묘한 지모는 모두 신의 뜻을 함축하고 있다. 이 소설을 지은 나관중(羅貫中)은 고금에 통하고 백가(百家)를 두루 섭렵했기에 이에 대해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의 취지는 도리어 여기에 있지 않다. 물론 이 책은 지모를 중시하며 제갈량, 조조, 주유, 사마의, 육손, 강유 등 주요 등장인물이 모두 신묘불측한 책략을 지니고 있다. 비록 이들 고인(古人)들의 지혜 역시 확실히 주제의 하나이긴 하지만 이 책에서 표현한 것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럼 무엇인가? 삼국의 역사이야기인가? 아니다, 사실 칠에 허구 삼이란 말이 있듯이 소설은 역사가 아니다. 그러나 역사이야기는 단지 작가가 표현하기 위한 전달매체에 불과하다. 작가가 표현하고자 한 것은 바로 이야기를 보다 풍부하고 다채로우며 생동감 있게 만들어 사람이 구비해야 할 특징인 의(義)이다.
‘연의(演義)’란 ‘의’를 풀이했다는 말이니, 책이름에서도 이미 이런 뜻을 표시하고 있다. 물론 ‘연의’는 일찍이 지금 사람들이 말하는 일종 소설의 체제로 되어버렸지만 그것의 진실한 원뜻은 바로 책속에 등장하는 각종 인물들의 활동을 통해 ‘의(義)’의 내포를 풍부하게 만드는 것이다. ‘의’가 표현하는 내포와 이야기, 인물은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의’를 제기하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단지 한 글자의 표면적인 의미에 불과한 것이 아닌데 그 어떤 정의도 ‘의’의 내포를 정확히 확정지을 수 없다. 단지 약간의 것을 서술하는 작용만 일으킬 뿐이다. 그러나 『삼국연의』를 통해 사람들이 얻는 것은 도리어 영원한 생명력과 참조할 내포를 지니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삼국연의』는 인류 생존의 바탕이 되는 숭고한 품성을 포용하고 있다.
좀 분명히 말하자면 삼국의 이런 저런 흥망성쇠, 은혜와 원한은 말할 것도 없고, 인물의 희로애락, 충효와 반역은 모두 ‘의’를 둘러싸고 진행된다. 사실 고대에는 수많은 ‘연의(演義)’ 소설이 있었지만 『삼국연의(三國演義)』와 함께 논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 책에는 ‘의’에 대해 확실히 아주 세밀한 묘사가 있다. 조조 진영에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서서(徐庶)가 단지 말 한 마디로 조운(趙雲)을 구한 것은 유비에 대한 은의(恩義)이다. 조조(曹操)가 울면서 원소(袁紹)를 장례지낸 것 역시 ‘간웅(奸雄)’의 의(義)에 대한 이해와 행동이다. 맹획이 ‘일곱 번 풀려난’ 은혜에 감동해 귀순한 것은 제갈량의 ‘의’에 감복한 것이다.
또한 의리의 대명사 관우(關羽)는 ‘의’를 극한까지 풀어냈다. 조조가 3일마다 작은 잔치, 5일마다 큰 잔치를 베풀어주고 적토마를 하사하며 정후(亭侯)에 봉했지만 유비를 그리는 관우의 마음은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조조의 이런 융숭한 은혜에 대해 관우는 그 은혜를 갚지 않고는 떠날 수 없다는 의리지사의 본모습을 드러냈다. 유비를 찾아가기 위해 “다섯 관문을 돌파하고 여섯 장수를 목 베며” “단기로 천리를 갔”으니 ‘의’가 여기에 이르러 가히 천지를 놀라게 하고 귀신이 눈물을 흘릴 정도가 되었다.
나는 어릴 때 『삼국연의(三國演義)』를 읽다가 관우가 너그럽게 조조에게 길을 내주 ‘화용도(華容道)’에 이르면 제갈량이 왜 관우를 조운이나 장비로 바꾸지 않았을까 아주 의아해하곤 했다. 만약 관우를 대신해 장비가 화용도를 지켰더라면 조조는 죽은 목숨이 아닌가? 파룬궁을 수련하고 나서야 비로소 명백해졌는데 모든 것에는 정해진 운명이 있다. 제갈량이 이렇게 배치한 것은 하늘의 뜻에 따라 인사(人事)를 행한 것이다. 관우가 조조를 풀어준 것은 관우의 ‘의’를 더욱 완전하고 풍성하게 했다. 나관중의 저서는 정밀로 ‘의’의 현오(玄奧)함을 깊이 체득한 것이다.
수련자들은 사물을 볼 때 종종 본질을 보아낼 수 있다. 필자에게도 이런 인식이 있을 수 있음은 전부 리훙쯔(李洪志) 선생님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다. 리훙쯔 선생님은 『북미순회설법』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삼국연의』는 하나의 ‘의(義)’를 말하였다. 한 조대(朝代)를 경과하면서 세 개의 세력이 서로 겨루는 중에서 충분히 ‘의(義)’의 내포를 표현해 냈다. 게다가 한 조대(朝代)라는 이렇게 긴 시간을 경과하면서 이 ‘의(義)’의 심층문화를 표현해 냈으며, 오늘날 법을 전할 때 인류는 ‘의(義)’에 대하여 비로소 깊은 인식이 있게 되었으며, 의(義)가 무엇인지, 그것의 표면과 내포가 어떤 관계와 심층의 반영을 이끌어내는지 알게 되었다. 사람은 단지 이 글자의 표면만 알 수 없으며 내포 속에서 무엇이든 모두 명백해야 한다. 물론 『삼국연의』 중에서는 사람의 지모(智謀) 등의 내포도 표현하였다.”
신은 사람을 창조했고 또 사람에게 세간의 일체와 사람이 구비해야 할 사상의식 및 도덕표준 등을 배치해주었다. 그러나 이 일체는 사람 자신이 실천 중에서 만들어내야 했다. 인류는 여러 차례 문명을 거치며 오늘까지 걸어왔는데 어떻게 조금씩 완벽하게 했는가? 리훙쯔 선생님께서는 『북미순회설법』에서 말씀하셨다.
“그 어떠한 내포도 없고, 그 어떠한 감당능력이 없으며, 이 공간의 일체 사물에 대해 인식하는 그 어떠한 하나의 완전한 사유개념이 없었다. 그렇다면 사람은 곧 기나긴 세월을 경과하면서 사람의 사상이 점차적으로 풍부해지고 그의 내포와 감당능력이 있게 되었는데 이것은 짧은 시간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표현은 일에 부딪혀도 놀라지 않고, 침착하고 냉정하며, 이지적으로 사고하고, 심지어 창조능력도 있다. 사람이 이러한 사상, 정상적인 사유상태를 구비할 수 있는 이것은 기나긴 역사의 세월 속에서 신(神)이 의도적으로 사람들에게 만들어 준 것이다.”
사람의 매 한 걸음은 모두 신이 배치한 것이다. 때문에 중국에서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줄곧 “사람의 운명은 하늘이 결정한다.”는 말이 있었다. 사실 어찌 사람의 운명뿐이겠는가, 세간의 일체 배치는 모두 신이 의도적으로 한 것이다. 이것이 사람의 사상을 풍부하게 하고 있다.
(2) 『수호전』–살아 숨쉬는 강도들의 군상(群像)
창녀에게 ‘열녀문’을 세워줄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강도들에게 ‘공덕비’를 세워줌은 정말이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강도들에 대해 수백 년 동안 전해 내려오는 민간 전기가 있어 민중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그렇다면 왜 강도들에게 이런 ‘공덕비를 세워주는’가? 이 속의 역사연원은 무엇인가? 설마 후세인들에게 이런 강도들의 행위를 본받게 하려는 것인가?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두루뭉술하게 답할 수 없다.
한번 각도를 바꿔 생각해보자. 사람이란 선악(善惡)이 함께 존재하며 이는 상생상극의 이치가 독립적 개체인 사람 몸에서 반영된 것이다. 상생상극은 일체를 제약하며 일체는 또 상생상극의 이치를 나타냈다. 수련의 각도에서 보자면 사람에게는 불성(佛性)과 마성(魔性)이 있는 것으로 인간세상에서는 또 선과 악, 좋고 나쁨으로 표현된다. 단지 사회도덕과 윤리가 사람들에게 각자 악을 ‘억누르고 선을 발양’하도록 요구할 뿐인데 이렇게 해야만 비로소 사회가 안정되고 조화로우며 각자 자신의 일을 편안히 할 수 있다. 반대로 인류의 부패는 매 사람에게 해악을 끼치기 마련이며 인류의 죄악은 사람들로 하여금 아주 빨리 자신을 도태되게 만든다. 그렇다면 이는 평온하고 안정적인 자연이나 우주와는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중국 고대에는 아주 내포가 깊고 철리(哲理)가 상당히 현묘한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우주관이 있는데 이는 사실 인생관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중국인의 가치관은 상당 부분 사회의 도덕관에서 결정된 것이다.
기왕 ‘악(惡)’이 사람이 본래 갖고 있는 것이라면 사람이 사회에서 생활하는 중의 일체는 모두 선악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 ‘악을 억누르는’ 것은 필연적이며 이는 도덕층면의 요구이다. 단지 ‘악’만을 말한다면 사람이 늘 시시각각 도덕의 관조 하에서 존재하거나 행동할 수는 없으며 사회도덕 역시 이 일보까지 관계하진 않는다. 그렇다면 ‘악’의 표현은 또 필연적인 것이다. 이성을 지닌 사람에 대해 말하자면 ‘악’이 표현될 때에도 준거할 것이 있어야 한다. ‘성(聖), 용(勇), 의(義), 지(智), 인(仁)’은 전국시대 강도의 대명사인 도척이 후대에 남긴 강도의 ‘도(道)’이다. 강도들도 현실 중에서 생활하는 사람이기에 사회 환경을 벗어날 수 없는 환경의 산물이며 사회를 벗어나 단독으로 생존할 수는 없다. 강도의 ‘도’를 벗어나면 사람들은 ‘악’해지기 시작하며 곧 따를 ‘도’가 없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말하자면 수호전에 나오는 강도들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은 이미 백성들의 내심 깊은 곳에 ‘강도’에 대한 인정과 접수가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한 개체 생명에 대해 말하자면 그들의 ‘악’에 대한 태도 역시 사람이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성적인 강도는 이렇게 사람들 영혼의 깊은 곳에서 광범위한 생존 공간이 있다.
사람은 이성적인 동시에 아주 복잡한 존재이다. 어떤 때는 사물에 대해 마음속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실제 현실 사이에 아주 큰 차이가 난다. 사람들이 이규(李逵)의 천진하고 솔직하며 지극히 효성스런 것을 받아들이면 그가 사람을 죽이고 겁탈하며 인육(人肉)을 먹을 때 이미 더 이상 이규의 인성이 어떠한지 왜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지 따지지 않게 된다. 십자파(十字坡)의 장청(張靑)과 손이낭(孫二娘)의 의협(義俠)도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인육 작업장의 죄악을 덮어 갚춘다. 왜각호(矮脚虎) 왕영(王英)의 호색(好色), 고상조(鼓上蚤) 시천(時遷)의 도둑질 등은 ‘호한(好漢)’들의 의리를 풀어내기 위한 양념에 불과하다. 이처럼 각도를 달리해서 보면 왜 이런 사람들을 위해 ‘공덕비’를 세워주는지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왜냐하면 이 또한 인류가 생존하고 발전하는데 필요하기 때문이며 사람의 ‘악’ 역시 사람과 마찬가지로 표현되어 나오기 때문이다.
잘 다스려지고 안정적인 사회에서라면 이렇게 많은 강도들이 나타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관(官)에서 핍박해 백성들이 반항’한다는 것은 아주 도리가 있다. 인류는 바로 이렇게 발전한 것으로 일어나고 몰락하며 흥망하고 쇠퇴한다. 강도가 나타나는 환경은 반드시 어지러운 난세(亂世)로 혼란이야말로 강도들이 생겨나는 온상이다. 사람들이 탐관오리를 아주 미워하는 것은 일정 정도 민중들의 마음속에서 반항을 일으킨다. 이런 의식의 표현이 바로 그들의 마음속에서 ‘호한(好漢)’이 인민을 위해 폭력을 제거하고 선량한 백성들을 안정시킨다는 것이다. ‘호한’들이 무협과 의리를 행하는 방식은 단지 ‘악으로 악을 제거’할 수 있을 뿐이다. 사람들의 ‘강도’에 대한 정의는 이미 자연적으로 ‘호한’을 연역해냈다. 이 책의 저자 시내암(施耐庵)이 강도들을 그려낸 본의는 긍정적인 묘사방법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속 ‘악’을 규범 하는 동시에 정치를 담당한 자들에게는 경계로 삼게 하며, 또한 사람들에 마음속에 강도에 대한 완전하고 풍부하며 분명한 개념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다.
(계속)
문장발표 : 2008년 1월 5일
문장분류 : 천인사이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8/1/5/169571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