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량앤
【명혜망 2007년 11월 20일 】청렴하고 덕을 지키고 안빈낙도(安贫乐道)하는 것은 사람이 지켜야 할 미덕이다. 중국 역사상 청렴하고 덕을 지키고 안빈낙도한 현인(贤人)들이 적지 않다. 명나라의 양딩이 곧 그 한 예이다.
양딩은 명나라 초기 섬서함녕(오늘의 서안) 사람이다. 자는 종기로서 어릴 때 가정이 빈곤하였고 책을 읽기를 매우 좋아했다. 그는 거향(举乡, 청대(清代) 무과(武科) 향시(鄕試)에 합격한 사람)이었고, 회시(会试, 명청(明淸) 시대에 향시(鄕試)에 합격한 ‘举人’들이 치는 3년마다 한 번 실시한 과거 시험으로, 합격자는 ‘贡人’이라 불리며 ‘殿试’를 칠 자격이 주어짐)에서 1등을 하였으며, 정시(廷试, 과거 제도 중 최고의 시험으로, 궁전의 대전(大殿)에서 거행하며 황제가 친히 주지함)에서는 2등을 한 사람으로 태자를 보좌하는 일을 한 호부상서였다.
양딩이 향시험에서 1등을 한 후, 남경국자감의 학장검찰 진경종의 학문과 도덕이 모두 좋다는 말을 듣고 남경국자감에 가서 학업을 완성하겠다고 청구했다. 그는 하인을 쓰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면서 친히 밥을 짓고 태연하기로 여전했다. 진경종은 그의 문장을 보고 그의 행위를 관찰한 후 감개하여 말하기를, “문을 닫고 책을 읽으며 빈곤함에서도 안정한 것은 기실 안휘(颜回)같은 그런 현인도 그와 비슷할 것이다!” 진경종은 항상 양딩의 현명함을 칭찬했다. 태수 한 분이 자기의 딸을 양딩의 처로 주려고 하니 양딩은 부모가 모른다고 하여 사양했다. 그러자 태수가 양딩의 고향친구인 병부상서 서기(徐琦)를 통해 진경종에게 말하기를, “양딩은 매우 빈곤하고 태수집은 매우 부유하다. 양딩의 부모가 알면 꼭 안심할 것이다.” 진경종도 양딩을 권하여 이 혼인에 동의하라고 추천했다. 양딩은, “나는, 사람은 빈곤하여도 도의상에서는 부유한 것이다. 의돈(猗顿)은 매우 부유하지만 그러나 도의상에서는 아주 빈곤하다. 내가 어찌 감히 부귀를 탐하겠는가!” 진경종은 더욱이 양딩의 덕행을 사랑하게 되었다.
양딩이 호부우시랑을 담임한 초기에 직업을 담임하지 못할까봐 친히 ‘열 가지 생각’을 써서 좌우명으로 자신을 고무격려했다. 그 ‘열 가지 생각’은 량사관(量思宽), 범사인(犯思忍), 로사선(劳思先), 공사양(功思让), 좌사하(坐思下), 행사후(行思后), 명사회(名思晦), 위사비(位思卑), 수사종(守思终), 퇴사조(退思早)이다.
즉, 기량은 너그럽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이 범할 때는 참을성 있게 양보하고, 수고하는 일은 앞장서고, 공로 앞에서는 양보하고, 앉는 자리는 남보다 낮게 하고, 길을 갈 때에는 다른 사람의 뒤를 따르고, 명성은 숨기고, 자신을 나타내는 것을 추구하지 않고, 지위는 남의 밑에 있는 것을 편안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관리인의 역할은 도(道)를 향하는 것을 시종 견지하는 것과 나이가 많으면 하루 빨리 자리를 양보하는 것을 포함한다.
양딩 장관은 청렴하고 명백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의 평생에 잘한 것은 없지만 염치 두 글자는 잘 알고 있다.”라고 했다. 그는 고향에서 정선학원을 건립하여 선생을 청하여 고향의 자녀들을 가르치게 하였다. 흉년을 만나면 저축금액 전부를 고향을 구제하는 것에 바쳤다. 성화 15년(1479년)에 양딩은 상소하여 퇴직을 요구했다. 이것은 곧 바로 ‘나이가 많으면 하루 빨리 퇴직을 생각한다.’는 것의 실천이었다. 명 헌종이 퇴직을 허락하면서 종생토록 매달 쌀 두 석을 주도록 하였고 4명의 하인들을 하사하였다. 명조때부터 대신들이 퇴직하면 봉양을 준 것은 양딩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명의 ‘옥당총어(玉堂丛语) 참고)
주:
안회(颜回) : 공자의 제자로 안빈낙도(安贫乐道)로 소문이 자자했다
이둔(猗顿) : 춘추시 노국저명한 부자상인
문장완성 : 2007년 11월 18일
문장발표 : 2007년 11월 20일
문장수정 : 2007년 11월 20일 03:15:44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7/11/20/166843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