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청언
【명혜망 2007년 9월3일】 저언회(褚彦回)는 남북조시대의 사람이며 송나라 태상(太常) 저유지(褚裕之)의 손자이다. 저언희는 어릴 때부터 남달리 침착했고 흉금이 넓었으며 예의범절을 중시하고 덕을 쌓으며 마음수양에 노력하였다. 그의 관직은 사공, 표기장군에 이르렀다.
저언회의 유년시절에 발생했던 일이다. 한번은 가족 중의 한 문생(門生)이 그의 옷을 훔치다가 마침 집으로 들어오는 저언회에게 발각되었다. 저언희는 그를 보고 “잘 숨겨주세요. 사람이 보지 않게요.”라고 말하자 그 문생은 부끄러워하며 돌아갔으며 그 후로 다시는 감히 오지 못하였다. 이 문생은 훗날에 부귀를 누리게 되었는데 저언회에게 찾아와 사죄를 청했다. 저언회는 여전히 예전처럼 그를 대해주었다.
저언회는 송문제의 딸인 남군공주를 아내로 맞이하여 황제의 사위로 되었고 후에 비서승을 담임했다. 부친이 세상을 떠난 후 저언회는 부친의 재산을 모두 동생에게 양보하였으며 자신은 단지 몇 천권의 책만 가졌다. 부친이 살아계실 때 두 궤의 보물을 저언회의 생모 곽씨가 있는 곳에 두었다. 부친의 정실이 곽씨에게 그 보물을 요구하였지만 곽씨는 주지 않았다. 저언회는 눈물을 흘리며 여러 번 어머니 곽씨에게 보물을 부친의 정실에게 돌려줄 것을 요청했다. 그제야 곽씨는 승낙하였다.
경화연간에 있었던 일이다. 산음공주는 생활이 방탕한 공주였다. 공주는 저언회를 만난 후 매우 좋아했으며 이 사실을 황제에게 아뢰었다. 황제는 저언회를 궁내로 불러와서 열흘을 머물게 했다. 공주는 저녁이 되면 항상 그를 찾아와서 협박했지만 저언회는 옷매무시를 단정히 하고 날이 샐 때까지 조용히 서있으면서 추호의 동요도 없었다. 공주는 그에게 “당신의 수염은 마치 창극과 같군요. 무엇 때문에 남자의 정이란 조금도 없나요?”라고 묻자 저언회는 “저는 비록 총명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화를 자초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
송명제가 제위한 후 저언회를 매우 믿었고 의뢰하였으며 사부상서의 직을 임하게 하였다. 어떤 사람이 관직을 얻기 위해 소매 속에 금덩이 하나를 감추고 저언회에게 단독으로 만나길 요청하였다. 만나서 사연을 말한 후 금덩이를 꺼내면서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저언회는 “당신은 자연히 관직을 얻게 될 것인데 이 물건에 의지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꼭 주시겠다면 저는 반드시 위에다 보고를 할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그 사람은 매우 두려워하며 금덩이를 숨긴 후 돌아갔다. 저언회는 후에 사람들에게 이 일을 말했으나 시종 이 사람의 이름을 누설하지 않았다.
송명제가 병이 위급하여 후사를 저언회에게 부탁하면서 유서에다 그의 관직을 정서령과 호군장군으로 정하고 어린 황제를 보좌하도록 하였다. 송고제가 즉위한 후에도 극진한 예의로서 그를 대해주었고 중용하였다. 원회 3년, 저언회는 승진하여 제후가 되었고 상복기간이 끝나자 중서감 시중으로 있었다.
이때의 회수지역은 북조의 영역에 속했기 때문에 남쪽에서는 회수에서 잡은 전복을 먹을 수가 없었다. 간간히 어떤 사람에게서 몇 마리 얻어다 맛을 볼 수 있었는데 값이 매우 비쌌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저언회에게 전복 30마리를 예물로 보내왔다. 그 때 저언회는 비록 높은 지위에 속해있었지만 여전히 매우 가난하였다. 어떤 사람은 저언회에게 이 전복들을 팔아서 돈을 벌면 어떤가고 건의하였다. 그러자 저언회는 정색하며 “나는 이것을 음식이라고 보는 것이지 재물로 보지는 않소. 또한 이것을 돈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기에 비로소 받았던 것이오. 물론 가난하지만 어떻게 예물을 팔아서 돈을 벌 수 있겠소.”라고 말하면서 받은 전복을 친척들과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어 먹도록 하였다. 며칠 지나지 않아서 다 먹어버렸다.
저언회가 어릴 적에 한번은 중병을 앓은 적이 있어 어떤 사람이 그에게 점을 치는데 쓰는 가새풀을 주었다. 가새풀은 마땅히 49가닥이어야 했지만 한 가닥이 모자란 48가닥이었다. 저언회가 48세되는 그 해 연초에 중병으로 앓았으니 성상도 이상을 나타내었는지라 저언회는 자신의 수명이 곧 다하리라는 것을 알고 황제에게 관직에서 물러나겠으니 허락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무제는 허락을 하지 않았고 또 그에게 사공과 표기장군의 관직을 하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언회가 세상을 떠났는데 공로는 혁혁했지만 세상을 떠난 후 남긴 재산은 아무 것도 없었다. 오히려 빚을 몇 십만 졌다. 황제는 조서를 꾸미고 관을 하사했다.
비록 아는 사람, 보는 사람도 없었지만 그는 여색과 불의의 재물 앞에서 확고하게 도의와 기개를 지켰다. 이것은 바로 우리의 신전문화 중에서 말하는 “암실신독(暗室慎独)(교정주:암실에서 혼자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삼가다는 뜻)”이라는 공부이다. 아는 사람이 없을수록 더욱더 자신을 엄격하게 요구하는데 이러한 환경 하에서 자신의 수양공력이 착실한가 착실하지 않은가를 더욱더 체현해낼 수 있다. 사실 하늘은 모든 것을 통찰하고 있으니 사람들이 일컫는 “암실”이란 신불의 “법안”을 속이지 못한다. 단지 자기스스로 덕을 깎아내리고 업을 빚으며 복을 상실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문장완성 : 2007년 8월31일
문장발표 : 2007년 9월03일
문장갱신 : 2007년 9월03일 10:50:21
원문출처 : http://www.minghui.ca/mh/articles/2007/9/3/16193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