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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쓰기를 다시 논함

글/선하(善荷)

【명혜망 2006년 8월 16일】
한편의 문장은 주로 문채(文彩), 내포[內涵], 氣魄이라는 이런 3대요소로 체현된다. 문장은 그 글을 쓰는 사람과도 같은데, 그 문채는 마치 사람의 겉모습과 같고 내포는 지혜와 같으며 기백은 그 사람의 심경(心境)이나 품격과도 같다. 이 때문에 한 문장에 대해 말하자면 기백(氣魄)이 가장 존귀하고, 내포는 그 다음이며, 문채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것이다.

고대의 문언문(文言文)은 글이 간단하면서도 명확하고 내포가 아주 깊었으며 문장에는 향기가 넘쳐흘렀다. 그러나 인류도덕이 아래로 미끄러지면서 사람들의 심경은 갈수록 고문(古文)의 아름다움을 이해할 수 없게 되었으며 더욱이 이런 아름다움을 창조하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이로부터 문언문을 부정하고 겉으로 보기에 이해하기는 싶지만 내포가 아주 천박한 현대문이 나타났다.

다시 말하자면 현대문은 인류 도덕이 아래로 미끄러진 상태 하에서 출현한 것이다. 이런 상태 하에서 사람의 심경 역시 평정을 이루기가 어려워, 기백이 격앙되고 물결치듯 출렁거리는 문장들이 많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런 글 역시 인류도덕이 아래로 미끄러진 상태의 심경과 영합하는 것이다. 이렇게 오랫동안 지속된 후에, 사람들은 이런 종류의 문장을 좋은 문장으로 여기게 되었다. 특히 공산사령(共産邪靈)의 침입, 소위 ‘투쟁철학’은 중국에 해악을 끼쳤고 그 당문화의 독소는 매 중국인들의 사상 속으로 흘러들어갔다. 이리하여 중국인들은 말과 문장을 함부로 하게 되었고 모두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당문화의 요소들을 발산하고 있다. 말투와 문투도 보다 격앙되었고 사용하는 단어는 더욱 부패하여 인성(人性)이 매우 부족하거나 심지어 악의(惡意)와 마성(魔性)으로 충만 되었다.

사실 문장은 마땅히 온화[平和]하게 표현해야 하는 것으로 이렇게 해야만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을 잘 전달할 수 있다. 사람은 온화한 글을 읽을 때 자연스럽게 마음이 평정해지며, 온화한 글은 바로 온화한 음악선율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격정하게 하는 요소가 없다. 심경이 평정해지면 사람은 곧 보다 이성적이 되며 아름다움을 더 잘 인식할 수 있고, 시비와 선악을 가리는 것도 보다 분명해질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흔히 한 가지 잘못된 견해가 있는데, 사람들은 종종 온화한 글이 무미건조한 느낌을 준다고 여긴다. 이는 사람들이 이런 격정으로 가득한 상태 하에서 성장해온 까닭에 자연히 온화한 글의 아름다움을 느끼기가 아주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마치 현대인들이 고대음악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이다. 사실 온화한 글은 무미건조한 것이 아니며 온화한 음악선율처럼 온화한 가운데에도 고조가 있고 기복이 있는 것이다. 단지 평온한 심경이 있어야만 그 속의 아름다운 운취를 더 잘 느낄 수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늘 이전 사람들의 작품에서 경험을 얻지만 현대문은 도덕이 아래로 미끄러진 상태 하에서 나타난 것으로 중국에서는 이전 사람들의 문장 속에 온화한 글로 표현된 것이 매우 적다. 이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온화한 글이 마땅히 가져야할 상태에 대해 보다 잘 인식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럼 어떤 글이 온화한 것인지 잘 분별하자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마땅히 선념(善念)이 충만한 문장을 많이 보아야 하는데 왜냐하면 선의(善意)적인 글은 자연스레 온화한 숨결을 드러내기 때문이며 선의와 이지(理智)가 주도하는 상태 하에서는 글이 격정으로 흐르게 만드는 요소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사실 사람이 문장을 쓰는 것 역시 씬씽(心性)이 승화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마음을 써서 당신의 글이 온화한지 느껴보고, 당신의 문장표현이 그리 온화하지 못할 때는 마땅히 안을 향해 찾아보아야 한다. 이는 당신의 마음이 아직 편안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또는 선념을 구비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이렇게 당신이 끊임없이 글의 온화함을 바로잡는 과정 속에서 당신의 마음 역시 끊임없이 편안해지고 선념을 보다 많이 갖게 될 것이다.

사실 사람이 선념의 작용 하에 쓴 문장은 자신마저도 감동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선(善)은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는 것으로 그것은 외부에서 내원하는 동시에 또 자신에게서도 내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문장을 쓸 때 눈물을 흘리면서 완성하는 것은 문장을 쓰는 과정이 바로 그의 선념을 강화했기 때문이며, 그는 바로 자신이 승화된 후의 선념에 감동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문장을 쓸 때, 어떤 때는 쓰면 쓸수록 영감이 없고 쓰면 쓸수록 더 이상 써내려가기가 어려운 것을 발견하게 된다. 사실 그때는 바로 마땅히 그의 심령(心靈)이 제고되어야 하는 것이다. 느끼고 느끼다가, 느끼는 것이 있어야만 비로소 깨달음이 있는 것이다. 당신의 마음이 마비된 경우에 당신이 마음속에 담는 것은 오로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뿐인데 그렇다면 어떻게 다른 것을 느낄 수 있겠는가. 단지 당신의 마음이 보다 많은 영성(靈性)을 가질 때라야만, 만물(萬物)에 대해 비로소 보다 많은 감수가 있을 것이며 보다 많은 인식이 있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의 지혜는 천부적으로 부여받은 것으로 이는 신이 그에게 준 것이지만, 오직 사람이 선념을 내보낼 때에만 신(神)은 비로소 사람을 보다 지혜롭게 만들고 만물에 대해서도 보다 깊은 인식이 있을 수 있게 하는데, 사람은 이렇게 해야만 비로소 보다 많고 보다 좋은 문장을 써낼 수 있다!

문장을 온화하게 만들고 글에서 선의(善意)의 숨결을 내보내게 하여 새로운 인류문화를 함께 창조하자!

문장완성 : 2006년 8월 15일
문장발표 : 2006년 8월 16일
문장갱신 : 2006년 8월 15일
문장분류 : 【천인사이】
원문위치 :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06/8/16/135667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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