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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픽션:<질풍경초(疾風勁草) >(4)

글 / 중팡츙(钟芳琼)

【명혜망 2004년 7월19일】(앞 문장에 이어)

제3장다시 청원하러 가다

겹겹의 가로막음을 피해가다

이튿날 아침(3월3일) 7시경, 나는 친구 집에 가서 돈을 찾아가지고 베이징(北京)에 가서 청원하려고 준비하였다.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가 말했다. “9시가 넘어 파출소와 사무소 사람들이 너를 찾아 왔었단다. 벨을 누르면서 이름을 불렀지만 내가 문을 열어주지 않았어.”점심을 먹고 나는 다급히 길을 떠났다.

겹겹의 경찰 제지를 피하여 둘러가기 위해 나는 길을 우회하여 버스를 타고 중칭(重慶)에 이르고 우한(武漢)을 지나 다시 차를 바꿔 타고 베이징에 갔다. 길에서 놀란 일은 있었지만 위험은 없었다. 버스가 중칭에 갓 도착하자 나는 라디오에서 인대(人大, 주: 인민대표대회), 정협회의(政協會議)가 오늘 오후 3시 30분경 베이징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의 가슴은 빠르게 뛰었는데 가장 빠른 속도로 베이징 민원실에 가야 했다. 누가 알았으랴, 내가 탑승한 것은 유람선이라 장장 4일 밤낮을 지나 7일 오전에도 우한에 도착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기차역에 도착해보니 오후 1시가 넘어 베이징에 가는 특급 에어컨침대열차가 있었다.

검표구는 두 줄로 나뉘었고 나는 오른 쪽 첫 번째 줄 중간에 앉아 차를 기다렸다. 갑자기 나의 왼쪽 첫줄에 앉은 앞의 두 명 사복경찰이 한사람씩 묻기 시작했다. “파룬궁을 연마하는가?” 나는 보고서 조급했다. 절대로 이 곳에서 잡히면 안 된다. 사부님께서 도와주세요, 저는 반드시 민원실(信访局)에 가야 합니다. 사복경찰은 아주 빨리 검사하였고 나는 매 사람마다 모두 고개를 흔드는 것을 보았다. 아니오, 아니오, 아니오. 아주 빨리 나의 이 한 줄을 검사하기 시작하였고 내 마음은 조급해지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 위기의 순간에 마침 검표가 시작되었다. 나는 일체를 마다하고 필사적으로 앞을 향해 밀고나가 표를 검표원에게 주었다…

하나하나의 방어선을 돌파하다

2000년 3월8일 아침 5시가 넘어 나는 베이징 서부역(西客站)에 도착하였다. 인대, 정협, 양회(兩會) 기간은 국민들이 말할 수 있는 시기이다. 법률은 공민(公民)에게 신앙의 자유권과 청원의 자유권이 있다고 규정하였다. 그러나 장씨 집단 한 무리들은 오히려 법을 알면서 법을 위배하고 일체 방법을 다하여 파룬궁수련생의 입을 막으려 하였으며 파룬궁수련생들이 청원하지 못하게 하였다. 날씨가 하도 추워 원래 대기실에서 몸을 좀 녹이고 7시가 되어서 다시 역전을 나서려고 하였다. 그러나 또 안에는 사복경찰이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하니 안전하지 못하였다. 만일에 청원하는 대사를 그르치면 평생에 아쉬움이 남을 것이다. 해서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큰 거리에서 왔다 갔다 하였다.

아침밥을 먹은 후 나는 화장을 하고 액세서리를 달았으며 손가방을 챙긴 후 차를 타고서 탠안먼(天安門)에 갔다. 길가는 사람들에게 탠안먼이 어디에 있는지를 물었더니 모두들 양회기간에는 탠안먼 경비가 삼엄하여 들어갈 수 없다고 하였다. 나는 인력삼륜차 한대를 불렀고 민원실에 가자고 하였다. 인력거를 끄는 할아버지가 길에서 관심을 보이며 말했다. “아가씨, 당신은 민원실에 가서 소송하려는 거요? 이 양회기간은 민원실에 들어가기 힘든데 만약 들어갈 수 있다면 소송은 모조건 이길 수 있네.”

할아버지는 느릿느릿 차도를 따라 걸어갔는데 마침 민원실 문 앞이었다. 사복경찰의 시선을 피하기 위하여 그는 아주 노련하게 길 맞은편으로 가서 거슬러 올라가 민원실에서 200미터 떨어진 곳에 인력거를 멈추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가씨, 고발장은 잘 적었소? 당신이 볼 때 맞은편 옆에 많은 사람들이 에워싼 곳이 있는데 이 곳에서 골목으로 들어가면 민원실일세. 조심하게.” 나는 길 양옆에 전국 각지의 경찰차가 가득 주차해 있는 것을 보았으나 당당하게 걸어갔다. 골목 안은 전부 사복경찰과 붙잡힌 대법제자들이었는데 이미 골목길을 물샐 틈 없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나는 바로 앞으로 걸어갔고 백여 명의 사복경찰들이 눈으로 골목길을 주시하면서 대법제자들을 찾고 있었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었으며 약간의 실수라도 해서는 안 되었다. 어렵사리 사람무리에서 벗어나 길고 긴 골목길에 들어섰는데 골목길에도 삼삼오오 떼를 지어 사복경찰들이 순찰하고 있었다. 나는 두 눈으로 앞을 주시하였고 이때 내심으로 조금 긴장하였다. 마음속으로 사부님, 저를 도와 반드시 민원실에 들어가게 해주세요. 라고 생각했다.

민원접수처가 공안국으로 변하다

어렵게 길목마다 가로 놓인 방어선을 돌파하고 민원실에 들어갔다. 그러나 문에는 신분증을 맞기고 표를 받는다는 팻말이 적혀있었다. 어이구! 나는 전번에 베이징주재사무소(駐京辦)에서 신분증을 몰수당하였는데 지금 무슨 증거물로 표를 얻는단 말인가? 나는 묘한 수가 생각나서 두 중년남자의 옆에 앉아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오라버니, 나를 도와 표 한 장을 얻어주세요.” 그는 “우리가 천리 밖에서 청원하러 온지 이미 5번째인데 당신에게 표를 얻어줄 마음이 어디 있겠소?” 라고 하였다. 내가 “돈을 드릴게요.”라고 하니 다른 한 사람은 돈을 준다는 소리에 마음이 움직여 말했다. “내가 가서 한번 해보지요.” 그가 돌아온 후 나는 호주머니의 돈 전부를 가만히 그의 손에 밀어 넣었다.(대략 80위안 정도) 그리고 한 장의 표에 진상을 침착하게 적어 넣었다. 파룬따파의 억울함과 내가 수련한 후 몸과 마음에 이익을 얻은 것, 진실한 말을 함으로써 현지에서 불법으로 수감된 진실한 정황들이었다. 대법의 결백을 돌려주고 사부님 결백을 돌려주며 대법서적을 공개적으로 출판하도록 허락하고, 우리에게 합법적인 수련환경을 주는 동시에 불법으로 수감된 모든 대법제자들을 석방하라고 요구하였다.

민원실 안에는 여전히 수많은 사복경찰들이 왔다 갔다 하였기 때문에 나는 단지 적어놓은 부분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절반가량 적었을 때 사복경찰은 젊은이 한명이 대법제자임을 발견하고 그를 붙잡았다. 잇달아 또 젊은 여사도 대법제자임이 발견되어 그녀도 붙잡혔다. 주위의 분위기는 아주 긴장되었다. 나는 일체를 불구하고 시간을 다그쳐 적었고 그들이 다가와서 나에게 “어디 사람이요?”라고 물었을 때 나는 “어차피 당신 그 쪽이 아니요.”라고 어물쩍하고는 계속 적었다.

이때 기색이 흉악한 경찰이 다가왔는데 아마 민원실 안의 사람이었다. 한 손으로 나의 목덜미를 잡고 나를 걸상에서 끌어내더니 앞으로 힘껏 밀었다. 나는 하마터면 바닥에 쓰러질 뻔 하였다. 내가 겨우 일어서자 그는 또 힘껏 밀었으며 나를 밖으로 밀어 내었다. 이때 나는 중칭(重慶), 베이징의 십여 명 대법제자들이 두 다리를 벌린 채 아주 납작하게 바닥에 앉아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한 경찰이 다가오더니 조금 전에 붙잡힌 여사에게 어디에서 왔는지를 물었다. 그녀가 “베이징 모모 파출소이다.”라고 말하자 경찰은 “당신들 그 구역은 나의 동창생 구역인데 당신은 왜 일찍 말하지 않았는가? 방법이 없군, 당신이 방금 전에 적은 표는 이미 사이트에 올려졌다. 어이구! 나의 동창생도 당신과 함께 재수 없게 되었네… …”라고 하였다. (양회기간에 만약 관할구역의 대법제자 한명이 베이징에 가서 청원하면 장(江)씨 집단은 그 구역의 경찰들을 연좌시켰다). 나중에 우리는 채 적지 못한 표를 우리에게 돌려주어 마저 적을 수 있게 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한 경찰이 이에 동의하였고 우리는 비로소 표를 마저 적어서 올려 보냈다. 후에 그들은 각 자의 베이징 주재사무소에 통지하였다.

장(江)씨 집단이 봉건왕조의 연좌제(連坐制)를 이용하여 지역경찰을 연루시키다

내가 베이징에 가서 민원실에 청원할 때 공안은 민원실을 불법으로 봉쇄하고 기타 파룬궁 수련생들을 함께 각 지역 베이징 주재사무소에 보냈다.

베이징 주재 스촨 청두 사무소(四川成都驻京办)에 도착하자 처장 스(石)xx는 여직원더러 또 전처럼 옷을 발가벗기고 몸을 수색하게 하였다. 그리고 완녠창(万年场) 파출소의 경찰 웨이다핑(魏大平)과 사무소 주임 황(黄)××, 사무원 황(黄)××에 알렸고 그들은 전화를 받은 후 아주 빨리 달려왔다. 이 세 사람은 나의 청원 때문에 그들이 관직을 잃을까봐 두려워하였는데 일찌감치 베이징 기차역과 탠안먼광장, 민원실 문 앞에서 일주일간 나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나를 보자마자 사무원 황xx은 기세등등하여 말했다. “나는 너를 때려서 고기 소 (肉漿)로 만들고 싶다.” 그들은 나의 청원할 권리를 침해하였음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사무원 황xx가 말했다. “너는 정말로 사람을 화나게 한다! 네 남동생이 3천위안을 써서 더 이상 베이징에 가지 않는다고 보증하여 집에 되돌려 보낸 이튿날 우리는 네가 집에 없는 것을 발견하고 곧바로 비행기표 3장을 사서 베이징에 날아왔다. 서부역에서 너를 잡으려고 청두에서 베이징으로 가는 열차마다 우리는 모두 놓치지 않았다. 깊은 밤일지라도 우리는 모두 출구(站口)에 서서 한사람 한사람씩 사람을 가려내느라고 눈마저 부었지만 여전히 너를 찾지 못하였다. 삼일이 지난 후 우리는 또 할 수없이 역전에서 잡으려는 생각을 포기하고 북경주재 사무소의 펑소장에게 전화하여 너의 소식이 있으면 곧바로 알려달라고 하였다. 매일 나와 황주임이 아침부터 밤까지 탠안먼에서 찾았다. 날씨는 춥고 바람은 또 크게 불어 닥쳤고 발마저 물집이 생겼다. 네가 한번 보라! 웨이다핑은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민원실 문 앞에서 기다리며 눈길 한번 돌리지 않고 네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하루 또 하루 찾아 헤매면서 우리는 모두 실망하였다. 마침내 처벌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웨이다핑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찾아댔고 우리는 당신을 놓칠까봐 식사조차 못하였다. 며칠동안 모두 지쳐서 말할 나위 없이 피곤하였다. 황주임의 병은 재발하였고 나도 감기에 걸려 온 몸이 영 말이 아니다. 젊은 웨이다핑마저 한바탕 야위었는데 집에 돌아가면 아내가 당신을 찾아서 난리치지 않으면 이상한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청원은 공민의 합법적인 권리이다. 그런데도 당신들이 나를 제지하니 고생이 아닌가?”

웨이다핑은 또 나에게 물었다. “중팡츙, 당신은 어떻게 민원실에 들어갔는가?” 내가 “골목길을 따라 들어갔다.”고 대답하자 그는 “믿어지지 않는다. 나는 계속 민원실 골목길을 지키면서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단단히 주시하고 있었다. 한 사람도 나의 눈앞에서 도망갈 수 없었다. 아마 차가 당신을 실어서 들어갔거나 당신은 바로 뒷문으로 들어간 것이다.”고 하였다. 나는 “민원실도 뒷문을 여는가? 어디가 뒷문인지 모르고 또 차를 타지도 않았다.”고 대답하였다.

제4장, 새빨간 거짓말로 세상 사람을 속이다

시비가 전도된 쓰촨(四川)텔레비전 방송국 소식

나는 또 북경주재 스촨 청두 사무소 작은 방안에 일주일간 갇힌 후 방폭대대(防暴大隊)의 경찰에 의해 청두청양구(成都青羊區) 마약퇴치센터로 압송되었다. 강제로 이틀 동안 세뇌당한 후(청원한 매 한명 대법제자들은 청두에 보내진 후 모두 먼저 마약퇴치소에서 이틀간 “세뇌”당했다.) 다시 보름동안 불법으로 수감되었다. 나는 기타 수감인원과 같이 문에 들어서자마자 옷을 벗기고 몸수색을 당하였다. 그들은 대법제자로부터 주로 경문과 돈을 수색해냈다. 우리는 반드시 하루당 생활비 15위안을 낸 후 물을 가득 담은 큰 그릇 속에서 썩고 더러우며 이가 나간 밥그릇과 간단한 젓가락, 그리고 이른바 소독 종이 두장을 들고 감방으로 들어가는데 한번 들어가면 보름이었다.

점심식사 후 연공을 하는데 1장 공법을 끝내기도 전에 실내의 한 구류된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 다리에 혈관종양이 있네요.”

“당신이 어떻게 알지요?”나는 매우 이상하였다.

그녀가 말했다. “당신이 들어올 때 얼굴이 아주 익었고 말하는 목소리도 매우 익숙하게 느껴졌지만 어디서 당신을 보았는지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이렇게 파룬궁을 연마하니까 생각났는데 나는 텔레비전에서 당신을 보았어요. 작년 겨울 내가 고향집에 가서 저녁밥을 먹은 후 온 가족이 함께 텔레비전을 보았습니다. 텔레비전에서 당신이 나오는 장면이 나타났는데 몇 사람이 방 안에 있었고 당신은 당신이 파룬궁을 연마하고 이름이 무엇이며 어디 사람이라고 말했지요. 당신이 말하면서 바지를 걷어 올려 우리에게 보여주었지만 곧 당신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화면만 나오는데 내레이터(播音員)가 말하기를 당신이 파룬궁을 연마했기 때문에 혈관종양이 생겼다고 했어요. 파룬궁이 당신에게 침을 맞지 못하게 하고 약을 먹지 못하게 하여 당신은 지금 이미 불구가 되어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곳에 왔지요? 원래 불구가 되지 않았습니까? ”

“나는 전혀 불구가 된 적이 없습니다. 작년 겨울 경찰에게 잡힌 나는 구치소에 계속 갇혀 있었는데 이번에 방법을 생각하여 베이징에 가서 청원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갇힌 것이지요. 당신이 본 텔레비전은 우리가 1999년 10월1일 [상무조보(商務早報)>신문사에 갔을 때입니다. 그날[상무조보(商務早報)>신문은 파룬궁이 “x교”라는 글을 실었으므로 우리는 신문사에 가서 그들에게 우리가 파룬궁을 연마한 후 심신(心身)이 이익을 얻은 진실한 정황을 말하였고 기자가 기록을 했습니다. 촬영기로 촬영도 했지요. 나는 당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오른쪽 다리에 선천성 광범위해면상부종형 혈관종양(先天性大面積海綿狀腫脹型血管瘤)이 있어 오랫동안 치료했지만 효과가 없었습니다. 수술할 때 혈관 한 가닥을 잘라내기까지 했지만 완쾌되지 않았고 오히려 또 소뇌신경을 다쳐 뇌빈혈(腦缺血) 후유증을 얻었습니다. 심할 때는 길을 걸으면 모든 것이 날아가는 듯 하였고 일시적인 실명까지 생겼습니다. 또한 여러 해 동안 광범위하게 심한 황갈색 반점이 나타나 6년 동안 수 만 위안을 들여 미용을 하였지만 치유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파룬궁을 일주일간 연마한 후 얼굴의 점들이 전부 없어졌고 2달 후에는 왼쪽 다리의 혈관종양과 뇌빈혈이 저절로 나았습니다.‘ ”

그녀는 놀라서 다시 물었다. “정말입니까. 당신은 원래 파룬궁이 좋다고 말했습니까? 어째서 당신이 텔레비전에 화면이 나올 때 내레이터가 오히려 파룬궁이 나쁘다고 했지요? 이것은 정말 두려운 일입니다. 매스컴이 뉴스에서 새빨간 거짓말을 하다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기만하였는지 모르겠군요. 직접 눈으로 당신을 보지 않았다면 나는 텔레비전에서 말한 것이 진짜인 줄로 알았을 것입니다. 또한 이 텔레비전에서는 그것을 한번만 방송한 것이 아니에요. 그날 밤 우리가 본 다음, 이튿날 내가 샤워할 때 아들이 나를 부르면서 엄마, 빨리 와서 보세요. 어젯밤에 파룬궁을 연마한다는 그 여자가 또 나왔어요. 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물었다. “당신이 본 것은 어느 텔레비전방송이지요?” 그녀가 대답하였다. “우리 마을은 스촨 텔레비전방송국 한개 채널만 나옵니다.” 내가 또 물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와서 이 일을 조사한다면 당신은 의연히 실증할 수 있겠습니까?” 그녀가 말했다. “나는 틀림없이 실증할 수 있습니다. 나는 장샌비(蒋先碧)라고 해요. 집이 스촨 러즈현 팡성향(四川乐至县放生乡)에 있지요. 나는 도시에서 자전거가게를 하고 있는데 이번에 장물 자전거 한대를 사는 바람에 구류되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20여명은 듣고서 모두 놀라워하였다. 모두들 언론매체가 이다지도 흑백을 뒤집어놓고 고의적으로 거짓말을 하여 은밀하게 시청자를 기만하는 것은 파룬궁을 먹칠할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서인 것을 깨달았는데 무슨 수단인들 해내지 못하랴… … 그녀들은 파룬궁의 진상을 들은 후 그 당시 절반 이상이 나에게서 파룬궁을 배웠고 또 어떤 이는 돌아간 후에도 연마하겠다고 표명하였다. 또한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텔레비전에서 연출한 파룬궁은 가짜임을 반드시 알릴 것이라고 하였다. 감방 안에서 매우 많은 사람들이 파룬궁을 배움에 따라 경찰이 알게 되었고 곧바로 그녀들을 불러내어 만약 그들이 따라서 공법을 연마하면 석방 날짜를 연기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그러나 그중에서 단호하게 파룬궁을 배우려는 사람이 있었고 그녀들은 모두 강제로 서있는 벌을 받았다.

구류소에 노(老) 홍군(红军)을 가두다

며칠이 지난 후 경찰은 또 연속적으로 끊임없이 몇 차례나 수감된 적이 있는 70여세 나는 할머니 류찬(劉燦)을 보내왔다.

류찬 할머니는 원래 류쥬자제학교(六九子弟校)의 교장으로 부부 두 사람이 모두 압록강 노 지원군(志願軍)이며 자녀 두 명은 모두 해외에 있었다. 류찬은 파룬궁을 연마하기 때문에 베이징에 가서 청원하였고 돌아온 후 나와 똑같이 구류소와 파출소로 왔다 갔다 하면서 갇혀 있었다.

이번에 그녀가 파출소에 돌아오기 전 남편이 거리에서 찐빵을 사다가 인도의 넘어진 난간에 다리가 부딪쳐 엄중하게 상하여 자립할 수 없어서 매일 차가운 찐빵으로 연명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녀는 집에 돌아가 남편을 돌보기 위하여 죽자 살자 구치소에 있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 결과 잰서루(建設路)파출소의 경찰 세 명이 한 발로 노인의 등을 밟고서 손을 뒤로 묶은 후 경찰차 뒤 칸에 던져 넣어, 쭈그린 채 강제로 싣고 온 것이었다.

점심 때 우리는 구류소 내의 슈퍼에 가서 물건을 샀는데 경찰은 우리 몇몇 대법제자들이 류찬과 말을 했다고 강제로 우리를 뜨거운 햇볕에 내리 쬐게 하였다. 내가 산 비누마저 바닥에서 햇볕에 녹았지만 경찰은 70세의 류찬 할머니로 하여금 그늘에 가지 못하게 하여 그녀는 계속 우리와 함께 뜨거운 햇볕 아래 서 있었다. 발은 뜨거운 시멘트 바닥을 밟고 있었다… …

장기간 반복적으로 감금되었던 나날들

구류소에는 나처럼 반복적으로 오랫동안 불법 수감된 파룬궁수련생들이 아주 많았고 연세가 높은 이들도 많았다.

어느 날 저녁식사 후, 소장은 대법제자들을 전부 불러 제방 둑(坝子)에 세운 뒤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들이 더 이상 이 곳에 오지 말 것을 권고합니다. 이 곳은 아예 당신들이 머물 곳이 아닙니다. 여름에는 실내 온도가 50도에 못지않고 통풍설비 또한 좋지 못합니다. 환풍기도 큰 작용을 일으키지 못하는데 당신들 이렇게 많은 노인들이 이 속에 있으면 신체가 어떻게 지탱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대답하였다. “소장님, 우리도 오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이 보세요, 우리는 도무지 돌아갈 수 없습니다. 집에 돌아가기도 전에 또 잡혀오게 되니까요… …”

나중에 구치소에서 당일 반복적으로 불법 수감되는 수련생들을 접수하지 않자 파출소는 방식을 바꾸어 파출소로 보내진 파룬궁수련생들을 일단 파출소 유치장에 하룻밤 가둔 후 이튿날 다시 불법으로 구치소에 보냈다. 파출소의 유치장은 몹시 비좁아 오로지 몇 평방 미터에 창문 하나 없는 검은 방이며 안에는 또 대소변이 들어 있는 변기통이 하나 있는데 얼마나 오랜 시일에 한번씩 쏟아버리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4, 5월에 어두운 방은 악취가 하늘을 찔렀고 구더기와 모기가 무리를 지어 나를 습격하고 온 몸에 달라붙어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어느 날 저녁 나는 너무나 피곤하여 잠깐 졸았다. 내가 눈을 한번 떠보니 옆에 두꺼비 한마리가 앉아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쫓아내었지만 도망가지도 않았다.

경찰은 보름에 한번씩 나를 파출소에 보냈는데 모두 일요일이었다. 아들은 모두 한번씩 와서 나를 만났다. 후에 경찰 웨이다핑은 모질게도 매번 15일간 구류하는 것을 고의적으로 10일 구류로 고쳐, 내가 보름마다 아들 얼굴 한번 볼 수 있는 권리마저 박탈하였다. 바로 이렇게 나는 반복적으로 끊임없이 5차례나 구류되었다.

오랫동안 불법 수감되어 작은 차는 운전할 사람이 없었다. 나는 할 수없이 남동생에게 아주 저렴한 가격으로 그것을 팔아버리게 하였다.

대법제자들은 바로 이렇게 장기간 반복적으로 불법 수감되었다. 경찰들은 파룬궁수련생으로 하여금 신앙을 포기하게 하기 위하여 여름에는 고의적으로 물을 끊었고 십여 평방미터의 방안에 20여명이나 있게 하였다. 대, 소변을 항상 물로 씻어 내리지 못하게 하여 우리는 할 수 없이 종이로 덮었다. 실내는 악취가 하늘을 찔렀지만 대, 소변을 곁에 두고 밥을 먹는 일이 다반사였다. 우리가 보고(報告)를 제출하여 물을 받아 화장실을 청소하겠다고 하니 소장은 마구 욕을 해댔다. “편안하려고 하면 진장(錦江)호텔에 가서 살아라. 이 곳은 바로 이런 모습인데 누가 당신더러 오라고 했는가?” 위에서 검사하러 오면 경찰은 총 개폐기를 열었다.

집단단식과 야만적 음식물 투입

2000년 5월경, 지속적인 불법 수감을 제지하기 위하여 우리는 5월 하순에 단체로 단식하였다. 이때 소장은 두려워서 우리더러 단식을 포기하라고 하였다. 우리는 “못하겠소. 우리가 眞善忍(쩐싼런)을 닦고 진실한 말을 한 것은 잘못이 없습니다. 우린 집에 가겠습니다.”고 하였고 소장은 “당신들은 모두 파출소에서 보낸 사람들이고 우리는 단지 당신들을 감시할 뿐이오. 시간이 되면 그들이 와서 데려갈 것입니다. 우리는 숫자대로 그들에게 보내면 되는데 우리도 당신들을 마음대로 돌려보낼 권리가 없어요.”라고 하였다. 이에 우리들이 말했다. “그럼 우리는 생명으로 법을 실증할 수밖에 없습니다. 매 사람마다 모두 생명의 소중함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자유와 우리의 신앙을 위하여 단식 이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들은 청두시 공안국에 통지하였고 처장 펑쥬웨이와 다른 몇몇 공안국 경찰은 안캉(安康)병원의 의사와 간호사 한 무리를 데리고 와서 야만적인 음식물 주입을 시작하였다. 경찰은 몇 명의 남자들을 시켜 여자 감방에 들어가 한 사람씩 붙잡아 나오게 한 후 7,8명의 남자들이 대법수련생을 긴 널판자 2대로 이어 맞춘 “침대” 위에 눌렀다. 어떤 자는 머리를 누르고 어떤 자는 손을 누르고 어떤 자는 다리를 누르고 어떤 자는 발을 누르고 어떤 이는 코를 잡았고 어떤 자는 입을 잡고 또 어떤 자는 목을 졸랐다. 한 동안 몸부림친 후 대법수련생이 더 이상 움직일 기력이 없어질 때 간호사는 호스를 밀어 넣었다. 농혈, 거품을 한바닥 토해내고 아파서 눈물을 계속 흘렸으며 숨이 막혀 아주 괴로웠다. 나는 늘 사부님의 경문 『심자명』을 외우면서 그들의 박해를 제지하였다.

나는 스촨(四川)면방직공장의 대법제자 옌딩후이(鄢定慧,여, 50여세)가 음식물을 주입당할 때 여러 차례 농과 혈, 거품을 한바닥 토하는 것을 보았다. 아파서 눈물을 계속 흘리고 숨이 막혀 괴롭지만 여전히 주입하지는 못하였다…

우리는 단체로 단식한 후 고소장을 썼으며 5월24일 어렵게 조건 없이 석방되어 집에 돌아왔다.

집에 돌아온 후 많은 친구들이 나를 보러 왔는데 어떤 이는 텔레비전에서 나를 본 후 걱정이 되어 내가 어느 병원에 있는지 사방으로 찾아다녔다고 하였다. 지금 나를 본 후 나를 위하여기뻐하며 또한 텔레비전에서 나에 대한 왜곡된 보도를 본 것에 대해 분개하였다.

어머니의 조우 (遭遇)

손님들이 간 후 어머니는 나에게 나와 헤어진 후의 경력을 이야기해 주었다.

전에(1999년 12월3일) 너와 외조카가 함께 베이징에 청원하러 간 후 이튿날 나는 후회하였다. 무엇 때문에 너희들과 함께 가지 않았던가! 후회한 나머지 나는 12월 6일 혼자서 베이징에 가서 청원하였고 내가 파룬궁을 수련한 후의 진실한 정황을 정부에 반영하였다. 그 결과 민원실에 가지도 못하고 베이징 주재사무소에 갇혔는데 민원실은 이미 공안국으로 변하였다. 베이징 주재사무소 방에는 오직 책상 하나와 의자 몇 개만 있었고 침대가 없었다. 날씨가 너무 추워 나는 두 다리를 의자에 올려놓고 몸을 녹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왕(王)씨 성의 보안이 이를 보고 연공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강제로 나를 밖에 내보내 벌을 서게 하였다. 동수 왕수화(王素华)는 “그녀는 연세가 너무 많아 밖에 서 있으면 너무 추우니 내가 대신 서 있겠다.”고 말하였다. 한참 뒤에 그는 나를 발로 차서 방안으로 밀어 넣었다. 이틀 뒤, 경찰은 나를 강제로 마약퇴치소에 보냈는데 안에서는 귀청을 찢는 듯한 대법을 비방하는 고음 스피커가 울렸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그들은 우리를 제방 둑으로 내몰아 달리기를 시켰는데 나는 나이가 많아 달리기에 합격하지 못했다. 그래서 또 벌로 서있었고 배고파도 말하지 못한 채 다시 쥬루촌구치소(九茹村拘留所)로 보내졌다. 여전히 밥을 주지 않아 나는 춥고 배고픈 상태로 구치소에서 긴 밤을 지새웠는데 나는 그 고통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겠다. 구치소에서 늘 한밤중에 나에게 연마 하겠는가 연마하지 않겠는가를 물었고 내가 “연마 하겠다”고 말하자 경찰은 또 나를 차가운 바람이 들어오는 구간에 세워 벌을 주었다. 힘들게 보름을 보내고 나니 비로소 완녠창파출소의 경찰 웨이다핑이 파출소로 데리고 갔다. 웨이다핑은 나를 속이면서 말하기를, 당신 딸이 연공으로 노동개조 3년형을 받았으니 이제 당신은 딸을 볼 수 없게 되었고 또 딸네 집에 있을 수도 없게 되었다고 하였다. 점심식사 후에 또 강제로 나를 아들집으로 내쫓았다. 아들집에 간 후에도 조용한 날이 없었고 파출소 사람들은 나의 거처를 살피면서 계속 박해하려고 망상하였다.

2000년 구정 이후, 8살 난 어린 외손자가 학교에 가야 하므로 나는 가만히 너의 집에 왔다(집에는 이미 먼지가 가득하여 나는 3일 동안 청소하였다). 파출소에서 내가 돌아온 것을 알고 나를 쫓아낼 까봐 감히 문 밖을 나서지 못하였다. 주말에 어린 외손자가 돌아와도 돌봐줄 사람이 없었다. 반찬도 아들이 외손자를 데려가고 데려올 때 조금씩 가져오게 하였고 반찬을 다 먹으면 짠지를 먹었고 짠지를 먹고 싶지 않으면 죽에 소금을 넣어 먹었다. 이렇게 먹은 시간이 길어지자 또한 습관이 되었다. 나는 너희 장뤄(江羅) 범죄집단이 어떻게 박해하여도 나에게 숨 한 모금 남아있으면 파룬궁을 연마하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어머니의 대법에 대한 단호함에 진심으로 위안이 되었다. 또한 장(江)씨 집단이 결과를 고려하지 않고 대법과 대법제자를 박해하기 위하여 거짓말을 만들어 민중을 기만한 것에 대하여 깊은 우려를 느꼈다.

제5장, 사실의 진상을 똑똑히 밝히다

대법을 모욕하는 사진전시실 입구에서 진상을 알리다

2000년 6월8일, 정부는 스촨성의 전시관에서 대법을 모함하는 사진전시회를 열었다. 더욱 많은 세인들로 하여금 더는 기만당하지 않고 시비를 분명히 알게 하기 위하여 나는 자신의 경력을 써내었으며 복사지로 몇 부 복사해 내었다. 6월12일 아침 나는 지역경찰 웨이다핑을 찾아서 그에게 말했다. “내가 쓴 이 진상자료를 좀 보시오. 내가 직접 베이징에 가서 올릴까요. 아니면 당신이 중앙지도자에게 전해 주겠습니까?.” 웨이경찰이 “나에게 맡기면 내가 당신을 도와 전해주면 될 것이오.” 라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2부를 주었는데, 그더러 한 부는 나를 도와 위에 전해주고 한 부는 파출소와 사무소에 남겨 서로 돌려 보게 하였다. 그는 승낙하였다.

그 다음 나는 인민남로(南路)전시관에 가서 대문 앞에 서 있었다. 나는 복사해 간 진상자료를 대법비방 사진전시회를 보고 나온 사람들에게 배포하였다. 제목은 『사실의 진상을 밝히고 파룬따파의 결백을 돌려주다』이다.

강제로 집을 수색하다

2000년 6월13일 오후, 완녠창파출소의 경찰 웨이다핑이 나를 파출소로 불러서 갔다. 청두시 공안1처의 펑쥬웨이(冯久伟)는 나에게 누가 이 자료를 썼으며 얼마나 많이 배포하였는지를 물었다. 나는 나 혼자 쓴 것이라고 하였고 그는 나에게 이렇게 놓은 작문수준이 있는지 믿을 수 없다고 하였다.

저녁에 그들은 나의 집을 불법으로 수색하였고 나 개인에 속하는 사유재산을 불법으로 압수해갔다. 대법서적, 카세트테이프, 비디오테이프, 카세트, 신분증, 가부좌용 방석 등이었다. 집을 수색하는 동안 나는 필사적으로 웨이다핑이 수색한 대법책을 보호하였다. 그 결과 두 명의 경찰은 나를 침대에 넘어뜨렸다. 나의 두 다리는 바닥에 꿇어져 있었고 경찰이 나의 목을 죽으라고 졸라 나는 숨을 쉬지 못했다. 경찰은 한 쪽 무릎으로 나의 등 위를 누른 채 또 나의 두 손을 등 뒤로 한 후 힘껏 위로 잡아당기어 나의 두 팔은 끊어지듯이 아팠다. 나는 많은 경찰들 앞에서 대법책을 보호하지 못하는 무력함에 대하여 통곡하였다. 어머니는 경찰에게 감시당하여 경찰의 가택수색을 가로 막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의 질책과 울음소리를 들은 후 경찰에게서 벗어나와 나를 보러 왔다. 내가 경찰에 의해 무참히 당하는 모습을 보고 또 한 무더기 대법책이 수색된 것을 보고 70세 가까이 된 어머니는 비통하게 엉엉 울었다. 두렵고, 처참하고, 비장한 분위기가 온 방안에 가득했다. 경찰들은 아예 어머니가 나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면서 객실로 밀고 가 강제로 앉혔다. 아울러 어머니를 위협하였다. “움직이지 말라. 그녀의 일에 관여하지 말라.“ 어머니가 대답했다. ”딸의 일이 곧 내 일이다. 너희 경찰들은 참으로 무법천지로구나!” 이어 내가 신발도 신지 않은 정황 하에서 경찰은 나를 아래 3층까지 강제로 끌고 내려가 나의 발등은 층계에 부딪쳐 벗겨졌으며 양말은 마찰되어 구멍이 났다. 그들은 나를 경찰차에 던져 넣고 강제로 파출소까지 실어갔다. 파출소 사무실에서 나는 그들이 빼앗아간 대법책 때문에 상심하여 한 밤중까지 울었다…

나는 오로지 생명으로 대법을 실증할 수밖에 없어 단식으로 박해에 항의하였다. 이튿날 점심 펑쥬웨이는 또 파출소에 와서 나를 불법으로 심문하였다. 나는 구멍 난 양말을 신고 나갔다. 그는 나를 보고서 이렇게 말했다:”당신, 이 모습에 어디 사장님의 형상이 조금이라도 있는가. 남들은 머리에 혹이 생겼다고 하는데(사람이 멍청함을 말함) 내가 볼 때 당신의 머리에는 농구공이 자랐다. 남(장쩌민을 가리킴)은 파룬궁이 좋지 않다고 말하는데 당신은 좋다고 말한다. 당신이 좋은 것을 알면 마음속으로 알면 되는 것이다. 당신이 XX당과 맞서면 고생을 사서 하는 것이다.” 나는 “내가 좋은 사람이 되고 진실한 말을 견지하는 것이 어찌 XX당과 맞서는 것인가?” 라고 하였다. 오후에 어떠한 절차도 없는 정황 하에서 그들은 또 나를 강제로 연꽃촌에 위치한 청두시 제2간수소로 보냈다.

이때 나는 이미 11차례나 불법 수감되었다. 11일간 형사 구류된 후 나는 불법 노동개조 1년형을 받고 청두시 제1간수소 닝샤가 좐윈참(宁夏街转运站) 에 보내졌다. 좐윈참에 들어가자마자 감옥의 우두머리가 강제로 400위안 돈을 뜯어 가는데 돈이 있으면 돈을 내고 돈이 없으면 매 맞아야 한다고 했다. 내가 보니 돈이 없는 잡범(杂案犯)들은 감옥 우두머리에게 매를 맞아 등이 시퍼렇게 멍들고 허리를 펴지 못하였으며 몸을 뒤척이지 못하였지만 경찰은 상관도 하지 않았다. 안의 생활용품은 밖의 슈퍼에서 파는 것보다 3배나 비쌌다.

보름 후 나는 다시 불법으로 즈중난무스 여자노교소(资中楠木寺女子劳教所)에 보내졌다.

(다음에 계속 이음)

문장완성: 2004년 7월 16일
문장발표: 2004년 7월 19일
문장갱신: 2004년 8월 13일
문장분류: 인심과 인과
원문위치: http://www.minghui.ca/mh/articles/2004/7/19/79561.html
논-픽션:(4)

글 / 중팡츙(钟芳琼)

【명혜망 2004년 7월19일】(앞 문장에 이어)

제3장다시 청원하러 가다

겹겹의 가로막음을 피해가다

이튿날 아침(3월3일) 7시경, 나는 친구 집에 가서 돈을 찾아가지고 베이징(北京)에 가서 청원하려고 준비하였다.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가 말했다. “9시가 넘어 파출소와 사무소 사람들이 너를 찾아 왔었단다. 벨을 누르면서 이름을 불렀지만 내가 문을 열어주지 않았어.”점심을 먹고 나는 다급히 길을 떠났다.

겹겹의 경찰 제지를 피하여 둘러가기 위해 나는 길을 우회하여 버스를 타고 중칭(重慶)에 이르고 우한(武漢)을 지나 다시 차를 바꿔 타고 베이징에 갔다. 길에서 놀란 일은 있었지만 위험은 없었다. 버스가 중칭에 갓 도착하자 나는 라디오에서 인대(人大, 주: 인민대표대회), 정협회의(政協會議)가 오늘 오후 3시 30분경 베이징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의 가슴은 빠르게 뛰었는데 가장 빠른 속도로 베이징 민원실에 가야 했다. 누가 알았으랴, 내가 탑승한 것은 유람선이라 장장 4일 밤낮을 지나 7일 오전에도 우한에 도착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기차역에 도착해보니 오후 1시가 넘어 베이징에 가는 특급 에어컨침대열차가 있었다.

검표구는 두 줄로 나뉘었고 나는 오른 쪽 첫 번째 줄 중간에 앉아 차를 기다렸다. 갑자기 나의 왼쪽 첫줄에 앉은 앞의 두 명 사복경찰이 한사람씩 묻기 시작했다. “파룬궁을 연마하는가?” 나는 보고서 조급했다. 절대로 이 곳에서 잡히면 안 된다. 사부님께서 도와주세요, 저는 반드시 민원실(信访局)에 가야 합니다. 사복경찰은 아주 빨리 검사하였고 나는 매 사람마다 모두 고개를 흔드는 것을 보았다. 아니오, 아니오, 아니오. 아주 빨리 나의 이 한 줄을 검사하기 시작하였고 내 마음은 조급해지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 위기의 순간에 마침 검표가 시작되었다. 나는 일체를 마다하고 필사적으로 앞을 향해 밀고나가 표를 검표원에게 주었다…

하나하나의 방어선을 돌파하다

2000년 3월8일 아침 5시가 넘어 나는 베이징 서부역(西客站)에 도착하였다. 인대, 정협, 양회(兩會) 기간은 국민들이 말할 수 있는 시기이다. 법률은 공민(公民)에게 신앙의 자유권과 청원의 자유권이 있다고 규정하였다. 그러나 장씨 집단 한 무리들은 오히려 법을 알면서 법을 위배하고 일체 방법을 다하여 파룬궁수련생의 입을 막으려 하였으며 파룬궁수련생들이 청원하지 못하게 하였다. 날씨가 하도 추워 원래 대기실에서 몸을 좀 녹이고 7시가 되어서 다시 역전을 나서려고 하였다. 그러나 또 안에는 사복경찰이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하니 안전하지 못하였다. 만일에 청원하는 대사를 그르치면 평생에 아쉬움이 남을 것이다. 해서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큰 거리에서 왔다 갔다 하였다.

아침밥을 먹은 후 나는 화장을 하고 액세서리를 달았으며 손가방을 챙긴 후 차를 타고서 탠안먼(天安門)에 갔다. 길가는 사람들에게 탠안먼이 어디에 있는지를 물었더니 모두들 양회기간에는 탠안먼 경비가 삼엄하여 들어갈 수 없다고 하였다. 나는 인력삼륜차 한대를 불렀고 민원실에 가자고 하였다. 인력거를 끄는 할아버지가 길에서 관심을 보이며 말했다. “아가씨, 당신은 민원실에 가서 소송하려는 거요? 이 양회기간은 민원실에 들어가기 힘든데 만약 들어갈 수 있다면 소송은 모조건 이길 수 있네.”

할아버지는 느릿느릿 차도를 따라 걸어갔는데 마침 민원실 문 앞이었다. 사복경찰의 시선을 피하기 위하여 그는 아주 노련하게 길 맞은편으로 가서 거슬러 올라가 민원실에서 200미터 떨어진 곳에 인력거를 멈추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가씨, 고발장은 잘 적었소? 당신이 볼 때 맞은편 옆에 많은 사람들이 에워싼 곳이 있는데 이 곳에서 골목으로 들어가면 민원실일세. 조심하게.” 나는 길 양옆에 전국 각지의 경찰차가 가득 주차해 있는 것을 보았으나 당당하게 걸어갔다. 골목 안은 전부 사복경찰과 붙잡힌 대법제자들이었는데 이미 골목길을 물샐 틈 없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나는 바로 앞으로 걸어갔고 백여 명의 사복경찰들이 눈으로 골목길을 주시하면서 대법제자들을 찾고 있었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었으며 약간의 실수라도 해서는 안 되었다. 어렵사리 사람무리에서 벗어나 길고 긴 골목길에 들어섰는데 골목길에도 삼삼오오 떼를 지어 사복경찰들이 순찰하고 있었다. 나는 두 눈으로 앞을 주시하였고 이때 내심으로 조금 긴장하였다. 마음속으로 사부님, 저를 도와 반드시 민원실에 들어가게 해주세요. 라고 생각했다.

민원접수처가 공안국으로 변하다

어렵게 길목마다 가로 놓인 방어선을 돌파하고 민원실에 들어갔다. 그러나 문에는 신분증을 맞기고 표를 받는다는 팻말이 적혀있었다. 어이구! 나는 전번에 베이징주재사무소(駐京辦)에서 신분증을 몰수당하였는데 지금 무슨 증거물로 표를 얻는단 말인가? 나는 묘한 수가 생각나서 두 중년남자의 옆에 앉아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오라버니, 나를 도와 표 한 장을 얻어주세요.” 그는 “우리가 천리 밖에서 청원하러 온지 이미 5번째인데 당신에게 표를 얻어줄 마음이 어디 있겠소?” 라고 하였다. 내가 “돈을 드릴게요.”라고 하니 다른 한 사람은 돈을 준다는 소리에 마음이 움직여 말했다. “내가 가서 한번 해보지요.” 그가 돌아온 후 나는 호주머니의 돈 전부를 가만히 그의 손에 밀어 넣었다.(대략 80위안 정도) 그리고 한 장의 표에 진상을 침착하게 적어 넣었다. 파룬따파의 억울함과 내가 수련한 후 몸과 마음에 이익을 얻은 것, 진실한 말을 함으로써 현지에서 불법으로 수감된 진실한 정황들이었다. 대법의 결백을 돌려주고 사부님 결백을 돌려주며 대법서적을 공개적으로 출판하도록 허락하고, 우리에게 합법적인 수련환경을 주는 동시에 불법으로 수감된 모든 대법제자들을 석방하라고 요구하였다.

민원실 안에는 여전히 수많은 사복경찰들이 왔다 갔다 하였기 때문에 나는 단지 적어놓은 부분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절반가량 적었을 때 사복경찰은 젊은이 한명이 대법제자임을 발견하고 그를 붙잡았다. 잇달아 또 젊은 여사도 대법제자임이 발견되어 그녀도 붙잡혔다. 주위의 분위기는 아주 긴장되었다. 나는 일체를 불구하고 시간을 다그쳐 적었고 그들이 다가와서 나에게 “어디 사람이요?”라고 물었을 때 나는 “어차피 당신 그 쪽이 아니요.”라고 어물쩍하고는 계속 적었다.

이때 기색이 흉악한 경찰이 다가왔는데 아마 민원실 안의 사람이었다. 한 손으로 나의 목덜미를 잡고 나를 걸상에서 끌어내더니 앞으로 힘껏 밀었다. 나는 하마터면 바닥에 쓰러질 뻔 하였다. 내가 겨우 일어서자 그는 또 힘껏 밀었으며 나를 밖으로 밀어 내었다. 이때 나는 중칭(重慶), 베이징의 십여 명 대법제자들이 두 다리를 벌린 채 아주 납작하게 바닥에 앉아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한 경찰이 다가오더니 조금 전에 붙잡힌 여사에게 어디에서 왔는지를 물었다. 그녀가 “베이징 모모 파출소이다.”라고 말하자 경찰은 “당신들 그 구역은 나의 동창생 구역인데 당신은 왜 일찍 말하지 않았는가? 방법이 없군, 당신이 방금 전에 적은 표는 이미 사이트에 올려졌다. 어이구! 나의 동창생도 당신과 함께 재수 없게 되었네… …”라고 하였다. (양회기간에 만약 관할구역의 대법제자 한명이 베이징에 가서 청원하면 장(江)씨 집단은 그 구역의 경찰들을 연좌시켰다). 나중에 우리는 채 적지 못한 표를 우리에게 돌려주어 마저 적을 수 있게 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한 경찰이 이에 동의하였고 우리는 비로소 표를 마저 적어서 올려 보냈다. 후에 그들은 각 자의 베이징 주재사무소에 통지하였다.

장(江)씨 집단이 봉건왕조의 연좌제(連坐制)를 이용하여 지역경찰을 연루시키다

내가 베이징에 가서 민원실에 청원할 때 공안은 민원실을 불법으로 봉쇄하고 기타 파룬궁 수련생들을 함께 각 지역 베이징 주재사무소에 보냈다.

베이징 주재 스촨 청두 사무소(四川成都驻京办)에 도착하자 처장 스(石)xx는 여직원더러 또 전처럼 옷을 발가벗기고 몸을 수색하게 하였다. 그리고 완녠창(万年场) 파출소의 경찰 웨이다핑(魏大平)과 사무소 주임 황(黄)××, 사무원 황(黄)××에 알렸고 그들은 전화를 받은 후 아주 빨리 달려왔다. 이 세 사람은 나의 청원 때문에 그들이 관직을 잃을까봐 두려워하였는데 일찌감치 베이징 기차역과 탠안먼광장, 민원실 문 앞에서 일주일간 나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나를 보자마자 사무원 황xx은 기세등등하여 말했다. “나는 너를 때려서 고기 소 (肉漿)로 만들고 싶다.” 그들은 나의 청원할 권리를 침해하였음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사무원 황xx가 말했다. “너는 정말로 사람을 화나게 한다! 네 남동생이 3천위안을 써서 더 이상 베이징에 가지 않는다고 보증하여 집에 되돌려 보낸 이튿날 우리는 네가 집에 없는 것을 발견하고 곧바로 비행기표 3장을 사서 베이징에 날아왔다. 서부역에서 너를 잡으려고 청두에서 베이징으로 가는 열차마다 우리는 모두 놓치지 않았다. 깊은 밤일지라도 우리는 모두 출구(站口)에 서서 한사람 한사람씩 사람을 가려내느라고 눈마저 부었지만 여전히 너를 찾지 못하였다. 삼일이 지난 후 우리는 또 할 수없이 역전에서 잡으려는 생각을 포기하고 북경주재 사무소의 펑소장에게 전화하여 너의 소식이 있으면 곧바로 알려달라고 하였다. 매일 나와 황주임이 아침부터 밤까지 탠안먼에서 찾았다. 날씨는 춥고 바람은 또 크게 불어 닥쳤고 발마저 물집이 생겼다. 네가 한번 보라! 웨이다핑은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민원실 문 앞에서 기다리며 눈길 한번 돌리지 않고 네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하루 또 하루 찾아 헤매면서 우리는 모두 실망하였다. 마침내 처벌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웨이다핑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찾아댔고 우리는 당신을 놓칠까봐 식사조차 못하였다. 며칠동안 모두 지쳐서 말할 나위 없이 피곤하였다. 황주임의 병은 재발하였고 나도 감기에 걸려 온 몸이 영 말이 아니다. 젊은 웨이다핑마저 한바탕 야위었는데 집에 돌아가면 아내가 당신을 찾아서 난리치지 않으면 이상한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청원은 공민의 합법적인 권리이다. 그런데도 당신들이 나를 제지하니 고생이 아닌가?”

웨이다핑은 또 나에게 물었다. “중팡츙, 당신은 어떻게 민원실에 들어갔는가?” 내가 “골목길을 따라 들어갔다.”고 대답하자 그는 “믿어지지 않는다. 나는 계속 민원실 골목길을 지키면서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단단히 주시하고 있었다. 한 사람도 나의 눈앞에서 도망갈 수 없었다. 아마 차가 당신을 실어서 들어갔거나 당신은 바로 뒷문으로 들어간 것이다.”고 하였다. 나는 “민원실도 뒷문을 여는가? 어디가 뒷문인지 모르고 또 차를 타지도 않았다.”고 대답하였다.

제4장, 새빨간 거짓말로 세상 사람을 속이다

시비가 전도된 쓰촨(四川)텔레비전 방송국 소식

나는 또 북경주재 스촨 청두 사무소 작은 방안에 일주일간 갇힌 후 방폭대대(防暴大隊)의 경찰에 의해 청두청양구(成都青羊區) 마약퇴치센터로 압송되었다. 강제로 이틀 동안 세뇌당한 후(청원한 매 한명 대법제자들은 청두에 보내진 후 모두 먼저 마약퇴치소에서 이틀간 “세뇌”당했다.) 다시 보름동안 불법으로 수감되었다. 나는 기타 수감인원과 같이 문에 들어서자마자 옷을 벗기고 몸수색을 당하였다. 그들은 대법제자로부터 주로 경문과 돈을 수색해냈다. 우리는 반드시 하루당 생활비 15위안을 낸 후 물을 가득 담은 큰 그릇 속에서 썩고 더러우며 이가 나간 밥그릇과 간단한 젓가락, 그리고 이른바 소독 종이 두장을 들고 감방으로 들어가는데 한번 들어가면 보름이었다.

점심식사 후 연공을 하는데 1장 공법을 끝내기도 전에 실내의 한 구류된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 다리에 혈관종양이 있네요.”

“당신이 어떻게 알지요?”나는 매우 이상하였다.

그녀가 말했다. “당신이 들어올 때 얼굴이 아주 익었고 말하는 목소리도 매우 익숙하게 느껴졌지만 어디서 당신을 보았는지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이렇게 파룬궁을 연마하니까 생각났는데 나는 텔레비전에서 당신을 보았어요. 작년 겨울 내가 고향집에 가서 저녁밥을 먹은 후 온 가족이 함께 텔레비전을 보았습니다. 텔레비전에서 당신이 나오는 장면이 나타났는데 몇 사람이 방 안에 있었고 당신은 당신이 파룬궁을 연마하고 이름이 무엇이며 어디 사람이라고 말했지요. 당신이 말하면서 바지를 걷어 올려 우리에게 보여주었지만 곧 당신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화면만 나오는데 내레이터(播音員)가 말하기를 당신이 파룬궁을 연마했기 때문에 혈관종양이 생겼다고 했어요. 파룬궁이 당신에게 침을 맞지 못하게 하고 약을 먹지 못하게 하여 당신은 지금 이미 불구가 되어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곳에 왔지요? 원래 불구가 되지 않았습니까? ”

“나는 전혀 불구가 된 적이 없습니다. 작년 겨울 경찰에게 잡힌 나는 구치소에 계속 갇혀 있었는데 이번에 방법을 생각하여 베이징에 가서 청원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갇힌 것이지요. 당신이 본 텔레비전은 우리가 1999년 10월1일 [상무조보(商務早報)>신문사에 갔을 때입니다. 그날[상무조보(商務早報)>신문은 파룬궁이 “x교”라는 글을 실었으므로 우리는 신문사에 가서 그들에게 우리가 파룬궁을 연마한 후 심신(心身)이 이익을 얻은 진실한 정황을 말하였고 기자가 기록을 했습니다. 촬영기로 촬영도 했지요. 나는 당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오른쪽 다리에 선천성 광범위해면상부종형 혈관종양(先天性大面積海綿狀腫脹型血管瘤)이 있어 오랫동안 치료했지만 효과가 없었습니다. 수술할 때 혈관 한 가닥을 잘라내기까지 했지만 완쾌되지 않았고 오히려 또 소뇌신경을 다쳐 뇌빈혈(腦缺血) 후유증을 얻었습니다. 심할 때는 길을 걸으면 모든 것이 날아가는 듯 하였고 일시적인 실명까지 생겼습니다. 또한 여러 해 동안 광범위하게 심한 황갈색 반점이 나타나 6년 동안 수 만 위안을 들여 미용을 하였지만 치유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파룬궁을 일주일간 연마한 후 얼굴의 점들이 전부 없어졌고 2달 후에는 왼쪽 다리의 혈관종양과 뇌빈혈이 저절로 나았습니다.‘ ”

그녀는 놀라서 다시 물었다. “정말입니까. 당신은 원래 파룬궁이 좋다고 말했습니까? 어째서 당신이 텔레비전에 화면이 나올 때 내레이터가 오히려 파룬궁이 나쁘다고 했지요? 이것은 정말 두려운 일입니다. 매스컴이 뉴스에서 새빨간 거짓말을 하다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기만하였는지 모르겠군요. 직접 눈으로 당신을 보지 않았다면 나는 텔레비전에서 말한 것이 진짜인 줄로 알았을 것입니다. 또한 이 텔레비전에서는 그것을 한번만 방송한 것이 아니에요. 그날 밤 우리가 본 다음, 이튿날 내가 샤워할 때 아들이 나를 부르면서 엄마, 빨리 와서 보세요. 어젯밤에 파룬궁을 연마한다는 그 여자가 또 나왔어요. 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물었다. “당신이 본 것은 어느 텔레비전방송이지요?” 그녀가 대답하였다. “우리 마을은 스촨 텔레비전방송국 한개 채널만 나옵니다.” 내가 또 물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와서 이 일을 조사한다면 당신은 의연히 실증할 수 있겠습니까?” 그녀가 말했다. “나는 틀림없이 실증할 수 있습니다. 나는 장샌비(蒋先碧)라고 해요. 집이 스촨 러즈현 팡성향(四川乐至县放生乡)에 있지요. 나는 도시에서 자전거가게를 하고 있는데 이번에 장물 자전거 한대를 사는 바람에 구류되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20여명은 듣고서 모두 놀라워하였다. 모두들 언론매체가 이다지도 흑백을 뒤집어놓고 고의적으로 거짓말을 하여 은밀하게 시청자를 기만하는 것은 파룬궁을 먹칠할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서인 것을 깨달았는데 무슨 수단인들 해내지 못하랴… … 그녀들은 파룬궁의 진상을 들은 후 그 당시 절반 이상이 나에게서 파룬궁을 배웠고 또 어떤 이는 돌아간 후에도 연마하겠다고 표명하였다. 또한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텔레비전에서 연출한 파룬궁은 가짜임을 반드시 알릴 것이라고 하였다. 감방 안에서 매우 많은 사람들이 파룬궁을 배움에 따라 경찰이 알게 되었고 곧바로 그녀들을 불러내어 만약 그들이 따라서 공법을 연마하면 석방 날짜를 연기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그러나 그중에서 단호하게 파룬궁을 배우려는 사람이 있었고 그녀들은 모두 강제로 서있는 벌을 받았다.

구류소에 노(老) 홍군(红军)을 가두다

며칠이 지난 후 경찰은 또 연속적으로 끊임없이 몇 차례나 수감된 적이 있는 70여세 나는 할머니 류찬(劉燦)을 보내왔다.

류찬 할머니는 원래 류쥬자제학교(六九子弟校)의 교장으로 부부 두 사람이 모두 압록강 노 지원군(志願軍)이며 자녀 두 명은 모두 해외에 있었다. 류찬은 파룬궁을 연마하기 때문에 베이징에 가서 청원하였고 돌아온 후 나와 똑같이 구류소와 파출소로 왔다 갔다 하면서 갇혀 있었다.

이번에 그녀가 파출소에 돌아오기 전 남편이 거리에서 찐빵을 사다가 인도의 넘어진 난간에 다리가 부딪쳐 엄중하게 상하여 자립할 수 없어서 매일 차가운 찐빵으로 연명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녀는 집에 돌아가 남편을 돌보기 위하여 죽자 살자 구치소에 있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 결과 잰서루(建設路)파출소의 경찰 세 명이 한 발로 노인의 등을 밟고서 손을 뒤로 묶은 후 경찰차 뒤 칸에 던져 넣어, 쭈그린 채 강제로 싣고 온 것이었다.

점심 때 우리는 구류소 내의 슈퍼에 가서 물건을 샀는데 경찰은 우리 몇몇 대법제자들이 류찬과 말을 했다고 강제로 우리를 뜨거운 햇볕에 내리 쬐게 하였다. 내가 산 비누마저 바닥에서 햇볕에 녹았지만 경찰은 70세의 류찬 할머니로 하여금 그늘에 가지 못하게 하여 그녀는 계속 우리와 함께 뜨거운 햇볕 아래 서 있었다. 발은 뜨거운 시멘트 바닥을 밟고 있었다… …

장기간 반복적으로 감금되었던 나날들

구류소에는 나처럼 반복적으로 오랫동안 불법 수감된 파룬궁수련생들이 아주 많았고 연세가 높은 이들도 많았다.

어느 날 저녁식사 후, 소장은 대법제자들을 전부 불러 제방 둑(坝子)에 세운 뒤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들이 더 이상 이 곳에 오지 말 것을 권고합니다. 이 곳은 아예 당신들이 머물 곳이 아닙니다. 여름에는 실내 온도가 50도에 못지않고 통풍설비 또한 좋지 못합니다. 환풍기도 큰 작용을 일으키지 못하는데 당신들 이렇게 많은 노인들이 이 속에 있으면 신체가 어떻게 지탱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대답하였다. “소장님, 우리도 오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이 보세요, 우리는 도무지 돌아갈 수 없습니다. 집에 돌아가기도 전에 또 잡혀오게 되니까요… …”

나중에 구치소에서 당일 반복적으로 불법 수감되는 수련생들을 접수하지 않자 파출소는 방식을 바꾸어 파출소로 보내진 파룬궁수련생들을 일단 파출소 유치장에 하룻밤 가둔 후 이튿날 다시 불법으로 구치소에 보냈다. 파출소의 유치장은 몹시 비좁아 오로지 몇 평방 미터에 창문 하나 없는 검은 방이며 안에는 또 대소변이 들어 있는 변기통이 하나 있는데 얼마나 오랜 시일에 한번씩 쏟아버리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4, 5월에 어두운 방은 악취가 하늘을 찔렀고 구더기와 모기가 무리를 지어 나를 습격하고 온 몸에 달라붙어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어느 날 저녁 나는 너무나 피곤하여 잠깐 졸았다. 내가 눈을 한번 떠보니 옆에 두꺼비 한마리가 앉아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쫓아내었지만 도망가지도 않았다.

경찰은 보름에 한번씩 나를 파출소에 보냈는데 모두 일요일이었다. 아들은 모두 한번씩 와서 나를 만났다. 후에 경찰 웨이다핑은 모질게도 매번 15일간 구류하는 것을 고의적으로 10일 구류로 고쳐, 내가 보름마다 아들 얼굴 한번 볼 수 있는 권리마저 박탈하였다. 바로 이렇게 나는 반복적으로 끊임없이 5차례나 구류되었다.

오랫동안 불법 수감되어 작은 차는 운전할 사람이 없었다. 나는 할 수없이 남동생에게 아주 저렴한 가격으로 그것을 팔아버리게 하였다.

대법제자들은 바로 이렇게 장기간 반복적으로 불법 수감되었다. 경찰들은 파룬궁수련생으로 하여금 신앙을 포기하게 하기 위하여 여름에는 고의적으로 물을 끊었고 십여 평방미터의 방안에 20여명이나 있게 하였다. 대, 소변을 항상 물로 씻어 내리지 못하게 하여 우리는 할 수 없이 종이로 덮었다. 실내는 악취가 하늘을 찔렀지만 대, 소변을 곁에 두고 밥을 먹는 일이 다반사였다. 우리가 보고(報告)를 제출하여 물을 받아 화장실을 청소하겠다고 하니 소장은 마구 욕을 해댔다. “편안하려고 하면 진장(錦江)호텔에 가서 살아라. 이 곳은 바로 이런 모습인데 누가 당신더러 오라고 했는가?” 위에서 검사하러 오면 경찰은 총 개폐기를 열었다.

집단단식과 야만적 음식물 투입

2000년 5월경, 지속적인 불법 수감을 제지하기 위하여 우리는 5월 하순에 단체로 단식하였다. 이때 소장은 두려워서 우리더러 단식을 포기하라고 하였다. 우리는 “못하겠소. 우리가 眞善忍(쩐싼런)을 닦고 진실한 말을 한 것은 잘못이 없습니다. 우린 집에 가겠습니다.”고 하였고 소장은 “당신들은 모두 파출소에서 보낸 사람들이고 우리는 단지 당신들을 감시할 뿐이오. 시간이 되면 그들이 와서 데려갈 것입니다. 우리는 숫자대로 그들에게 보내면 되는데 우리도 당신들을 마음대로 돌려보낼 권리가 없어요.”라고 하였다. 이에 우리들이 말했다. “그럼 우리는 생명으로 법을 실증할 수밖에 없습니다. 매 사람마다 모두 생명의 소중함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자유와 우리의 신앙을 위하여 단식 이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들은 청두시 공안국에 통지하였고 처장 펑쥬웨이와 다른 몇몇 공안국 경찰은 안캉(安康)병원의 의사와 간호사 한 무리를 데리고 와서 야만적인 음식물 주입을 시작하였다. 경찰은 몇 명의 남자들을 시켜 여자 감방에 들어가 한 사람씩 붙잡아 나오게 한 후 7,8명의 남자들이 대법수련생을 긴 널판자 2대로 이어 맞춘 “침대” 위에 눌렀다. 어떤 자는 머리를 누르고 어떤 자는 손을 누르고 어떤 자는 다리를 누르고 어떤 자는 발을 누르고 어떤 이는 코를 잡았고 어떤 자는 입을 잡고 또 어떤 자는 목을 졸랐다. 한 동안 몸부림친 후 대법수련생이 더 이상 움직일 기력이 없어질 때 간호사는 호스를 밀어 넣었다. 농혈, 거품을 한바닥 토해내고 아파서 눈물을 계속 흘렸으며 숨이 막혀 아주 괴로웠다. 나는 늘 사부님의 경문 『심자명』을 외우면서 그들의 박해를 제지하였다.

나는 스촨(四川)면방직공장의 대법제자 옌딩후이(鄢定慧,여, 50여세)가 음식물을 주입당할 때 여러 차례 농과 혈, 거품을 한바닥 토하는 것을 보았다. 아파서 눈물을 계속 흘리고 숨이 막혀 괴롭지만 여전히 주입하지는 못하였다…

우리는 단체로 단식한 후 고소장을 썼으며 5월24일 어렵게 조건 없이 석방되어 집에 돌아왔다.

집에 돌아온 후 많은 친구들이 나를 보러 왔는데 어떤 이는 텔레비전에서 나를 본 후 걱정이 되어 내가 어느 병원에 있는지 사방으로 찾아다녔다고 하였다. 지금 나를 본 후 나를 위하여기뻐하며 또한 텔레비전에서 나에 대한 왜곡된 보도를 본 것에 대해 분개하였다.

어머니의 조우 (遭遇)

손님들이 간 후 어머니는 나에게 나와 헤어진 후의 경력을 이야기해 주었다.

전에(1999년 12월3일) 너와 외조카가 함께 베이징에 청원하러 간 후 이튿날 나는 후회하였다. 무엇 때문에 너희들과 함께 가지 않았던가! 후회한 나머지 나는 12월 6일 혼자서 베이징에 가서 청원하였고 내가 파룬궁을 수련한 후의 진실한 정황을 정부에 반영하였다. 그 결과 민원실에 가지도 못하고 베이징 주재사무소에 갇혔는데 민원실은 이미 공안국으로 변하였다. 베이징 주재사무소 방에는 오직 책상 하나와 의자 몇 개만 있었고 침대가 없었다. 날씨가 너무 추워 나는 두 다리를 의자에 올려놓고 몸을 녹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왕(王)씨 성의 보안이 이를 보고 연공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강제로 나를 밖에 내보내 벌을 서게 하였다. 동수 왕수화(王素华)는 “그녀는 연세가 너무 많아 밖에 서 있으면 너무 추우니 내가 대신 서 있겠다.”고 말하였다. 한참 뒤에 그는 나를 발로 차서 방안으로 밀어 넣었다. 이틀 뒤, 경찰은 나를 강제로 마약퇴치소에 보냈는데 안에서는 귀청을 찢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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