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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백 강요: 빙산 아래의 사악

글/ 정옌(正言)

[밍후이왕] ‘산베이 1000억 위안 광업권 사건’ 재판관 왕린칭(王林清)이 실종된 몇 주 후 갑자기 중앙TV에 나와 자백을 해, 최고법 ‘문건분실’ 사건은 자신이 한 것이라고 밝혔다. 여론이 들끓고 이것은 사법에 대한 모욕과 풍자라며, 중공이 TV자백을 만드는 위법 행위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미국의 소리는 2월 28일 보도했다. ‘TV자백’은 중공이 선포한 ‘법치 사회’의 하나의 특색과 산물이고, 문화대혁명 시기 ‘거리를 다니며 보여주는’ 방법을 답습해, 당사자가 몸이 갇히고 고립되어 구원을 받을 데가 없으며, 거대한 육체적․정신적 고문을 받아, 당국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으면 안 되기에, 마음을 어기고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다.

아시아에 있는 인권조직 세이프가드 디펜더스(Safeguard Defenders)는 100여 페이지에 달하는 ‘극본과 기획: 중국 TV자백의 배후’라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는 지난 5년간 중국 매체에서 보도한 45건의 TV자백이, 자백할 때 그들은 아직 심판도 받지 않았거나, 대다수는 아직 정식으로 체포되지도 않은 상태였다고 한다.

당사자들은 자백영상이 극본을 연출하는 것처럼 자세하게 짜여있었다고 폭로했다. 촬영하기 전에 그들은 허락을 받고 목욕을 하고, 지정된 복장을 갈아입는다. 죄수복일 수도 있고 평상복일 수도 있다. 그리고 눈에 검은 천을 가리고 촬영현장으로 보내진다. 그들이 하는 매 한마디는 다른 사람이 먼저 적어 놓은 것이고, 반드시 익숙하게 기억해서 한 글자도 틀리지 않게 외워야 한다. 또 ‘감독’ 즉 공안의 지시대로 말하는 속도, 표정, 심지어 ‘대사’까지 시기적절하게 목이 메고 흐느끼며 해야 한다.

만약 ‘감독’의 요구에 도달하지 못하면 다시 반복하여 촬영한다. 보고서는 강요에 의해 이런 영상을 촬영하는 인권수호자의 말을 인용했다. 낮부터 밤까지 7시간을 촬영하며 그 후 다시 검은 천에 씌워져 감옥으로 돌아갔다. 당사자 여러 명이 밝힌 바에 따르면 그들은 고문을 받지 않고 관대하게 처리한다는 약속 하에 영상 촬영을 허락했다고 한다. 다른 일부는 가족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마지못해 했다고 한다.

갑자기 실종되었던 홍콩 통로완(銅鑼灣)서점의 점장 람윙케이(林榮基)가 언급했다. 그는 2015년 10월 24일 뤄후(羅湖)세관에서 선전(深圳) 세관원에게 끌려가 나중에 공안에 의해 닝보(寧波)로 압송되었다. 그 후 5개월 동안 람윙케이는 중앙전담반이라는 사람들에게 여러 번 신문을 받고, 나중에 ‘감독’의 준비 하에 카메라 앞에서 ‘자백’을 강요받아, 불법적으로 ‘금서(禁書)’를 경영하고 판매했다고 승인했는데, 그 장면이 2016년 2월 펑황위성TV에서 방송됐다. “그들은 하려는 말을 쓰게 했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고쳐주었습니다. 고치고 난 후 다시 읽게 하고 ‘시말서’도 적어 내어 그들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고치고 난 후에 사인하라고 했습니다.”

영국 사립탐정 피터 험프리와 아내 위잉(虞英)은 중국에서 소형 리스크 컨설팅 회사를 경영했다. 2013년 영국 제약 거대기업 글락소 스미스클라인이 부패로 고발당해, 피터 험프리는 고용되어 한 해고된 직원이 고발인이 아닌지 조사했다. 2014년 8월 그는 아내와 함께 ‘불법 획득 국민 개인정보 죄’로 판결받았다. 2015년 6월 영국 외교부의 압력 하에 그는 조기 석방되어 영국으로 돌아갔다.

3년 후 피터 험프리는 기자회견에서 다시 그가 당국에 체포, 감금, 자백 강요, 판결받은 과정을 이야기했다. “그들은 제게 약을 먹이고 저를 호랑이 의자에 잠가놓았으며, 또 저를 쇠 우리에 넣고 잠갔습니다. 중국 중앙 CCTV 방송국의 기자들은 카메라를 들고 제가 경찰이 미리 준비해 놓은 원고를 읽는 것을 찍었습니다.” 작년 11월 23일, 그는 정식으로 영국 통신관리국에 중공 중앙TV 방송국과 그것의 국제지사 CGTN이 영국 방송TV 준칙을 어겼다고 고발했다. 게다가 중공 경찰과 공모해 자백을 강요하는 가짜 뉴스를 만들어, 인권을 심각하게 침범했다며 CCTV의 영국 방송면허 취소를 촉구했다.

2015년 ‘709 사건’에서 체포된 인권 변호사 왕위(王宇)가 증언했다. 그해 10월의 어느 날 한밤중에 그녀는 잠에서 깨어났다. 수사관 두 명이 와서 그녀의 16살 된 아들이 윈난(雲南) 변경에서 체포되었다며, 미얀마를 거쳐 미국으로 도망가려고 했다고 알려주었다. 왕위는 아들이 구치소에 있는 사진 아래에 ‘범죄 용의자’라는 몇 글자를 보고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고 했다. 그녀는 영상을 하나 찍어서 공안부 지도자에게 보여주면 아들을 구할 수 있다는 말을 듣게 됐다. 당국은 영상은 절대 밖으로 나가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촬영할 때도 평소 신문할 때 쓰는 컴퓨터용 카메라를 사용했다. 자유를 얻은 후 왕위는 부모님과 친구들에게 자신이 중앙 CCTV에 올랐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다.

베이징 변호사 장톈융(江天勇)은 에이즈 감염자 구조, 산시(山西) 검은 벽돌 공장 사건, 베이징 변호사 직선, 파룬궁 개별 사건 등 여러 인권을 수호하는 행동에 참여했다. 이로 인해 중국에서 줄곧 감시, 소란, 위협을 받으며 역시 ‘TV자백’을 당했다. 장톈융 변호사의 아내 진볜링(金變玲)은 TV자백을 당한 걸 보니 안에서 심한 고문이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TV자백’이 타격한 것은 한 사람이 굳게 지킬 수 있는 도덕신앙과 원래의 가치관이고, 와해시킨 것은 한 사람의 최후의 존엄이다. 세상과 동떨어진 상태 하에서 한 사람의 안전, 건강 상황, 사법구조의 권리가 조금도 보장받지 못하는 이런 극단적인 상황 하에서 채택한 타협책이다.

1999년 장쩌민 집단이 진선인(眞善忍)을 믿는 파룬궁수련생을 박해하기 시작하고, 경찰에게 때려죽여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고 지시했다. 중국의 최고 학부 칭화대학에서 파룬궁수련생 여러 명이 8년에서 13년까지의 중한 판결을 받았다. 칭화대학 전자과 95학번 박사반 학생 리이샹(李義翔)은 1999년 10월 수련심득교류회에 참가했다. 그는 베이징시 공안국 7처에 한 달 형사구류 되었는데 7처 처장이 직접 신문했다. 리이샹을 기둥에 묶어 놓고 밤낮으로 고문을 하며 자백을 강요하고, 구타하며 소금물을 주입했다. 리이샹은 인터넷에서 실명으로 공개 탈당해 중공고위층을 뒤흔들어 장쩌민이 직접 명령을 내려 ‘본보기로 잡아 판결하지 말고 반드시 전향시켜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칭화대학 당위원회는 전력으로 협조했다. 칭화대학에서 지키고 있던 ‘610’ 두목 리란칭(李嵐清)은 칭화대학 당위원회 부서기 장짜이싱(張再興)과 함께 직접 지휘하며 공안, 종교, 과학, 교수 전문가 등의 방면 사람 20여 명을 조직해 이른바 ‘교육대’를 만들었다. 그들은 고문, 세뇌 등 비열한 수단으로 ‘본보기성 전향’을 만들어냈다.

핍박이 심해 뜻밖의 사고가 발생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리이샹의 어머니가 같이 있게 하며 리이샹을 200호(칭화 핵연구원이 한 산촌에 설립한 모 실험기지)에 연금시키고 전향학습반을 열었다. 20여 명이 한 달 내내 리이샹에게 스트레스를 주며 피로전술, 외부와 격리, 고문 및 스파이가 잘 사용하는 수법 심리공략술 등의 수단을 쓰며, 장기간 폐쇄성 정신 학대를 했다. 심신의 거대한 압력 하에 리이샹은 마음을 어기고 인식을 말하며 반성문을 썼지만, 장쩌민의 요구에는 부합하지 않았다. 문장을 고치는 졸개들이 심혈을 기울여 고치고 가공해 ‘한 박사생과 파룬궁의 결별’이 나왔고, 전 중국인을 속이는 전형적인 ‘가짜 자료’가 되어, 고문 아래의 강제 전향 세뇌반을 미화했다.

많은 파룬궁수련생이 불법으로 감옥에 들어간 후 감옥 측은 강제로 옷을 벗기고 죄수복을 입히며, 자백을 강요하고 강제로 감옥 규정을 외우게 하며, 강제로 보고서를 쓰게 하고 강제로 일을 시켰다. ‘전향’하지 않고 고발자료를 쓰지 않으면 가족을 만나지 못하게 하고, 심지어 더 심한 박해를 했다.

산둥(山東)성 남자 감옥은 장기간 파룬궁수련생을 전향시키고 있다. 2014년 9월 감옥구역 구장 리웨이(李偉), 부 구장 천옌(陳岩)의 지시 하에 11감옥 구역은 확고한 파룬궁수련생을 노예로 부리고, 복대를 채우며 의자에 묶고, 수련생의 머리를 끈으로 묶고 뒤에 물을 가득 담은 사이다병을 달아놓아 견디기 힘들게 했다.

中共监狱酷刑示意图:“吊瓶”
중공 감옥 고문 설명도
: ‘링거

산둥 서우광(壽光)시 수련생 류싱우(劉興武)가 감옥에서 나가기 전에 전향시키기 위해, 감옥 구역장 리웨이(李偉)는 각종 고압수단을 사용했다. 박해를 저지하고 반박해하기 위해 류싱우는 단식 항의하기 시작했다. 단식 5일째 리웨이는 문제가 생기는 것이 두려워, 류싱우를 찾아 담화를 나눈다는 속임수로 밥을 먹으라고 했다. 겉모양이 그럴듯하게 수법을 바꾸며 또 류싱우에게 강제로 파룬궁을 모함하는 영상을 보게 했다. 류싱우가 따르지 않으니 졸개 우친타오(吳勤濤), 왕자옌(王家岩)을 찾아 강제로 시켰다. 2017년 류싱우는 다시 단식하기 시작했고 5일째 되는 날에는 그들이 강제로 음식물을 주입해 위출혈로 피가 멈추지 않아 감옥병원으로 보내졌다. 토혈을 멈추지 않아 다시 경찰병원으로 보내져 한 달 만에야 호전되었다.

2008년 헤이룽장(黑龍江省)성 유이(友誼)현 수련생 린쩌화(林澤華)가 징역7년형을 선고받고 자무쓰(佳木斯)감옥에서 경찰이 사주한 죄수에게 맞아 마비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분 감옥 구역장 라이바오화(賴寶華)는 또 그에게 죄를 인정하라고 강요하며 죄를 뉘우친다는 글을 쓰라고 했다. 린쩌화의 가족이 감옥 측에 치료를 해주거나 장애판정을 해주거나, 풀어주면 집에 가서 치료하겠다고 요구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2013년 린쩌화는 자신이 박해받아 장애가 된 자세한 상황으로, 자무쓰감옥과 검찰이 법을 어기고 진상을 은폐하며 죄수를 감싸주는 것을 고발했다.

푸젠(福建) 민시(閩西) 감옥은 갇혀있는 남자 파룬궁수련생 수십 명에게 여러 번 ‘삼전전향(三全轉化)’박해를 실시했다. 즉 ‘전일제, 전방위, 전봉쇄’적으로 수련생들을 체벌, 폭행, 세뇌시켜 사람의 의지를 무너뜨리고 마음을 어긴 상황에서 보증서와 ‘전향자료’를 쓰게 하며 ‘자백’을 강요했다.

中共酷刑示意图:吊铐
중공 고문 설명도
: 매달아 수갑 채우기

감옥경찰들은 상급의 임무를 완성해, 진급하고 돈을 벌기 위해 [파룬궁수련생 한 명을 전향시키면 상금이 500위안(약 8만원)] 양심을 어기고 공개적으로 법을 집행하며 법을 어기고 있다. 처음에는 그들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종이와 팬을 수련생 앞에 갖다 놓고, 그다음은 수갑 하나 혹은 두 개로 사람을 철 난간에 매달아 놓아, 두 발이 땅을 딛지 못하게 몸을 허공에 뜨게 하는데, 목적에 도달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어떤 수련생은 기절해도 감옥 측은 내려주지 않으며 이 과정에서 또 폭행까지 한다. 모 감옥 경찰은 또 “쓰지 않으면 이 문을 나가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윈난성 여자 노동교양소, 인청(引晟)학교라고도 한다. 실질은 파시즘 강제수용소다. 파룬궁수련생을 엄밀하게 관리하며 강제로 세뇌전향시킨다. 상급에서 자주 와서 시찰하는데 외관으로 보면 푸른 풀밭, 푸른 나무, 화원이 있어 환경이 좋다는 가상을 주지만, 실질은 사람을 죽여도 아무도 모르는 곳이다. 상급에서 참관하러 오면 절대 3층으로 가지 않는다. 3층에는 비인간적인 학대를 받는 진선인을 수련하는 좋은 사람들이 갇혀있는 곳이다. 몇 개 방문은 종이로 발라서 꽉 막아놓았는데 그곳은 바오자(包夾 밀착 감시)방이다. 배신자나 경찰 몇 명이 포위공격하며, 사부님을 모함하고 대법을 모함하는 내용으로 바오자 당하는 사람의 의지를 흔든다. 나가지 못하게 하고 온종일 감시하며 이것도 저것도 하지 못하게 하는데 신념을 포기하는 보증서를 쓰라는 것이다. 외부에서 알까 봐 두려워 소문나지 않게 하려고 경찰의 사진, 이름, 직무도 감히 문 앞에 적어 놓지 못한다. 그러나 다른 곳에는 경찰의 사진, 이름, 직무가 다 적혀있다.

그곳에 갇혀 있던 한 파룬궁수련생이 말했다. 감옥 의사가 환자에게 주사를 놓을 때 집게로 주사바늘을 집고 몇 번씩 찌르며 놓는데, 아파서 식은땀이 나도 감히 소리를 내지 못했다. 약도 아주 간단하게 쓰는데 강한 소염제 몇 가지를 쓰고 매 사람마다 매월 의료비 8위안(약 1,300원)을 쓴다. 매 사람의 피를 5ml씩 뽑으며 허약한 사람도 다 뽑아간다. 병을 검사해준다고 하지만 아무도 결과를 모르고, 누구의 병을 검사했다는 말도 들어보지 못했다. 감옥에서 나온 후에야 장기적출을 위해 준비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20년간, 중공의 파룬궁수련생에 대한 잔혹한 박해사례는 너무 많아 다 셀 수도 없다. 밍후이왕 통계에 따르면 박해로 사망한 수련생이 4000명을 넘는다. 위에서 서술한 사례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이에 비해 홍콩 통로완 서점 사장, 영국 사립탐정 등 외국국적을 가진 사람들은 귀국한 후, 그들의 자유로운 나라에서 기자회견을 가져 전 세계에 진상을 폭로하고, 심지어 중앙 CCTV 방송국을 고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국 같은 이런 법치가 없는 나라에서는 파룬궁수련생들이 감옥 그런 극히 열악하고 도움이 없는 환경에 처해 있으며, 심지어 변호사와 가족도 만나지 못하고 있는데, 밖에다 말한다는 것은 더욱 불가능하다. 그들이 정신적․육체적으로 감당한 학대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도 거듭된 압력을 무릅쓰고 19년을 지나왔다. 그것은 그들이 진리는 반드시 사악을 이긴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원문발표: 2019년 3월 2일
문장분류: 시사평론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3/2/38337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