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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장공안국장 ‘톈안먼분신자살조작극’ 때 우리는 현장에 있었다

글/ 창칭

[밍후이왕] 나는 신장(新疆)에서 60년 동안 생활했다. 수십 년간 교편을 잡았었고 기업도 경영했었다. 2002년 4월 나와 남편은 우리가 장기간 생활했던 도시로 일을 보러 돌아왔다. 이 도시의 공안국장은 특별히 차를 타고 우리를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기사를 밖으로 보내고 우리 셋은 3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가 톈안먼(天安門) 분신자살조작극은 가짜라고 말하자 그는 이해한다며 말했다. 당시 그들은 바로 톈안먼 광장에 있었다고 했다. 2001년 톈안먼 분신자살조작극 며칠 전, 전국의 현 이상의 공안국장이 베이징 회의에 소집되었는데 그도 참가했다고 했다. 분신자살조작극 발생 당일 그들은 한창 고궁(故宮)을 참관하고 있었고, 갑자기 그들에게 얼른 나가서 톈안먼 광장으로 가라고 통지했다. 그래서 직접 분신자살조작극을 목격했던 것이다.

이 국장은 한족 사람(중국원주민)으로 당시 50여 세였으며, 1997년 즈음에 업무 관계로 우리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는 남편과 마음이 잘 통하여 자주 연락을 취하고 대화를 나누었다. 1998년 우리가 파룬궁을 수련한 후 그도 우리와 파룬궁 이야기를 나누곤 했고, 그도 파룬궁을 매우 인정하고 있었다.

1999년 4·25일 이후 국장은 나의 남편에게 말한 적이 있다. 모두 조사해 봤는데 우리가 소재한 이 도시의 이 지역에 파룬궁을 연마하는 사람은 2백여 명이고 죄를 범한 사람은 한 명도 없다. 모두 좋은 사람이다. 한 사람만이 연공하기 전에 남녀 문제가 있었지만 연공한 후 좋아졌다. 이번 회의에서 한 부서의 지도자는 파룬궁을 연마하는 것은 별거 아니다. 그들에게 적지 않은 의약비도 절약해 주었다고 말했다.

1999년 7월 박해가 발생한 후 현지에서는 많은 파룬궁수련생을 체포했다. 국장은 경찰들에게 경고를 주었다. “정책에 따라 일을 처리하되,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이에 따라 이 지역에서 체포된 파룬따파(法輪大法)제자는 15일간 감금하고 석방됐다. 감금기간에 책을 보고 연공 할 수 있었으며 자백을 강요하거나 괴롭히지도 않았으며, 생활에 있어서도 가로채거나 착복하지 않았다.

비교해 보면 신장의 많은 구치소의 상황은 매우 열악했고, 자백을 강요하고 탄압할 뿐만 아니라 남성은 머리를 모두 깎이고 연공을 못하게 했으며, 구치소의 규칙을 외우라고 강요당했다. 외우지 못하면 얻어맞았으며, 동시에 노예 노동을 강요당하며 매우 고생스러운 생활을 했으므로 더욱 고생이었다. 10제곱미터의 방에 가장 많을 때는 10명이 기거했다. 먹고 마시고 싸는 것을 모두 이 방안에서 해결했다. 하루에 두 끼 식사를 하고, 아침에 죽 한 그릇에 빵 하나만 가져가게 했고, 오후에는 국 한 그릇에 빵 하나만 가져가게 했으며, 점심에 밥을 먹으려면 사비로 사 먹어야 했다. 5위안(약 850원)짜리를 10위안에, 30전(약 60원)짜리는 1위안(약 170원)에 팔았다. 가족이 생활용품과 먹을 것을 보내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나중에 국장이 인민대표대회 부주임으로 자리를 옮기자 현지의 박해형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원문발표: 2018년 6월 2일
문장분류: 시사평론>사실복원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8/6/2/36832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