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단천(掸尘 )
[밍후이왕] 근래 중국 중동부 여러 개 성시에서는 입동 이래 범위가 제일 넓고 강도가 제일 강한 한차례의 눈이 내려 각지의 교통이 두절되었다. 중공의 여러 매체는 이 기회를 이용해 대륙경찰의 소위 ‘따사로움을 준다’는 장면을 선전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인터넷에서의 현장영상인 교통경찰의 ‘따사로움을 준다’는 것은 꾸민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영상에 나타나는 교통경찰은 고정된 격식으로 손에 보온병을 들고 기사에게 뜨거운 물을 부어준다. 기사는 호응을 상당히 잘하는데 큰 물그릇을 들고 물을 받는다. 옆의 3명의 보조요원은 교통경찰을 향하여 눈을 퍼붓는다. ‘폭풍설의 특효’를 제작하는데 동시에 어떤 사람은 옆에서 ‘눈은 그치지 말라’를 외친다. 화면의 효과를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해 제작팀은 특별히 교통경찰을 위하여 높다란 누각을 만들어 경찰이 손을 내밀면 화물차에 앉은 기사가 물건을 받도록 하였다.
중공이 만든 가짜영상을 민중들은 많이 보아왔기에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여러분도 다 알고 있듯이 교통경찰이 자기를 과대포장하는 것이다. 다른 측면으로 보면 ‘중공의 교통경찰은 어떠한가?’ 중국의 기사들은 잘 알고 있는데 ‘얼마나 많은 벌금을 당했는가?’ 사고처리를 할 때에 ‘어떤 따사로움을 느낄 수 있었던가?’ ‘경찰이 당신에게 뜨거운 물을 준적이 있는가?’ 당연히 그것은 단지 연기를 위한 것이므로 밥을 주어도 되는 것이 아닌가.
중공이 자기의 얼굴에 분칠하는 방법은 많다. 이런 특별한 일은 그 중의 하나다. 그러나 이런 특이한 영상을 찍는 것이 자기의 얼굴에 분칠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을 타격하는 것에 사용하는 것이라면 어떠할까? 포즈를 취하게 해서 촬영하는 것이 진짜인 것처럼 효과가 난다면 누구도 거짓이라고 의심하지 않을 것인데 그렇다면 민중에 대한 상해는 중대할 것이다. 중공이 18년 동안 파룬궁을 박해하는 중에 이런 영상을 얼마나 많이 찍었는가?
예를 들면 이런 특수한 영상은 중공이 집적 연기한 천안문 분신 사건이다. 2001년 1월 23일, 중공은 민중들이 파룬궁을 미워하도록 하기 위해 천안문분신 사건의 희극을 연출했다. 후에 이 분신은 가짜임이 증명되었다. 분신한 ‘왕진둥’을 보면 중공중앙텔레비전의 영상에서 나타난 것은 왕진둥의 솜옷이 다 탔는데도 그의 머리카락은 그대로였다. 두 다리 사이에 있던 휘발유를 담은 프라스틱 병은 큰 불속에서도 변형이 없었다.
이 프라스틱 병은 어떻게 열을 견딜 수 있는가? 이는 원인이 있는 것이다. 2002년 초, 천안문분신 가짜안건을 조작한 중앙텔레비전 기자 리위챵(李玉强)이 허베이(河北)성 ‘법제교육배양센터’에서 불법으로 감금당한 파룬궁 수련생과 ‘좌담’을 했다. 파룬궁 수련생이 그에게 ‘왕진둥이 그렇게 화상을 입었는데 그의 두 다리사이에 있던 휘발유를 담은 프라스틱 병은 왜 변형도 되지 않았는가?’ 이 문제를 제기했는데 파룬궁 수련생이 분석한 것이 매우 명확했다. 리위챵은 말문이 막혀 허둥대며 말하기를 왕진둥 다리사이에 놓인 프라스틱 병은 그들이 가져다 놓은 것이고 이 화면은 그들이 보충해서 찍은 것이라고 했다.
소위 ‘보충’이란 사후에 찍은 것이 아닌가? 그럼 이러한 보충은 당시의 장소를 누가 알 수 있는가? 중공이 다른 사람이 아는 것을 허용하겠는가? 이는 중공중앙최고층이 관심을 갖고 찍은 것인데 목적은 민중들이 파룬궁을 미워하게 하려는 것이 아닌가? 중공이 파룬궁을 박해하는 검은 내막과 관련되는 것이므로 감히 이러한 사실을 폭로하는 것은 생명으로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왕진둥이 두 다리를 교차하여 땅에 앉은 자세와 손 자세는 파룬궁 수련생이 가부좌한 자세와 손 자세와는 완전히 다르다. 그리고 그 배후의 무장경찰은 똑바로 서서 한 손에는 불을 끄는 담요를 들고 왕진둥이 구호를 외치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이때 왕진둥 몸에는 근본적으로 불꽃이 없었고 불을 끄는 담요로 덮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연극을 잘 연출하기 위하여 불끄는 담요는 꼭 그의 몸에 덮어야만했다. 불끄는 담요를 덮기 전에 무장경찰이 기다리는 것은 중공이 특별히 왕진둥에게 준비한 대사인 것이다: “우주대법은 세인에게 반드시 필요한 법이다”
이 말은 파룬궁의 모든 책에는 없는 말이며 모든 파룬궁 수련생의 문장에서도 이 말을 찾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말은 파룬궁과 근본적으로 무관한 것이고 중공이 파룬궁에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만들어 낸 것이기 때문이다. 불가수련은 먼저 연분을 말하는데 당신이 파룬궁과 연분이 없다면 곧 파룬궁 수련을 하지 못할 것이다. 세상에는 오직 파룬궁만 수련하는 것이 아니다. 불교, 도교, 기독교, 천주교, 유태교, 그리고 비밀리에 전해온 많은 공법 중에서 수행하지 않는가? 무장경찰은 왜 그가 이 구호를 외치기를 기다리는가? 이 구호를 외치지 않으면 불끄는 담요는 덮지 못하는 것인가? 중앙텔레비전에서 가짜 내용을 보도할 때 이지적인 사람들은 그 화면을 보면 곧 알 수 있었다: 이 분신의 연출은 영화와 같은데 이는 분신이 아니라 연극을 꾸미는 것이 아닌가?
현대 과학기술의 발전은 한 가지 일이 발생할 때 영상과 사운드로 신뢰를 증가시킨다. 그러나 여러분이 잊지말아야할 것은 중국인의 말할 권리를 공산당이 독점할 때에는 사람은 자기의 목적을 위하여 곧 다른 일을 연출할 수 있는데 또 현대 과학기술로 이를 포장한다.
그러나 가짜는 곧 가짜인 것이다. 아무리 고명한 과학기술이 제조한 가짜물건도 백성은 그래도 분별할 수 있다. 이것은 곧 사람이 거짓말을 할 때면 당시에 아무리 생생하게 표현한다 해도 결국은 결함이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원문발표: 2018년 1월 8일
문장분류: 시사평론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8/1/8/35941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