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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1999년 4월 25일 그 날

[밍후이왕] 1999년 4월 25일 때, 나는 겨우 27살이고 파룬따파 수련에 막 들어선지 두 달 밖에 안 됐다. 그 때는 우둔해 대법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고 그저 나는 수련하게 됐으며 삼장법사처럼 수련할 기연을 갖게 됐다고만 여겼다. 그 때의 내 마음 속은 법을 얻은 기쁨으로 가득 찼다.

그 때의 베이징은 아침이면 곳곳에서 대법제자가 단체 연공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매번 일요일이면 가까운 중관촌(中關村) 운동장에서 단체 연공에 참가했는데 연공하는 사람이 엄청 많았다. 이는 법을 막 얻은 나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감동이었다. 이러했지만 나는 당시 장쩌민 정권이 파룬궁을 호시탐탐 노려보고 있다는 것을 여전히 느낄 수 있었다.

4월 24일 저녁, 단체 법공부를 할 때(그때는 날마다 저녁 7시면 단체로 ‘전법륜’ 한 강을 학습했다) 우리 보도원이 학습소조에서 말했다. “어제 톈진에서 많은 파룬궁 수련생이 붙잡혔어요. 내일 저는 중난하이에 청원하러 가겠으니 여러분들 중에 누가 같이 갈 사람이 있습니까?” 당시 수련생들은 모두 말이 없었고 내가 같이 가겠다고 말했다.

이튿날 아침 4시 넘어 우리 두 사람은 자전거를 타고 하이뎬(海淀)에서 떠났다. 중난하이 담장 밖까지 왔을 때는 아직 6시가 안 됐다. 아직 출근 시간이 안 됐으므로 길에는 행인이 적었고 길목에서는 두 근무 경찰이 여유롭게 보초 교대를 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파룬궁 수련생이 거의 없었다. 그날 날씨는 약간 흐리긴 했지만 베이징의 기후는 이미 아주 따스했다.

一九九九年四月二十五日逾万名法轮功学员在北京和平上方

1999년 4월 25일, 1만 명 넘는 파룬궁 수련생이 베이징에서 평화 청원을 했다.

그곳에 도착한 후 우리는 주위를 걸어 다니다가 중난하이 서문에서 멈춰 섰다. 아침을 먹지 않았기에 나는 골목에서 간단하게 먹을 걸 사서 요기했다. 7, 8시쯤 되니 중난하이 담장 밖으로 끊임없이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나중에야 나는 그들이 청원하러 온 파룬궁 수련생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지고 경찰도 나타났다. 내가 있는 서문 밖 큰 길 양쪽에 모두 대법제자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경찰은 중난하이 벽 쪽에 서있는 수련생을 큰길 이쪽으로 데려왔다. 사람이 많았으므로 인도는 사람들로 꽉 찼다. 누군가 자발적으로 맹인용 보도를 내주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건의했다. 우리 모두들 맹인용 보도를 내주었고 사람들은 먼 곳으로 뻗어나갔다. 하지만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져 나중에는 맹인용 보도에도 사람이 꽉 들어섰다. 하지만 사람이 얼마나 많든지를 막론하고 큰 길의 교통은 줄곧 정상이었다. 단지 나중에 수련생을 막는 경찰이 한 줄 더 늘어났을 따름이다.

서 있는 시간이 오래되자 연세가 많은 수련생은 안에서 자리를 깔고 땅바닥에 앉았고 젊은 사람은 밖에 서 있었다. 저녁때가 돼서부터 북해 쪽 인도에도 수련생이 꽉 서 있었다. 경찰 무전기에서 우리들을 어떻게 처리할 지에 대한 대화가 끊임없이 들려와 긴장한 분위기가 흘렀다.

나는 젊었으므로 줄곧 앞에 서 있었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수련생 가운데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있는가 하면 만삭이 된 임신부가 있었고, 또 젖먹이를 안은 젊은 여자도 있었다. 신변의 누군가가 비닐 봉투를 들고 쉴 새 없이 물었다. 쓰레기가 있어요? 우리는 쓰레기를 비닐 봉투에 넣었고 땅바닥은 내내 아주 깨끗했다. 주위의 공용 화장실은 처음에는 사람이 많아 좀 더러웠지만 재빨리 누군가 변소 빗자루로 화장실을 깨끗이 쓸었다. 사실 나처럼 이렇게 대법에 대한 이해가 깊지 못한 신수련생의 4.25참가는 하나의 정신적인 세례였고 나로 하여금 파룬따파의 완벽함을 더욱 더 알게 했으며, 자신이 대법제자라는 것이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대법 수련생의 평화로운 모습으로 경찰도 당초의 강한 경각심을 늦췄고 갈수록 더 늦췄다. 오후에 우리는 정부에서 보낸 통지를 받았는데 대략적인 뜻으로는, 정부는 지금껏 기공을 반대한 적이 없으니 우리에게 집으로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톈진 사람을 아직 풀어주지 않았으므로 누구도 돌아갈 수 없었다. 경찰은 저녁이 되면 점차 돌아갈 줄로 알았는데 저녁이 되자 퇴근한 수련생까지 와서 사람이 갈수록 많아졌다. 저녁 9시 정도가 되자 우리 보도원이 돌아와 톈진에서 수련생을 석방했고 주룽지 총리가 수련생을 접견했다면서 돌아가자고 했다! 그녀는 또 자기가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알려주었고 이렇게 서로서로 전해 주어 1만 명 넘는 사람이 단번에 다 사라진 듯 했다.

나와 보도원은 자전거를 타고 집에 돌아왔다.

4.25 전 과정에 포위도 없었고 공격도 없었다는 것이 내가 직접 경험한 사실이다. 중난하이 주위뿐만 아니라 이후에 북해 그쪽 길에도 수련생이 꽉 서 있었지만 줄곧 평화적인 대법제자의 풍모를 보여 주었다. 1999년 4월 25일은 인류 역사상 불후의 금자탑으로 됐다!

원문발표: 2017년 4월 25일

문장분류: 온고명금(溫故明今)>‘4.25’ 청원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4/25/34614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