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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에서 ‘억센 풀’이 되다

글/ 중국대법제자 억센 풀(勁草)

[밍후이왕] ‘풀 같다(像草)’는 나의 필명이고, 이 이름에는 16년 나의 어린 시절, 소년에서 청년까지 당한 모든 박해를 담고 있다. 지금 고난을 경험 후 여전히 밝은 나는 이미 질풍 후의 ‘억센 풀’로 자랐다.

6살 되는 해, 엄마는 병을 치료하려고 아빠는 건강을 위해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했다. 그 후 그들 얼굴에 웃음꽃이 피게 됐다. 엄마가 연공하면 나도 따라 했고 기쁠 때 나는 큰소리로 “엄마가 없는 아이는 풀 같다”, “엄마가 있는 아이는 보배 같다”며 큰소리로 노래했다. 내가 두 팔로 귀여운 자태를 뽐내자 모두 웃었다.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엄마가 연공 해 병이 나았다. 온 가족은 더는 암에 대해 말하지 않게 되었다. 엄마가 있으니 나는 보배 같다. 파룬궁은 정말로 좋고 우리 집도 좋다.’

확실히 그때 우리 집은 다른 사람이 부러워했다. 아빠는 우수교사였고 엄마는 하급[基層]간부였으며 사람들이 ‘재녀(才女)’라고 불렀다. 나는 귀엽고 영리하고 몇 살 되지 않아 당시 송사를 술술 외웠다. 집에서 ‘공주’처럼 손님이 오면 한바탕 외운다. 마지막에 어른들이 웃으며 말한다. “그만! 그만! 대단하네. 우리 어른도 외우지 못하는데.” 마음속으로 기뻐했다. “나 정말 대단하네.”

무슨 영문인지 우리 집에 갑자기 한 무리 사람이 쳐들어와 아빠를 데려가 구류했다. 무엇이 구류인가? 엄마에게 감히 묻지 못했다. 왜냐하면, 엄마 얼굴에 전의 미소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무슨 영문인지 우리 집에 한 무리 사람이 쳐들어와 대법책, 비디오를 가져갔다. 이어 생활은 시끄럽고 미행당하고 전화선이 끊기고 다른 사람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내가 방과 후 집에 돌아오니 엄마를 찾을 수 없었다. ‘세뇌반’에서 붙잡아 갔다고 했다. 집에 70여 세 외할머니가 나와 동반했다. 외할머니는 걱정하며 눈물만 흘렸다. 엄마가 ‘세뇌반’에서 돌아온 후 여위고 작아졌다. 침대에 누워 일어나지 못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아빠가 구치소에서 돌아왔다가 얼마 후 또 판결을 받았다. 외할머니는 하룻밤 사이에 귀밑머리가 희게 됐고 두 눈이 흐려졌다. 우리 조손은 서로 의지하며 살았다. 당시 고생스러운 생활을 어떻게 지내왔는지 모른다.

작은 마음에 공포심이 가득 찼다. 생활의 공기마저 굳어진 것 같다.

나의 기억은 흐릿한 데서 뚜렷해졌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어느 해 여름 방학에 나와 엄마는 아빠를 뵈러 감옥에 갔다. 길에서 아빠를 보는 기쁨을 상상했다. 결과 정문 밖에서 낮에는 땡볕에서, 밤에는 모기에 물려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고생스럽게 이틀간 기다렸다. 엄마는 좋은 말을 많이 했지만, 경찰은 우리의 피곤함과 어린아이를 데려온 것을 봐주지 않고 무조건 만나지 못하게 했다. 어느 겨울 방학에 나와 엄마는 또 아빠를 뵈러 갔다. 길에서 눈이 길을 가로막았고 엄마는 언 나의 발을 가슴에 대고 녹여주었다. 내 손은 동상에 걸렸다. 감옥에서 아빠를 만난 후 죄수복을 입은 아빠를 보고 강단에 섰던 아빠가 생각났다. 얼어붙은 손보다 더욱 아픈 것은 나의 가슴이다. 그런 후 2년 동안 만나지 못했다.

후에 엄마는 또 구치소에 갇혔고, 집에 돌아온 후 전의 ‘재녀’가 ‘시녀(柴女)’로 변했다.엄마는 뼈만 남고 골절되어 반신불수가 됐고 생활도 스스로 할 수 없어 10살된 내가 엄마에게 밥을 먹였다. 후에 알았는데 엄마는 신앙을 포기하지 않아 각종 혹형을 당했다.

중학교에 갔을 때 나는 집이 없고, 온 가족은 떠돌이 생활을 했다. 부모님은 직장을 잃고 나도 경제 내원을 잃었다. 집에 있는 적금과 친척의 도움으로 학교에 다녔다. 학교 기숙사에서 살았는데 한번은 열이 올라 외롭게 기숙사에 누어 몇 끼를 먹지 못했다. 친구에게 아이스크림 하나를 부탁해 먹었다. 속으로 이것은 돈을 함부로 쓰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했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 친구들의 엄마 아빠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가지고 그들을 보러 왔다. 한번은 어버이날(母親節) 학교 전화 부스에 가 줄을 서서 엄마에게 전화했다. 처음으로 내 차례인데 수업시간이 돼 급히 교실로 뛰어갔다. 두 번째 또 전화하러 갔다. 반복을 거쳐 마침내 떠돌이 생활을 하는 엄마와 연결됐다. 저녁에 잠을 자지 못하고 울어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나의 일기에 ‘오늘 어버이날 엄마가 아주 그립다.’라고 썼다. 몇 년 후, 엄마는 나의 일기를 발견하고는 “이번 박해는 엄마가 있는 아이를 풀 같이 만들었다.”고 탄식했다. 이것은 최초 ‘풀 같다’의 유래이다.

대학에 입학한 후 마음에 들지 않는 대학 입학통지서를 보고 어릴 때 ‘능력이 있다’는 말을 들은 것을 떠올렸고, 초등학교 때 무용시합에서 현(縣)의 1등 상장과 벽에 가득히 걸어놓은 상장이 생각났다. 학교 다닐 때 학비를 걱정해야 하고 방학 후 집이 없어 돌아갈 수가 없고 밖에서 다른 사람의 눈총받은 것을 떠올리며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마음에 들지 않는 통지서’는 참혹한 박해와 정신적 스트레스, 가정의 비극적인 압력에 의해 초래된 것이다. 대학교에 다닐 때 지도원은 학교에서의 나의 표현을 인정했고 나의 가정 상황을 알고는 주동적으로 전국 격려장학금을 나에게 수여해주었다. 나는 나와 부모님을 이해해준 좋은 사람에게 평생 감사드린다.

일자리를 찾을 때 정치에 민감한 직업을 피하고, 부업을 계승하는 교사직과 공무원 등 직업 선택을 포기했다.

결혼 상대를 찾을 때, 상대방이 내가 ‘파룬궁 가족’이라 하면 마음에 불만이 생겨 왕래를 끊었다.

어쨌든 16년 동안 파룬궁에 대한 박해는 어린 시절부터 소년에서 청년이 될 때까지 가정, 학교에서 사회에서까지 그림자처럼 나를 시시각각 따라 다녔다.

지금 파룬따파가 나에게 준 관용과 선량한 마음으로 내가 감당한 일체를 대하고 일을 사랑하고 생활을 사랑하고 자아 가치로 사회에 헌신하며 우리를 박해한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깨달았는데 나의 시련은 그들이 용의자가 아니고 나의 시련은 장쩌민이 흑백을 전도했기 때문이다.

오늘 글을 써서 우두머리 장쩌민이 우리 온 가족에 범한 각종 범죄, 모욕죄, 국민 신앙박탈 죄, 혹형죄, 불법 납치죄, 불법 감금죄로 고소한다. 정중하게 모든 진상을 잘 모르고 있는 사람에게 ‘우리 부모는 잘못이 없고 리훙쯔(李洪志) 사부님께서 ’진·선·인(眞善忍)’을 전하신 것은 잘못이 없다는 걸 알려드린다.

집권자가 법에 따라 장쩌민을 처벌하고, 장쩌민에게 전 세계를 향해 공개적으로 범죄를 인정하게 할 것을 청원한다.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결백을 돌려주고 파룬따파의 정의를 돌려주고 행복했던 가정을 돌려 달라. 이것은 나뿐만 아니라 전국 수많은 나와 같은 경력이 있는 ‘억센 풀’의 공동 호소이다.

문장발표: 2015년 11월 12일
문장분류: 시사평론>세상인심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5/11/12/31903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