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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령 복종과 양심 지키기

글/ 밍더

[밍후이왕] “그는 기차역에서 우리가 탄 열차가 멀어져 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점점 작아지는 그의 모습이 쓸쓸해 보였는데 마치 우리를 보내기에 불안해하고 현재 하고 있는 일이 불안한 것 같았다……”

헝가리 유태인을 가득 실은 열차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가고 있었고 역에 선 사람은 나치의 고위관리 아돌프 아이히만으로, 위 문장은 당시의 그를 묘사한 것이다. 아이히만은 유럽 전역 유태인들을 말살수용소로 보내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의 손을 거쳐 사망한 유태인이 500~600만 명이나 된다. 일반 유태인들은 그를 ‘사악의 사디즘(학대광)’, ‘가장 변태적인 악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학살의 생존자인 엘리 야샐아이가 본 아이히만은 평범한 사람이었고 사형을 집행할 때 양심적으로 괴로워하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역사자료에 아이히만의 냉혹함과 잔인함이 기록돼 있다. 전쟁이 끝날 무렵 그는 “나는 무덤 속에 기쁘게 뛰어들 것이다. 왜냐하면 독일제국의 적 500만 명이 짐승처럼 살해됐기 때문이다”라고 떠든 적이 있다. 이때의 아이히만은 수백만 생명에 대해 전혀 무관심했고 양심은 이미 철저히 사라졌었다.

그러나 아이히만은 선천적인 악마가 아니라 한 인간이 악마로 변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 점은 그의 나치당 경력 중에서 일부 엿볼 수 있다. 처음 아이히만은 수용소의 참혹한 장면을 보면서 속이 메스꺼웠고(사람의 본성 중에 범죄를 혐오하는 심리), 공포에 떨었으며 이로 인해 전근을 신청했다. 그러나 상사는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군인의 천직”이라고 답변했다. 결국 그는 자리를 뜨지 않았고 이후에 진급도 하며 수용소 일에 습관이 되어버렸다. 그는 차차 무감각해졌고 그러한 일에 빠져들었으며 인성을 완전히 상실했다. 천리를 위배하는 일을 하면서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고 한 차례 또 한 차례 명령 집행 과정에서 그의 양심은 점차 사라졌다.

1960년, 아이히만은 체포됐다. 그는 “명령에 복종했을 뿐”이라고 자신을 변호하면서 자신이 “거대한 기계의 한 톱니바퀴 작용을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다른 나치당원과 마찬가지로 법정은 그의 ‘톱니바퀴’ 설을 기각했다. 왜냐하면 사람이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져야하는 판단 기준은 주로 명령이 아니라 양심이기 때문이다. 양심이야말로 최고의 준칙이다. 이듬해 아이히만은 사형판결을 받았고 그 다음해 교수형이 집행됐다.

양심은 아이히만에게 마음의 문을 열 기회를 여러 번 주었다. 그러나 그는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이유로 거절했고 악의 저주에 빠져 양심을 버리고 마귀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기회를 잃었다. 양심을 잃자 아이히만은 곧 심연에 빠지기 시작했다.

독일계 유태인 철학자인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가까이에서 관찰한 후 ‘평범한 악’이라는 개념을 제기했다. 아이히만이 악의 명령에 복종하면서 양심을 점차 잃게 된 것을 그녀는 똑똑히 본 것이다.

아렌트는 악이란 평범하고 천박한 상태로 ‘사고하지 않는’ 것이라고 여긴다. ‘평범한 악’은 순종하고 무감각하며 옳고 그름에 판단력이 없이 명령에 복종해 악한 짓을 함에서 표현되며 선악과 양심으로 자신의 행위를 판단하는 능력을 상실한 것이다. 악마가 위에서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나치의 명령 속에 숨어있음을 보아내기란 어렵지 않다. 바로 이후에 진행한 밀그램 실험이 실증하는 바와 같이 사악한 명령이 권위에서 오게 되면, 보통 깊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명령에 복종한다는 심리에 따라 양심이 내보내는 도덕지령을 무시하기 때문에 도덕이 약화되거나 상실하게 되며 사악한 행위를 순리롭게 하게 된다. 양심이 불안해도 책임을 권위에게 떠밀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보면 사악한 명령에 복종하는 과정이 바로 양심을 소멸시키는 과정이다. 오래되면 양심은 철저히 붕괴된다.

아이히만으로 말하면 그가 체현한 ‘평범한 악’은 맹목적으로 대학살 명령에 복종한 것이며 자진해 나치 살인기계의 ‘톱니와 나사못’이 되고 나치당 수중의 ‘도구’가 된 것이다. 아렌트가 특별히 ‘비인간적’이라 칭한 과정은 인성을 소멸시키고 사람의 도덕과 양심을 훼멸시키는 과정으로서, 아이히만이 매번 명령 복종 과정에서 자각적으로 혹은 비자각적으로 완성한 것이다.

사람을 인간이라 일컫는 것은 바로 사람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도덕과 양심이 있기 때문이다. 맹자는 “생각하지 않아도 아는 것이 양심(所不慮而知者,其良知也)”이라고 말했다. 양심은 사람의 생명 중 선천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선악을 판단하는 능력을 말한다. 하늘이 사람의 생명에 양심을 부여함은 바로 사람들이 옳고 그름과 선악 앞에서 자각할 수 있고 분별할 수 있어 정확하게 선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때로는 순간적으로 마음이 동하는 것이 바로 양심의 권유다. 마치 기차역의 아이히만처럼 ‘쓸쓸하고’, ‘불안한’ 느낌이 바로 심연으로 떨어지기 직전에 양심이 주는 신의 경고다. 일단 양심의 이끌림을 잃으면 암흑 속에 떨어져 방향을 잃게 되며 이때면 사악한 영체[邪靈]가 사람을 조종해 더욱 큰 죄를 짓게 하는데 사람은 이를 모르고 있다. 이것이 소멸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사람이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유일한 방법은 바로 양심을 되찾아 ‘진선인(眞善忍)’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 전기(傳記)에는 아렌트가 학생들의 심지를 불러일으키는 연설을 하는 장면이 있다. “사고란, 마치 가장 안정적일 때 자신을 보는 것과 같다. 사고는 많은 지식이 필요치 않고, 옳고 그름, 선악을 분별하는 능력을 얻게 한다. 사고는 사람에게 관건적 시각을 넘는 능력을 부여해 재난적인 결과를 방지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천리로 본다면 아렌트가 말하는 사고란 바로 양심을 불러오는 과정이다.

양심의 중요성은 다 알고 있다. 그러나 독재정권 통치자들은 사악한 명령을 통해 사람의 양심을 소멸시킬 뿐만 아니라 세뇌시키고 최면술로 시비를 뒤섞고 흑백을 전도해 사람들의 정상 심리를 교란하는 동시에 대규모적인 민중운동으로 기세를 돋우는데 이는 사람들이 양심을 찾는데 어려움을 더해준다. 이때 외부에서 오는(들려주는) 목소리가 매우 중요하며 매우 귀중하다. 아이히만은 “내 양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외부의 목소리가 없었다”고 털어놨다. 이로부터 보면 현재 파룬궁을 박해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행운이라고 본다.

중국공산당의 독재 하에서, 파룬궁 박해 운동 중에서 박해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은 ‘상부 명령에 복종’했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새로운 ‘아이히만’이 됐다. 그들이 올바른 것과 악한 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좋은 사람을 박해한 천인공노할 죄는 아이히만을 초과한다. 그러나 파룬궁수련생들은 자신이 참혹한 박해를 받는 상황에서도 줄곧 진상을 알리면서 사람들의 양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진상은 앞길을 가리키는 등대로서 사람들이 거짓말의 미혹에서 벗어나게 하며 오랫동안 묻혀 있던 양심을 되찾게 한다. 이는 역대로 있어본 적이 없는 일이다. 파룬궁수련생들은 자비로 이런 하늘의 뜻을 전하고 있다. 파룬궁은 불법수련(佛法修煉)으로 회개하지 않는 박해자들은 인간세상의 심판을 받을 뿐만 아니라 우주정법 중에서 도태될 것이며 구도 받을 사람은 꼭 양심이 남아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아이히만들은 파룬궁수련생들의 소리를 귀담아 듣고 파룬궁 진상을 알고 양심을 되찾아 사악한 명령을 거절하고 구도될 유일한 기회를 놓치지 말기 바란다. 어떻게 하는가는 사람마다 스스로 각자의 돌아갈 최종 목적지를 선택하면 된다.

원문발표: 2015년 8월 28일
문장분류: 시사평론>세상인심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5/8/28/31482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