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후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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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 살해2. 네로황제 로마에 불 지르고 기독교 신자를 박해3. 아우렐리우스와 엔터니 대 역병4. 데키우스 황제와 ‘키프레안의 대 역병’5. 최후의 발광과 참회6. 군사 탄딩7. 역사적 경시
다른 사람의 성공과 실패를 자신의 거울로 삼으며 역사를 거울로 삼아, 역대 왕조의 흥망성쇠를 관찰할 수 있다. 역사의 교훈은 언제나 계속해서 재연되면서 후세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워 주었다.기독교 초기의 역사를 펼쳐보면 한 장면 한 장면이 모두 마음을 놀라게 하고 넋이 뒤흔들리게 하고 있는데, 그런 옛일들이 오늘의 인류에게 증명의 깨우침을주고 있다.
1. 예수를 살해
기원전 64~17년, 카이사르와 그의 생질, 손자는 점차 공화제를 폐지하고 고대 로마제국을 건립했다. 기원전 33년경 제왕 통치를 이어받은 유태인 지역사람들은 유태교 제사장을 통해 예수를 모함하는 고소를 제기했다. 이들의압력을 견디지 못한 고대 로마총독은 예수에 대해 문죄의 고문을 가했고, 결국 유태인들의 여론에 따라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못을 박았다. 이때부터 기독교 신앙에 대한 박해가 시작됐으며, 역사적인 악몽이 시작된 것이다.
2. 네로황제, 로마에 방화하고 기독교 신자를 박해
서기 54년 네로가 로마의 황제로 즉위했다. 네로는 로마역사상 가장 잔인하고 황음한 황제였다. 걸핏하면 살인을 일삼았는데, 생모와 형제들, 두 아내까지 죽였다. 기원 64년 네로는 황궁을 증축하려고(당시 황궁 주변의 민가를 철거하기 어려워) 로마 시내에 불을 지르고, “기독교도들이 방화를 했다.”는 유언비어를 날조하여, 로마의 민중들로부터 박해를 받도록 죄를 뒤집어 씌웠다. 이로 인해 기독교 신자가 대량으로 학살당했다. 심지어 그들을 로마사람들이 관람하는 격투기장에 던져 넣어 맹수들에게 물려 찢겨죽게 했는데, 로마사람들이 지켜보며 부르짖는 속에서 기독교 신자들이 죽어갔으며, 기독교 신자를 불쏘시개와 함께 화원기둥에 묶어놓고 불을 질러 야외 파티의 횃불로 삼기도 했다.
이 발광적인 박해는 네로황제와 로마인들에게 하나의 화근을 심어 놓은 것이다. 서기 65년 고대 로마에 역병(후세 의학자는 중증 학질로 인정)이 폭발적으로 창궐했고, 기원 68년 폭정에 항거하는 민중봉기(起義)가 일어나 네로는 도망 중에 자살했는데 그 때 나이가 31세였다.
3. 아우렐리우스와 ‘안토니 대 역병’
로마의 후임 역대 제왕들은 여전히 계속해서 기독교를 박해했다. 그들은 신앙을 박해하면 나라, 인민, 자신에게 악보를 가져다준다는 것을 믿지 않았고, 그 전의 역병이 하늘의 경고임을 더욱 믿지 않았다. 기독교는 줄곧 불법적인 것으로 취급되어, 어떤 지방장관은 엄하게 탄압하거나 심지어 학살하기까지 했으며 또 어떤 관원은 눈감아 주기도 했다. 박해의 강도가 시기에 따라 느슨했다가 때로는 박차를 가하거나 하면서 300년간이나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지속됐으며, 그에 따라 로마를 휩쓰는 역병의 망령도 사라지지 않았다.
서기 161년 16대 로마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ntonius)가 즉위했다, 후세 사람은 그를 현명한 군주, 철학가, 군사전략가라 부르긴 했지만 그가 일으킨 기독교에 대한 대 박해는 그의 비극적인 운명을 정해 놓았다. 아시아, 구라파, 아프리카 등 3대 주를 횡단하던 고대 로마제국의 황금시대는 그의 손에서 무너졌다. 이는 중국 5대시기 후의 주황제 채영(柴榮)과 아주 흡사하다. 채영 역시 후세에 ‘영명한 군주’로 불렸고, 전투공로가 대단했으나, 역시 신앙을 박해(채영은 전국적으로 ‘멸불’했다)했으며, 역시 전쟁 중에 병에 걸려 급사했고, 나라를 망쳤다.
네로의 박해는 단지 로마시내에서였지만 아우렐리우스는 전국적으로 기독교를 탄압하며 말살하려고 했다. 그는, “기독교신자의 가산을 고발자에게 귀속시켜준다.”는 공고를 내어 전 국민이 기독교를 수색하고 고발하도록 회유했다.로마정부는 각종 혹형으로 기독교신자가 신앙을 포기하도록 강요했고, 신앙을 포기하지 않으면 목을 자르거나 격투기장의 맹수에게 넣어 찢기어죽게 하면서 이 광경을 사람들에게 재미로 구경하게 했다.
서기 166년 한 차례 대 역병(페스트)이 창궐해서 전국을 휩쓸었는데, 역사상 이를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성을 딴 “안토니 역병”이라 부른다. 사서에 기재된 내용을 보면 몸서리쳐 진다. “매장하는 사람이 없어 시신은 길바닥에 방치되어 썩었는데, 시신은 배가 부풀어 올랐고, 크게 벌린 입에서는 짙은 고름이 홍수와도 같이 뿜어져 나왔으며, 눈알은 빨갛고 손은 위로 높이 치켜들었다. 사체위에 사체가 겹쳐져 쌓여 있었고, 길모퉁이, 거리, 정원에서, 그리고 교회당에서 시체들이 온통 썩고 있었다. 해상에는 옅은 안개 속에 선박이 떠 있었는데, 그 죄악적인 선원들 역시 분노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모두 역병에 걸려 죽었으므로, 배는 파도위에 떠 있는 묘지로 변해버렸다.”인구통계자료의 연구에 의하면 ‘안토니 역병’의 평균 사망률은 7~10%, 도시와 군대는 약 13~15%였는데, 16년 동안 기승을 부렸다고 한다. 기원 169년 아우렐리우스와 함께 로마를 공동으로 통치했던 루키우스 베루스(Verus)는 군부대에서 역병으로 죽었고, 기원 175년에 아우렐리우스 역시 역병으로 죽었다.
4. 데키우스 황제와 ‘키프레안의 역병’
서기 249년 데키우스 발비누수Decius balbinus)가 즉위했다. 그때 거대한 로마제국은 이미 위기가 겹쳤다. 그는 위기를 반전시키려는 목적으로 전국적으로 전례가 없는 신앙적 도발로 박해를 가하기 시작했다. 법률을 제정하여, “사람마다 모두 반드시 로마의 신상과 로마제왕 상에 제사를 지내고, 그 사실을 증명하는 정부의 증명서를 발급받아야 하며, 그 증명서를 소지 하지 않은 사람은 사형에 처한다”는 포고령을 내렸다.
이는 기독교를 향한 계획적인 박해였다. 형식상에서 기독교신자의 신앙에 대한 모독이었다. 기독교신앙은 다른 신(바로 불교의 ‘불이법문’과 같음)을 모시지 않으며 승인하지도 않는다. 이는 정부가 법령형식으로 기독교의 교규와 계율적 신앙을 훼멸시키려는 술책이었던 것이다. 수많은 기독교신자들이 견정불이한 자세로 로마정부에 굴복하지 않고 처형당했다. 다음 해 역병이 다시 발병하여 창궐했다. 이번 역병은 기독교의 카르타게 주교인 키프레안(Cyprian)의 이름을 붙여 ‘키프레안 역병’이라고 불린다.
데키우스 황제는 즉위한 지 2년 만에 전사했으며, 이때의 역병은 근 20여 년간 창궐하면서 2,500만 명이 죽었는데, 역사상 사망자 수가 가장 많은 역병 중의 하나였다. 로마에 역병이 최고조에 달할 때는 매일 5,000명이 죽어나갔다. 그러므로 군대의 전투력은 크게 감소됐으며, 270년에 퀸틸루스황제도 역병으로 죽었다.
(계속)
문장발표 : 2014년 4월 30일
문장분류 : 시사평론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4/4/30/290541.html